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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논평

이 시대 ‘전문가’는 누구인가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했으니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오늘 우리에게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려 있는 수상한 시대임을 절감한다. 지금 (이상하게도) 진단서가 사건의 중심처럼 되어 있지만, 우리는 진단서가 정확한지 아닌지 물으려 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을 통해 진단서가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의학적’ 판단이 얼마나 불확실한지, 그리고 ‘전문가’의 전문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지, 알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국가폭력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정하는 데에 사망진단서는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 명백한 인과관계를 일부러 회피하는 모든 논란은 다른 의도를 가진 ‘노이즈’임을 강조한다. ‘병사’와 ‘외인사’를 두고 다투는 것이 근본 원인 또는 구조적 원인으로서 국가폭력을 가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진단서에 대한 심판은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충분하니, 다른 진실을 묻는 것이 급하다.   오늘 우리가 물으려 하는 것은 전문가와 전문성의 역할이다. 부수 효과 또는 한가한 질문인지도 모르지만, 작년의 메르스나 올해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볼 때 이 질문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이른바 사법 전문가의 일탈과 비윤리, 몰염치, 그리고 다시 있을 이 죽음의 ‘사법화’와도 맞물려 있다.   먼저 전문직과 전문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이에 대해서는, 마침 이번에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라, 의료 전문직을 원형으로 삼을 만하다. 서양에서 의료 전문가는 신학과 법률 전문가와 더불어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적 전문직이다. 이들 전문가가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사회가 어떻게 반응했는가가 다른 전문직에게도 모델이 되었다.   ‘전문가주의’(또는 프로페셔널리즘)라는 말이

서리풀 논평

지진까지 보탠 ‘위험 사회’

경상북도 경주에 지진이 발생한 후 일주일이 다 되도록 여진이 계속된다고 한다. 우선, 피해를 보거나 불안에 잠 못 이룬 모든 사람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앞으로 있을 큰 지진에 대한 공포가 보태졌을 터이니,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후유증을 줄이고 새롭게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진이 자연재해인 한, 지진이 일어난 후 대처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모두가 알고 비판한 그대로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에서 달라진 것을 찾기 어렵다. 국민안전처는 물론이고 대통령과 행정부 전체가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잘못 했느냐고? 지진 후에 빨리 회의를 소집해 보고를 받고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휴대전화 문자 통보는 늦어졌고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는 먹통이었다. 생방송 중이던 경주 주민이 2차 지진이 생기자 방송 진행자에게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시스템은 아예 구축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매뉴얼을 만들어 놓았다고, 대비 태세를 점검했다고, 가상 훈련을 한번 했다고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아니다. 이번 사태로 보건대, 이 땅에 ‘재난 대비 시스템’은 아직 없다! 공중 보건 위기 대비 시스템은 있을까? 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다시 요구한다. 제대로 된 대비 시스템을 구축하라. 이번에는 지진이니, ‘지진용’ 대책을 내놓겠다고 하지 말라. 대규모 화재, 또 다른 감염병, 비행기나 배의 사고, 홍수, 제2의 삼풍이나 성수대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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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과 더 많은 민주주의

  합헌 결정 이후 한국기자협회가 낸 성명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아니, 한국 언론의 민낯을 드러낸 역사적 기록이다.   “취재원을 만나는 일상적인 업무 전체가 규제와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취재 활동의 제약은 불가피해질 것” “사정당국이 자의적인 법 적용으로 정상적인 취재ㆍ보도활동을 제한하고”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 한 여당 국회의원의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앞뒤를 알 수 없는 논리는 그만두고라도, ‘투쟁’이나 ‘언론의 자유’를 거론하다니 민망하다 못해 비현실적이다.   “피땀 어린 투쟁을 통해 박제된 조문에서 살아있는 권리로 이제 막 숨이 붙기 시작한 언론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평가절하하는 헌재의 태도”, “헌재가 바라는 대한민국 사회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보다 검열과 규율이 앞서는 감시사회임이 이로써 명백해졌다.” (바로가기)   공무원들도 말은 점잖게 하지만, 근본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공무원의 반응을 전하는 신문 기사 하나를 인용한다(앞부분은 기사고, 따옴표 안은 공무원의 말이다).   일부에선 투명성 제고의 대가로 일부 정책조정 기능이 약화될 우려를 제기했다. 현실과 접목된 정책 수립 및 시행을 위해서는 다양한 대민 접촉이 불가피한데, 오해를 피하기 위해 거리를 두게 되리란 예상이다….“정책 결정 과정에 공식적인 의사소통만으로는 다양한 이해관계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워 비공식적인 창구를 활용하는 경우도 많은데, 아무래도 그런 부분은 조심할 수밖에 없다”며 “대외관계를 맺는 부서는 특히 난감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바로가기)   우리도 이런 어법에 익숙하다. 총론 찬성 각론 반대? 본심은 백 퍼센트 반대다.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 그냥

