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연구通>
주류 언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기술이나 치료법을 소개하지만,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나 건강불평등, 저항적 건강담론에 대한 연구결과들은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수요일,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논문, 혹은 논쟁적 주제를 다룬 논문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흔히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제안 부탁 드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연구논문 추천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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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乙)’로 산다는 것의 스트레스와 건강
Sapolsky RM. Social status and health in humans and other animals. Annual Review of Anthropology 2004;33:393-418 (원문 보러가기: http://fave.co/14kanjd)
요즈음 한국 사회는 가히 ‘을’의 수난시대라 할 만하다. ‘을’의 삶이 고달픈 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다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갑’들의 유난한 진상짓이 모처럼 널리 알려졌을 뿐.
이번 주에 소개할 논문은 저명한 생물학자이며 신경내분비학자인 새폴스키 (Robert M. Sapolsky)가 이미 10년 전에 발표한 것으로, 사회적 지위와 스트레스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오랑우탄, 비비, 침팬지 등 사회적 동물 대상의 실험연구, 관찰연구 논문 수십 편을 검토하여, 종속적 위치 (subordination)가 스트레스 반응, 건강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종합했다.
외부의 스트레스는 생물의 항상성을 깨뜨리고 스트레스 반응을 유발한다. 예컨대 맹수가 출현하면 먹잇감 동물의 교감신경과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이 활성화된다. 그러면 비축해두었던 에너지가 근육으로 옮겨지고 혈압은 높아지며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통증이 무뎌지고 지각이 예민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빨리, 멀리 도망가지 않으면 잡혀먹고 말 테니, 동물들에게 몹시 긴요한 생존수단이다.
그런데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면 문제가 생긴다. 아까는 결정적인 생존수단이었던 스트레스 반응 - 혈압이 높아지고 비축되었던 혈당이 간에서 혈관으로 이동하고 심박수가 높아지는 – 이 지속된다고 생각해보자. 그 결과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혈압, 당뇨, 대사증후군이다. 만성적 스트레스와 심혈관 질환의 연관성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회적 동물들에게는 추위나 기근, 맹수만이 스트레스는 아니다. 사회적 종속은 신체적 스트레스는 물론 심리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리고 이는 대개 만성적이다. 지배/종속 관계에서 ‘을’이 된다는 것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우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생쥐 실험에서, 똑같은 충격을 가하는 경우에도 충격 5분 전에 종소리 같은 경고를 줌으로써 충격 상황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면 스트레스 반응이 덜해진다고 한다. 상황의 통제력이 줄어드는 것 또한 ‘을’의 중요한 스트레스 요인이다. 충격이 가해질 때 지렛대를 밟으면 충격이 완화된다는 것을 인지하도록 훈련시키면, 심지어 지렛대가 고장 난 경우에도 생쥐는 지렛대를 밟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스트레스가 완화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을’의 특징은 욕구불만의 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충격이 가해지는 상황이라도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먹이, 쳇바퀴 등이 있으면 생쥐의 스트레스 반응은 훨씬 덜해진다. 마땅한 다른 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다른 개체를 거칠게 공격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매우 효과적인 스트레스 대응 방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이轉移 공격성’은 영장류, 인간에게 매우 흔하다고 한다.
‘을’ 처지의 동물들은 평상시에도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높고, 스트레스 반응이 둔화되거나 혹은 스트레스 이후 평소 수준으로의 회복이 더딘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고혈압이나 심혈관 질환의 위험이 높아지고, 암컷에서는 생식이상이 관찰되기도 한다. 수컷의 생식이상, 면역 기능 저하에 대한 연구결과들은 일관되지 않다. 또한 사회적 종속의 건강위험이 모든 동물에서 똑같이 관찰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종속이라는 것이 곧바로 스트레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을’ 처지의 동물들 중, ‘갑’ 동물들에 의한 괴롭힘이 심한 경우, 혹은 ‘을’들에게 마땅한 스트레스 해소 출구가 없는 경우에 스트레스 호르몬이 유달리 높은 경향이 있었다. 또 집단의 위계가 안정적이냐 변동이 심하냐, 개별 동물들의 타고난 성향이 어떠한가도 스트레스 대응에 영향을 미쳤다.
요약하자면, 모든 연구들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사회적 동물들 사이에서 ‘을’로 살아간다는 것은 신체적, 심리적 스트레스에 노출될 가능성을 높이고, 이는 만성적인 스트레스 반응을 유발시켜 질병 발생의 위험을 높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바로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들 사이에서 사회계층에 따른 건강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러한 불평등의 일부는 이렇게 지배/종속 관계에 따른 스트레스 반응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