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수요일 투표할 때 비례대표 정당명부에서 ‘국민건강당’을 찾아보기 바란다. 지난 주 집에 배달된 선거공보에서 못 봤는데.... 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처음부터 없던 정당이다.
그래도 완전히 상상이라고는 못한다. 영국의 알렉스 쉬어러(Alex Shearer)가 쓴 『초콜릿 레볼루션』(원래 제목은 Bootleg)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집권 정당이 바로 ‘국민건강당(Good For You Party)’이다. 이 책을 바탕으로 한 일본 만화영화 『초코초코 대작전』(일본에서의 제목은 Chocolate Underground이다)에는 ‘건전건강당’이지만, 큰 차이는 없다(영어 이름이 전체 주제를 말하는 데에는 좀 나은 것 같다).
실제 그런 정당이 있으면 좋겠다고? 잠간, 이름만 듣고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소설 속 국민건강당은 국민의 건강보호를 사명으로 하는 정당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강정책이 초콜릿 금지로, 초콜릿을 비롯하여 설탕이 들어간 모든 음식을 엄격하게 금한다. 초콜릿을 만들거나 유통하는 것까지 막고, 들키면 재교육 수용소에 가두고 뇌를 세척할 정도다. 국민건강당은 건강을 명분으로 국민을 전체주의적으로 통제하는, 말하자면 극복 대상이다. 소설은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다양하게 주제를 드러내지만, 이 정도 뼈대 이야기만 가지고도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쉽게 어림할 수 있다. 이야기는 정치, 국가, 선거, 민주주의, 참여, 전체주의 같은 것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건강과 국민건강당은,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소설적 소재나 장치 정도에 지나지 않을 뿐, 본격적으로 정당과 건강을 묶어내지는 않는다.
소설 밖 현실에도 건강당이 있기는 하다. 다른 나라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렵고, 그나마 대만 정도가 비슷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정당이 많기로 유명한 대만에는 ‘전민건강연맹(全民健康聯盟)’이라는 당이 있고, ‘중화민생당(中華民生黨)’이라는 정당은 영어 이름으로 ‘Health Party of the Republic of China’를 쓴다. 그렇지만 이들이 실제 의미가 있는 정당인지는 잘 알 수 없다. 등록된 정당만 100개가 넘는 그야말로 정당의 백화점 같은 곳이 대만인데다, 이 정당들이 무슨 정치활동을 하는지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건강당이 ‘실재’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의미에서 ‘국민건강당’과 ‘Health Party’는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건강과 정당은 조금은 바람직하지 않는 방법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2012년 4월 둘째 주에 건강당을 떠올린 이유는 이보다는 건강과 보건의료에서 정당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외부적 요인 때문에 더욱 진지해 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총선에서는 국회의원 개인을 선출하는 것과는 별개로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선보다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더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다. 비례대표제를 통해 처음부터 정당을 선택하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가 다수파의 의석독점을 방지하고 소수와 약자를 공정하게 대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정당 선택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건강과 보건의료가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대부분 사람이 인정한다. 그렇다면 건강과 보건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또한 드러나는 방식은 정당을 피할 수 없다. 대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가치를 두고 논란이 많지만, 정당은 현실 정치의 핵심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정책과 제도, 그리고 자원 배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치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정당 없는 현실 정치를 상상할 수 없다면, 건강과 보건 역시 정당을 매개로 한 정치의 한 목표이자 대상, 참여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건강과 보건을 정당정치의 틀로 보는 일은 아직도 낯설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지금까지 건강과 보건의 틀을 규정하는 정당의 역할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정당들은 정강정책을 통해 건강과 보건의 지향을 희미하게나마 표현하고, 선거마다 표를 위해 공약을 내걸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을 좁은 이해관계의 정치를 넘어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드물었다. 건강과 보건이 정당과 ‘느슨한’ 관계 속에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건강과 보건 자체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문성과 가치중립의 상징 뒤에서 건강은 당연히 비정치적인 것으로 치부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한국 정당정치 일반의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즉, 정당정치의 ‘비정치성’은 단지 건강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미숙하고 불안정한 한국 정당의 정치적 역할은 분야를 가릴 것 없이 비슷하게 되풀이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정당은 ‘절반’의 역할을 하는 데에 머물러 있다. 정당정치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이해했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lmer E. Schattschneider)는 정당이 공직자를 선출하는 데 머무를 뿐 정책강령을 수립하고 실현하지 못한다면 시민은 절반의 주권자일 뿐 정부를 통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절반의 인민주권』). 그의 말처럼 정책과 지향을 통해 시민의 주권을 실현하지 못하는 한, 정당의 역할은 미완성이다.
건강과 보건의료를 매개하는 정당의 역할은 여전히 약하다. 한국에서 정당의 정치적, 정책적 지향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데다, 건강과 보건의료는 주변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의 선거를 앞둔 지금, 현실적으로 정당정치는 가장 중요한 정치의 장이다. 그리고 건강과 보건은 그 정치사회적 비중에 값하는 만큼은 정치화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정치화는 더 구체적으로는 ‘대표체계’를 강화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허약한 대표체계라는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제도 내적으로는 사회경제적 내용(이는 곧 건강과 보건에 반영된다)을 최대로 반영하는 대표체계가 현실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건강과 보건의 정치사회적 과제는 대표체계에 적절하게 반영됨으로써 한편으로 제도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진보한다.
사회경제적 내용으로서의 건강과 보건의료는 정당의 정강정책을 바탕으로 그리고 선거를 통하여 공식적인 대표체계 안으로 통합된다. 영리병원과 건강 불평등을 예로 들자면, 이를 해결하겠다는 정강정책과 공약을 내건 정당이 정치적 대표체계에 통합될 때 이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비로소 제도내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건강과 보건이 ‘정당정치화’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제가 한꺼번에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건강과 보건이 정당정치 속에서 정치화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정치화된 건강이 선거를 통해 제대로 ‘대표되는’ 것이다.
가장 현실적으로 말하면, 이번 선거에서는 비례대표의 정당투표를 통하여 건강과 보건의 사회경제적 내용이 대표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다시 건강과 보건의 정치화를 순환적으로 강화한다. 그렇다면, 비록 그 관계가 아직은 느슨하다 하더라도 정당을 선택하는 것은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정치적 과제로서의 건강과 보건을 대표체계 내로 통합시킬 정당을 잘 골라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이번 선거의 정당 명부에서 ‘건강당’은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건강이 대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적 내용으로서의 건강과 보건은 다른 영역과 ‘제도적 보완성(institutional complementarity)’을 가져야 하며, 이는 (바람직하게는) 정당의 총체적인 지향성으로 수렴된다. 다시 말하면, 건강과 보건의 사회경제적 과제와 잘 ‘정렬되는(aligned)’ 지향을 가진 정당에 투표하는 것이 대표체계를 강화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 정당정치와 대의제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단 하나뿐인 수단인지는 논쟁적이다. 직접 민주주의와 ‘거리의 정치’가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보완적인 것인지 역시 논의가 더 필요하다. 이 문제는 기회가 되는 대로 따로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