서리풀 논평

사드 – ‘제국’의 포로가 된 ‘민중’의 삶과 건강

  이 땅의 그 누구도 격랑을 피해갈 수 없다면, 이 주간 논평 또한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사드) 배치에 의견을 밝히는 것이 의무일 것이다. 우리 스스로 좋은 삶과 사회를 만들어가는 책임을 공유한다고 천명한 터에, 거기에 통째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 우리 연구소가 주업으로 삼고 있는 건강 문제는 부차적이다. 강력한 전자파가 주변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위협한다고 하니, 보건 이슈가 포함되어 있고 그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사드 배치는 어느 특정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이 땅 모든 사람의 삶을 전면적으로 위협하는 ‘보편’의 문제다.   그리하여 우선 강력하게 요구한다. 모든 문제를 민주적으로, 그리고 투명하게 결정하라. 안보와 군사 기밀이 어떻다는 말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용어와 개념으로, 숨기고 얼버무리지 말라. ‘민주공화국’이 헌정의 기본 원리라면, 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가 아닌가. 어느 지역에 배치하는 것이 알맞다고, 주민에게 묻는 정도가 아니다. 텔레비전의 사이비 토론은 더구나 아니다. 북한의 군사위협,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이 알고, 생각하며, 토론한 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사드 또한 더 많고 깊은 민주주의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아니, 이런 중요한 일일수록 더욱 민주적이어야 한다. 민주적으로 토론하자고 요구했지만, 어떻게 토론하든 우리는 사드 배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으로 확신한다. 한 가지 명확한 기준, 적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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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과 건강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며칠 전은 36주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었다. 무엇을 ‘기념’해야 할까. 우선 힘들게 일궈낸 ‘민주화’를 기억하고, 현재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은 어떠한지, 어떤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해, 민주화 ‘이전’과 그 ‘과정’에서 국가가 자행했던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을 가장 극단적으로 겪은 후 살아남은 이들의 삶도 기억해야 한다. 해방 이후 현대사만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 폭력 또는 국가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다. 제주 4.3 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형제복지원 사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폭력 경험이, 살아남은 이들의 삶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경우, 사건 후 약 30년이 지난 2006년까지도 피해자의 24.9~29.5%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호소했다. (☞관련 자료 : <5.18 민주 유공자 생활 실태 및 후유증 실태 조사

서리풀 논평

총선 이후,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잠시 총선 결과를 생각한다. 집권 여당의 참패,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들’만 모르고 다들 예상했던 것인가. 개표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니 이제는 ‘후(後)견지명’도 난무한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결과를 일부러 낮추어 비틀 필요는 없다. 그동안 정부 여당이 해온 일을 심판했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럴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4월 16일 2주기를 지난 세월호 사고만 해도 그렇다. 사고 수습도 수습이지만, 지금껏 ‘국가’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일로 버텨왔다. 당사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욕하고 조롱했다(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실정’을 말하다 보면, 국정교과서며 남북관계, 경제와 일자리 대책도 저절로 떠오른다. 담뱃값 인상에 기댄 세수 확대에 원격의료와 의료 수출을 앞세운 경제성장이라니. 마치 자기만 아는 비법인 양 의심과 반대를 가르치려 들었다. 비록 후견지명일망정, 심판은 당연하다.   총선 결과는 앞날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당의 오만한 전횡을 막을 수 있으니, 보통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특히 핵심 ‘개혁’ 과제라고 소리를 높인 노동개혁을 주목한다. 일자리는 그대로인데 비정규직과 파견만 늘릴 ‘사이비’ 개혁을 바로잡아야 한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서비스법)도 ‘정상화’되길 바란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서비스 산업 육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동형’ 정책이라고 주장해 왔다 (바로가기). 앞으로도 이 법이 필요하다고 우기겠지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혹시 몇 가지라도 좋은 쪽으로 변화할 수 있다면, 특히 법이 그렇다면, 총선이 만들어낸 새로운 의회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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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참여’인가

  무력해도, 염증이 나도, 참여를 이야기해야 하는 시절이 다시 왔다. 국회의원에 출마한다는 많은 사람이 정치 ‘참여’를 말하고, 이제 또 수많은 사람이 투표 ‘참여’를 말할 차례다. 최악을 피기 위해서, 차라리 차악을 위해서라도 참여하라, 이미 많이 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들을 이야기다. 적어도 투표에 관한 한, 참여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개념이 ‘합리적 무지’ 가설이 아닌가 한다. 노파심에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투표의 본래 목적이 가장 좋은 후보자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 일은 절대 만만치 않다. 공부하고 생각하며 정보를 모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 직접 만나 인품을 보고 이야기를 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다고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방법이 있다 해도 너무 힘들다. 무슨 돈과 정성으로, 게다가 무릇 후보자란 얼마나 매끄럽게 겉을 가꾸었을 텐데. 진짜 정보를 얻는 것도 그것을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노력의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투표해 봐야 기껏 한 표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니 전혀 없을 것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이니, 누가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느니, 내 한 표가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이런 투표의 ‘가성비’는 제로에 가깝다(물론, 비례대표는 전혀 다르다. 내 한표의 영향이 크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만에 하나, 다행스럽게 그런 사람을 뽑아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다 치자. 그 사람이 나를, 내 의견을, 내가 지지하는 정책을 직접 항상 ‘대표’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으니, 대의민주주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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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이후의 사람과 사회

