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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리풀 논평
 도서 소개
작성일 : 13-04-07 23:58
전쟁과 평화, 그리고 건강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411    

1995년 4월 미국의사협회의 공식 학술지에 이스라엘 의사 세 사람이 쓴 논문 한 편이 실렸다. 그런데, 이 논문은 전문 학술지에 발표된 것 치고는 전에 없이 큰 관심을 끌었다. 일간 신문인 뉴욕 타임스 신문이 자세하게 보도했고, 세계적으로도 큰 뉴스가 되었다.     

내용을 듣고 보면 막상 그렇게 충격적일까 싶다. 상식까지는 아니어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91년 걸프 전쟁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게 만든 것은 이라크가 쏜 스커드 미사일이 아니라 전쟁의 공포였다는 것이다.

1월 18일 이라크가 처음 공격을 했는데, 이날 이스라엘 전국의 사망률은 평소보다 58퍼센트 높았다. 공격을 받아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라크가 공격 목표로 삼았던 텔아비브와 하이파에서는 사망률이 80퍼센트나 더 높았다. 

미사일에 맞은 것도 아닌데 왜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연구자들은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나 공습 때 마스크 때문에 생긴 호흡장애가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스트레스와 관계가 많은 심장병으로 죽은 사람이 평소의 두 배나 되었고, 호흡기 질환의 사망률이 50퍼센트나 늘어났다.     
 
이제 이 논문을 먼 나라의 재미있는(?) 연구라고 이야기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반도에도 전쟁의 기운이 높아진 탓이다. 바이어와 관광객이 한국 방문을 취소했다는 소리가 여러 군데서 들린다. 학교와 연구소에 견학을 오겠다던 사람들도 일정을 미뤘고, 외국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도 꽤 많다. 

늘 비슷했으니 나라 안은 멀쩡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초등학교 학생들조차 걱정이 많다고 하고, 반은 농담이지만 사람들은 피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개성 공단이 막힌 일이 아니라도 경제도 벌써 나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현대사에서 한국만큼 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도 드물다. 이곳만큼 긴장이 오래 계속되는 곳 역시 많지 않다. 그런 만큼, 익숙해서 그렇지 전쟁은 여전히 현실이다. 물론 그 현실과 긴장은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무엇인들 그렇지 않을까만, 건강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전쟁은 재앙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전쟁만 보더라도 전쟁은 가장 중요한 사망원인이다. 한국전쟁의 ‘건강 효과’는 엄청나다는 말 정도로는 모자란다. 

<민족문화대백과>를 보면 한국전쟁 때 남북한을 합친 한국인의 인명 손상은 520만 명이 넘는다. 2010년의 총사망자수가 25만 명을 조금 넘으니, 한국전쟁은 20년을 모은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최근 전쟁도 마찬가지다. 2003년에서 2004년 사이 이라크 전쟁 때문에 2만 5천 명 이상의 어린이가 숨졌다. 유니세프는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세계적으로 2백만 명의 어린이가 전쟁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어떤 질병과 사고인들 짧은 기간 안에 이토록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까. 신종 전염병과 고혈압, 당뇨병, 암을 말하지만, 전쟁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예방접종과 최신의 치료, 최신 장비와 기적의 신약, 좋은 의사와 의료보험, 이 모든 건강의 수단은 전쟁 앞에서 무력하다. 

다시 말하지만, 전쟁은 가장 중요한 사망과 손상의 원인이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의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는 것에 책임이 있다. 1981년 세계보건기구가 주최한 세계보건총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모든 인류가 건강해 지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평화를 지키고 증진하는 의사와 보건 전문가의 역할이다.”

예방의학에서 쓰이는 개념을 활용하자. 병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병이 생기지 전에 막는 것이다. 흔히 ‘일차 예방’이라고 한다. 전쟁이 만드는 그 많은 사망과 손상, 장애는 전쟁 방지라는 일차 예방으로 막을 수 있다. 질병의 예방, 치료, 재활을 일로 삼고 있는 모든 사람은 전쟁 역시 예방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 평화를 지키고 전쟁을 막기 위해 개인 각 사람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다. 건강과 보건의료 영역 역시 마찬가지다. 일차 예방이라고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혀나 차고 있어야 한다.  

이런 무력감은 보건 영역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들 외교와 국방을 말하고 미국, 중국과의 관계를 따지느라 바쁘다. 당국과 전문가란 사람들이 마치 스포츠 경기 중계하듯 말하는 것이 전부다. 거기에 ‘나’는 없고, 시민은 소외되어 있다. 

그렇다고 지난 몇 년간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진 것을 단지 그들만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보수 정권이 남북 사이의 관계를 미숙하게 관리한 것은 분명하다. 손을 봐준다고 호기롭게 나서더니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다. 초보자도 의심하는 전략, 그리고 예상된 파탄이라니.  

그러나 이는 또한 ‘퍼주기’니 북한 인권이니 하는 여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떤 이는 부추겼고, 또 다른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반대했을 뿐이다. 그 결과가 오늘의 불안이고 혼란이다. 모두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이번 상황이 어떻게 끝나더라도 같이 평화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 레비와 사이델이 펴낸 <전쟁과 보건> (2008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이라는 책은 보건 전문가가 전쟁을 막기 위해 해야 할 일로 다음 네 가지를 말한다. 

첫째, 전쟁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것.
둘째, 전쟁의 영향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학생과 일반인에게 교육하는 일.
셋째, 전쟁을 방지하는 사업이나 정책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일.
넷째, 전쟁을 막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것. 

조금만 생각하면 이런 일은 보건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전문가만의 일도 아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어떤 분야든 개인과 작은 집단에게 주어진 공간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릇 전쟁을 막고 평화를 만드는 일이란 이런 것일 터. 

앞에서 말한 <전쟁과 보건>의 서문을 쓴 이는 미국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보건 전문가들의 투쟁 덕분에 천연두를 박멸할 수 있었다. (중략) 지금은 이들과 함께 우리 모두가 또한 전쟁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 이상 ‘그들’에게만 맡겨 둘 일이 아니다. 공동체의 생명과 안전, 건강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나서야 한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만드는 일은 또한 가장 중요한 예방과 보건(건강 지키기)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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