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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리풀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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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3-25 00:11
돌봄 노동자의 의무와 권리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681    

지난 석 달 사이 사회복지 공무원이 세 명이나 아까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자세한 개인적 사정이나 상황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일하는 환경과 노동이 사고를 일으킨 한 가지 조건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떤 사회복지사는 자정을 넘겨 퇴근해야 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다.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 신체적 고단함이 컸다는 것이 언론의 취재결과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자살은 당연히 ‘직업병’이다. 
  
자연스레 사회복지 공무원의 고단함이 드러났다. 한국의 사회복지 공무원이 담당하는 인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의 세 배나 된다. 이제라도 사회복지 공무원 수를 늘리는 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을 갖추어야 그 다음을 말할 수 있다. 지나친 노동시간과 가혹한 근로조건 속에서 복지 서비스의 질을 찾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당위는 단지 일부일 뿐이다. 행정이나 관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나마 미봉책에 그친다. 인력의 적정성에 매몰되면 논쟁은 흔히 투입과 산출의 효율성을 두고 다툰다. 끝없이 더 나은 관리 방법을 찾는 ‘기술 숭배’가 당연하다.      

사실, 사회복지 공무원들의 아픈 현실은 모든 돌봄 노동이 겪는 문제와 그리 다르지 않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사회적, 공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많은 노동이 비슷하다.  

이런 노동은 대개 생산과 소비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이 직접 접촉하고 상호작용이 생기며 정서적 교류와 반응이 뒤따른다. 그래서 ‘휴먼’ 서비스다. 관공서에서 민원서류 한 장 떼는 일, 가게에서 물건 고르는 일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쉽다. 

먼저 노동자 쪽에서 보자. 노동 조건과 노동 시간에 따라 노동자의 삶(노동의 질)은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소비자’가 같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이들의 상호관계를 빼고는 돌봄 노동을 말할 수 없다.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 <시>에는 주인공(윤정희)이 생계를 위해 노인을 돌보는 일(돌봄 노동)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는 주인공이 노인을 목욕시켜 주는 장면에서 성희롱에 해당하는 사건을 배치해 놓았다. 현실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떠나 이 장면은 돌봄 노동이 처해 있는 조건과 노동자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소비하는 쪽에서 보자면 생산물(서비스)이 다른 공산품과는 다르다. 소비자마다 요구하는 것이 다를 뿐 아니라(비정형성), 대부분 그 자리에서 충족되어야 한다(즉시성). 그러다 보니, 규격과 표준을 만들기 어렵고 요구에 딱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불확실성). 어지간해서는 소비자가 만족하기 못하고 불만이 많은 이유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가혹할 만큼 서비스의 질에 민감하고 엄격하다. 돌봄 노동도 예외가 아니다. 수많은 관공서 민원 부서와 식당, 병원과 요양시설, 매표 창구와 가게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 보라. 신자유주의적 담론에 기초한 경쟁과 소비자 주의의 신화가 휴먼 서비스의 딜레마와 단단하게 결합해 있다.   

물론 서비스의 질은 중요하다. 마땅히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하고, 필요한 요구는 제대로 충족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돌봄 노동의 질이 낮다면 장기요양보험은 가치를 말하기 어렵다. 그 뿐 아니라 서비스를 받는 사람의 일상생활과 기능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러나 이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 역시 인간적인 노동 조건과 품위 있는 삶을 누려야 한다. 단지 좋은 서비스를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이들의 노동조건과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산출과 관계없이 이들 역시 노동과 삶의 기본 권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 일이다.  

지금까지 이 두 가지, 노동의 품위와 서비스의 질은 물과 기름처럼 나누어져 있었다. 소비자의 권리와 노동자의 인권은 - 불화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 별개였다. 그러나 이 둘을 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 서비스는 더욱 더 그렇다. 휴먼 서비스의 특징도 그렇지만, 생산과 소비에서 다른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분열이고 모순이다. 

노동과 서비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첫째 원리는 ‘관료 모형’이다. 생산과 산출의 조건과 질을 명령과 통제로 관리한다. 기준과 규칙을 정하고, 어기면 처벌하고 불이익을 주는 방법이라 생각하면 간단하다.  

이 방법이 통하려면 노동의 조건과 서비스의 질에 적당한 수준을 정하고 또 그 수준에 맞추어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 국가 사회주의를 떠올리지만, 여러 영역에서 지금도 많이 쓰이는 주류 모형이다.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양만큼, 그리고 미리 정해진 지침대로 따르는 것이다. 환자를 면담하는 시간을 5분 이상이라고 정해 놓았다면 그대로 하면 된다.   

노동 조건을 관리하기는 비교적 쉬운 반면, 서비스의 질을 따지는 소비자는 불만이 많다. 많은 국가가 관료 모형을 ‘개혁’하겠다고 한 이유다.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지금도 작동하고 있지만 동시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된다.    

둘째는 ‘시장 모형’. 여기서는 돌봄 노동이든 휴먼 서비스든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다. 자유로운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성과와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서비스의 질과 노동 조건을 가릴 것도 없다. 1980년대 이후 전세계를 장악한 이후 관료 모형의 가장 유력한 대안이 된지 오래다. 한국에서도 보건의료, 장기 요양, 그리고 돌봄 노동을 사회적으로 편성하는 핵심 원리로 굳어졌다.   

많은 사람의 비판대로 문제가 많다. 우선, 생산 측면에서 인간다운 노동 조건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서비스의 질도 약속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논의할 예정이다), 경쟁으로 질이 높아진다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또는 신앙)인 경우가 많다.    

셋째는 의료와 장기 요양과 같은 전문성이 강한 돌봄 노동에 주로 해당된다. ‘전문가 모형’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뼈대는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를 생각하면 쉽다. 환자를 어떻게 대하라고 시시콜콜 모두 정할 수 없다. 지침과 처벌(관료 모형), 지표를 정하고 경쟁시키는 것(시장 모형)으로는 노동조건을 정하는 것도 질을 보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의 역할이 중요하고 전문성이 높은 서비스는 어느 정도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스스로 정하고 규율하며 실천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노동이든 서비스든 이것을 빼고는 바람직한 방문간호 서비스를 성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전문가주의의 위험성이다. 전문가에 치우친 시각과 가치체계, 문화, 행동방식의 한계를 가볍게 볼 수 없다. 

이제, 앞의 세 가지 모형으로는 노동과 그 노동의 산출을 충분히 통합할 수 없다. 한 가지가 보태져야 한다. 이것을 잠정적으로 ‘시민 모형’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관료제, 시장, 전문가..... 여기에서는 그 누구도 아닌 시민이 노동과 산출의 조건과 과정을 민주적으로 통제한다.  

시민의 사회적 연대에 기초한 의사결정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단순히 어떤 조직이나 행사, 제도, 정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공공선(公共善)이라는 목표는 물론이고, 민주적 참여와 숙고(심의)라는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때로 제도나 정책이기도 하지만, 삶의 양식이라고 하는 편이 실제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다시 ‘민주적 공공성’이 답이다. 생산과 소비(이용) 사이에서 돌봄 노동의 딜레마를 풀 길은 이것 말고는 찾기 어렵다. 당장 시민들이 민주적 숙고를 시작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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