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다. 지금 유권자의 선택이 크게 바뀌지는 않으리라. 이제 정해진 결과가 드러나길 기다려야 한다.
이 선거만 두고 보면 한국의 정치는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특히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10년 전보다 오히려 못하다. 안타깝고 불만스럽다.
불평등과 양극화는 어느 때보다 심해졌지만, 정치는 경제 탓만 할 뿐 무력하다. 건강도 매 한가지다. 불평등과 가난이 기본적인 인권마저 짓밟고 있지만, 막상 문제제기도 못한 채 투표일을 맞았다.
제도 정치에 의심을 품을 만하다. 좋은 정치란 대체 무엇인가. 선거에서 누구를 잘 뽑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현실에 무슨 희망을 품기보다는 이제라도 차근차근 바닥을 다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미 우리 모두는 안다. 대통령 한 사람이, 또는 그가 대표하는 어떤 정부가 벼락같은 미래를 선물하지 못한다는 것을. 대통령과 새로운 정권은 결코 메시아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라면서 투표장에 가야 하는 것일까.
이제 우리에게도 익숙한 ‘주민참여예산제’가 약간의 실마리가 될 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제도는 브라질이 원산지다. 1989년 포르토 알레그레(세계사회포럼이 처음, 그리고 몇 번 더 열렸던 곳으로 유명하다)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아주 급진적으로 보이던 제도였는데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도) 세계은행을 거쳐 이제 한국의 제도권까지 진출했다. 브라질 국내에서는 두말 할 필요도 없다. 포르토 알레그레 이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100개가 넘는 지자체가 이 제도를 받아들였을 정도다.
브라질의 제도와 한국의 ‘주민참여예산제’가 꼭 같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냥 주민의 의견을 듣거나 참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 결정한다(!).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의회 권력의 열세를 우회하려던 브라질 노동자당(PT)의 시도는 제도화된 권력이 되었다. 참여의 ‘제도화’라고 할 수도 있다.
브라질의 실험은 참여예산제에 그치지 않았다.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이어졌고 보건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민중건강평의회’는 참여예산제가 모양만 달리한 것이다. 1994년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전국적으로 5천개 이상의 평의회를 통해 10만명 이상의 주민이 보건예산 결정에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여기서도 참여는 완전히 제도화 되었다.
그렇다고 이런 식의 참여가 갖는 의미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 말이 좋아 참여지 최하층은 여전히 배제되고 있다는 비판은 통렬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 각각인데다 실제 운영도 한계가 적지 않다. 게다가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주장은 어쩌면 진작 예상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 의회 모습 - 바로가기>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와는 초점이 다르다. 이 혁신적 제도가 전통적 의미에서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관심을 벗어난다. 늘 하던 버릇대로, 예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썼는지, 얼마나 시장 기전을 활용했는지 따지는 것이면 더구나 거리가 멀다.
초점은 제도의 변화(이 경우에는 참여예산제)가 참여와 민주를 얼마나 촉진했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더 많은 관심은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의 기반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로서 제도와 체제를 바꿀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질문은 오래된 질문의 방향을 뒤집는다.
이런 사정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연구를 소개한다. 미국 브라운 대학 바이오키 교수팀은 브라질에서 참여예산제를 시행한 지방정부 네 곳과 그렇지 않은 네 곳을 비교해 책으로 펴냈다 (바로가기). 그 결과 (참여예산제라는) ‘제도’가 사람들의 참여를 크게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마다 참여의 모양과 수준은 달랐지만, 제도를 시행한 곳이 그렇지 않은 곳보다 보통 사람들의 참여를 촉진한 것은 분명했다.
가장 적게 변화가 일어난 곳에서도 하다못해 정보의 양은 훨씬 늘어났다. 더 투명해지고 시민들이 요구를 반영할 공간이 생긴 것이다. 해석하자면, 조금 더 나은 제도가 조금 더 많은 참여를 이끌어 냈다.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도는 무시할 수 없는 변화의 동력이다.
제도가 참여를 변화시킨 것은 인도의 케랄라(Kerala) 주 역시 마찬가지다. 이 주는 진작부터 민주주의와 참여, 경제수준을 뛰어넘는 사회개발과 인간개발, 건강 수준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들이 가장 최근에 한 실험이 참여 민주주의다. 케랄라는 1996년부터 900개 이상의 마을위원회가 상향식 계획을 짜서 예산의 40% 이상을 집행하도록 했다. 여기서도 전통적 의미의 성공과 실패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참여가 늘어난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브라질의 참여예산제와 케랄라의 참여적 정책수립은 여러 가지 공통점이 많다. 하지만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제도가 참여를 촉진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든 민주주의와 참여의 역량이 있어야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를 통해 민주주의와 참여가 강화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사람들은 제도가 가지는 권력과 그것 때문에 만들어진 공간을 통해 새롭게 경험하고 배우고 실천한다. 브라질과 케랄라 모두 지역 수준에서 집권당이 제도를 구상하고 시행하지 않았으면 이런 식의 ‘실험’은 그리고 그로 인한 참여의 강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지형에서 참여와 민주는 가장 중요한 지향이자 가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어떤 대안적 사회가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물으면 더욱 더 그렇다.
정치 개혁, 평화,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새로운 노동을 말하지만, 정치, 사회적 원리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전체를 관통한다. 바로 참여와 민주의 원리로 꾸려지는 새로운 ‘주권’이다. 건강과 보건의료 역시 결정적으로 이에 좌우된다.
지금을 보면, 참여와 민주주의를 통해 축적한 사회적 역량은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다. 대통령 선거를 보더라도 허약한 현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새로운 정부가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은 이런 사회적 역량을 그대로 반영할 것이다.
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은 즉흥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이어서 믿을 수 없다. 작은 충격이나 저항만으로도 쉽게 후퇴할 것이 뻔하다. 비정규직 문제든 복지국가든, 또는 무상의료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회적 역량과 제도적 틀은 서로 발목을 잡지만 또한 서로 부추기고 돕는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정권과 정부는 새로운 권력관계와 제도적 공간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어떤 형태로 주어지든 심화된 민주주의는 그 공간을 통해 생기고 또 자란다.
투표에 참여하고 바르게 선택해야 할 백 가지도 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어떤 정부가 더 ‘깊은’ 민주주의를 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기준이다.
결코 메시아나 유토피아를 바랄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아무리 작아도 참여와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한 제도적 공간을 확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정권이어야 발전이고 진보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여도, 그냥 좀 덜 나쁠 뿐이어도, 지금은 적어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