  “이제 한판이라도 이기고 싶다”. 알파고와 대결하는 이세돌 9단이 했다는 말이다. 이제 그의 희망은 이뤄졌지만, 알파고는 이미 이겼다. 그것도 ‘완승’이다. 바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바탕 판타지 ‘쇼’를 펼침으로써 알파고, 인공지능,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공룡기업, 구글을 ‘사회화’ 그리고 ‘경제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시장에서. 인공지능의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우리는 모두 이미 필요한 만큼 안다. 모든 신문과 언론매체가 지면과 시간을 들여 가르쳤으니 말이다. 한때 줄기세포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인공지능이 ‘상품’이 되었다.   조금 냉정해지자. 인공지능의 역사는 낙관과 비관, 희망과 좌절 사이에서 여러 번 부침을 겪었다고 한다. 조금 길게 보자.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인공지능의 역사는 지금 어디에 와있는가. ‘붐’인가 ‘거품’인가, 아니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맹아기’인가. 알파고의 뒤는 누가 이을 것인가.   “1970년대 초반의 마이신 시대부터 이미 40년이 흘렀다. 다양한 데이터로…질문에 대답하는 환경은 정돈되어 왔다. 지금이라면 의료 진단도 상당히 실용적인 수준으로 실현될 것이다. 질문 응답 시스템에 의한 진단이 보급되면 의사의 절대 수가 부족한 지역이나 원격지, 개발도상국에서의 응용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술에 의한 변화는 조금씩 세상을 바꾸어 갈게 될지도 모른다.” (마쓰오 유타카. 박기원 옮김. <인공지능과 딥러닝>. 동아M&B 펴냄)   “IBM의 연구원과 엔지니어들은 왓슨이 제퍼디 퀴즈쇼에서 우승한 이래 조직과 개인이 직면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다룰 수 있도록 능력을 향상시켜 왔고, 그 첫번째 목표는 암이었다….정형, 비정형 데이터로 기록된 진료 노트와 보고서의 의미와 맥락을 분석할

서리풀 논평

메르스 감사를 다시 하라(하자)

  감사원이 메르스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원 누리집에 공개된 보고서만 500쪽에 가까운 엄청난 분량이다 (감사원 보고서). 제대로 보기도, 찾기도 쉽지 않다. 그만큼 조사할 일이 많았다는 뜻일 터.   결과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잘못된 일의 책임자를 찾고 책임을 묻는 것은 더 그렇다. 여러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대로, 질병관리본부장이 모든 책임을 졌다. 징계를 받을 다른 공무원도 모두 실무자다. 한참 전부터 이렇게 되리라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책임을 둘러싼 투쟁의 뻔한 결과. 세월호가 그랬고, 메르스에서도 진작부터 예상되었던 바다(관련 서리풀 논평.바로가기1, 바로가기2). 용한 점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감사원이 ‘책임의 정치’를 둘러싼 역할을 제대로(!)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건소 직원까지 징계하라고 했지만, 장관은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장관의 사퇴, 새로운 공직 취임과 감사결과 발표는 시점도 절묘하다. 그뿐만 아니다. 당시 기자회견에 총리, 부총리가 나섰던 것은 홍보용 보여주기라 해도, 이들을 비롯한 최고 권력층이 실제 정책 결정에 간여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들은 책임과 징계는커녕 감사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감사원 감사에 무얼 기대하느냐는 소리가 나오지만, 이젠 이런 비판조차 새삼스럽다. 과거는 물론이고 최근에도 비슷한 시비가 여럿이다. 지난 정권이 저질렀던 자원외교나 4대강 사업을 이제야 감사한 것, 그리고 그 결과는 기억에도 생생하다. ‘책임의 정치’는 감사원의 본래 업무 영역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하지만 행정과 기술, 실무를 탓하는 것으로 ‘책임 묻기’는 끝나지 않는다.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죄를 법률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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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시립서북병원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차별받던 이들의 참여가 보건의료 개혁을 이끈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상임연구원   엊그제 서울 은평구 마을 공동체의 한 활동가가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을 보게 되었다. 4월 6일에 있었던 시립서북병원의 타운홀 미팅에 참여했던 소감을 적은 것이었다. 주민들이 병원 경영진에게 이런저런 제안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처음으로 환자가 아닌 ‘손님’ 자격으로 동네 공공 병원을 돌아보았다고 했다. 괜찮은 공공 병원을 가진 동네 주민으로서의 자부심과 뿌듯함이 느껴져서 글을 읽는 이도 덩달아 뿌듯해졌다. (☞관련 기사 : 시립서북병원과 주민들이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타운홀 미팅!) 그 글에는 “병원과 마을이 만나는 것이 생소”하다, 주민들도 “처음에는 병원에 와서 어떤 얘기를 해야 할까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솔직하게 적혀 있었다. 사실 보건의료만큼이나 전문가의 힘이 강력한 분야도 많지 않다. 보건의료 문제라고 하면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전문가’에게 미루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어지간한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