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이어 전해진 노동자 건강 문제 세 가지.
① 지난 3월 30일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인 이 아무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쌍용차 정리해고 이후 목숨을 잃은 22번째 희생자다. 자살, 돌연사... 직접이든 간접이든 정리해고 때문에 노동자와 가족의 죽음이 멈추지 않는다.
② 5월 7일 숨진 이윤정씨는 18살 때부터 6년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다. 두 아이의 어머니로, 2010년 뇌종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반올림이 모은 희생자 수는 놀랍다. 그의 죽음은 삼성전자 반도체의 직업병 의심 제보자 90명 중 32번째이고, 삼성전기 공장까지 합하면 140명 중 55번째이다.
③ “방사선에 많이 노출된 원전 근무 노동자들의 염색체형 이상이 건강한 일반 성인보다 더 많다. 염색체 이상이 더 많다는 것은 암 발생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뜻한다.” 5월 11일 직업환경의학회에서 주영수 교수가 발표한 내용이다. 염색체 이상의 빈도는 다른 팀이 수행한 연구(서울대 의학연구원의 『원전 종사자 및 주변지역 주민 역학조사 연구』) 결과에 들어있었지만, 그 앞의 주민설명회에서는 발표되지 않았다. 주민들의 암을 문제 삼고 있는 동안 노동자들도 암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였던 고 이윤정씨의 시민사회장 영결식 (출처: 참세상 2012.05.10)
둘은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암, 맥락과 양상은 다르지만 건강으로 치자면 생사가 걸린 극단적인 결과다. 우선, 더 이상의 죽음, 사회적 타살을 막기 위해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사회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한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나 삼성전자, 그것도 죽음이 아니면,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의 건강이 사회적 관심을 끄는 일은 드물다. 그동안 몇 번 사회적 관심을 끌었던 산업재해도 죽거나 아주 심각하지 않으면 노동 내부의 문제를 벗어나기 어렵다. 실업과 해고, 비정규 노동자에는 차라리 시민으로서의 관심이 있을지언정, 보편적 건강문제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원전 노동자들의 건강문제도 주민들에 비해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노동자는 건강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노동자의 건강은 고립된 섬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건강과 보건을 ‘일반’으로 표현한다면, 노동자 건강은 ‘특수’라는 성격 규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정책은 고용노동부, 치료는 산재보험, 전문인력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식의 영역 규정부터가 완강하다. 사실 이러한 ‘이분법’은 오래 전에 굳어진 것이라 문제제기 자체가 새삼스러울지도 모른다.
노동자 건강문제를 분리하면 분명 장점이 있다. 나누는 것은 곧 전문화와 특수화를 뜻하고, 이는 전문성의 발휘, 집중, 효율성, 차별적 우대와 같은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다. 그리고 이런 장점(아니면 그 가능성)은 노동자 건강을 분리해 온 강력한 근거이다. 일부러 그렇게 하기도 했다. 노동의 내부와 외부를 가릴 것 없이, 노동자의 건강이 특별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여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자 건강문제가 분리됨으로써(노동건강-일반건강의 분리) 실제로는 건강에서 노동이 ‘은폐’되는 결과가 빚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은폐는 일반적으로는 건강에서 노동을 제외하는 것으로, 노동 내부에서는 노동자 건강을 최소한의 범위에서 제도화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노동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시대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다. 그렇다면 건강 역시, 그것이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든, 노동(직장)을 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향신문 2011년 11월 25일자를 보면, 한국의 노동시간은 2010년을 기준으로 연간 2,193시간이고, 이는 환산하면 주당 42시간에 이른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의 조건과 환경이 바로 노동이자 직장이라는 가리킨다. 그런데 그 직장은 일주일에 52시간 이상 일하는 장시간 노동자가 15.0-41.9%에 이르고, 열 명에 한 명꼴로 밤샘을 해야 하는, 또 중금속과 소음, 교대근무,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는, 그런 곳이다. 노동(직장)이 곧 핵심적인 건강의 장(場)이라는 것은 차라리 상식이 아닌가.
그렇지만 건강과 노동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좀처럼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장시간 노동, 교대근무, 스트레스의 건강영향이 잘 알려져 있는데도 노동의 개혁보다는 생활습관과 스트레스 대처라는 개인의 책임과 과제로 환원된다. “노동환경이 나쁘다”고 하기보다는 “나를 발전시켜 더 괜찮은 직장으로 옮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사회와 문화, 그리고 지식체계가 이런 의도적 분리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물론이다. 건강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을 결정하는 데에 그리고 그것이 해결되는 데에 노동은 ‘체계적’으로 숨겨진다.
일단 노동(자)의 건강문제로 규정된 이후에는 노동과 건강의 관계는 제도화된다(예: 산재보험). 물론 이 때 제도화는 최소한의 범위를 넘지 않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도 바깥으로 배제되는 것과 함께 노동과 건강의 관계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쌍용차와 삼성전자의 죽음과 질병은, 불확실한 인과관계의 증명과정을 통해, 그리고 그를 둘러싼 지루한 다툼을 통해(산재보험을 포함해서), 엄격하게 규정되고 최소한으로 좁아진 문제가 된다. 쌍용차나 삼성이 노동자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문제를 제도 바깥으로 몰아내고 얻은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노동과 건강은 다시 멀리 떨어진다.
이제 노동과 건강이 연결되어야 한다. 단기적인 과제는 숨겨진 건강과 노동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건강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건강과 보건의료체계의 틀 안에서 통합적으로 구성, 작동되어야 한다. 노동은 건강 전체의 핵심 결정요인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보건의료는 노동을 중요한 행위자이자 문제해결의 당사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보건소가 직업환경보건 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지역보건의 핵심 주체인 보건소가 사업장과 노동자를 빼고 보건사업을 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또, 재정과 보건의료 서비스 영역에서 산재보험과 건강보장이 통합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제안은 단지 몇 가지 단편적인 예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 또는 노동자의 가족이라는 점을 생각하자. 통합적 관점을 가지고 노동을 중심에 놓는 ‘건강레짐’을 구축하는 것이 긴요하다.
※ 참고한 자료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홈 페이지 (http://cafe.daum.net/samsunglab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