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인구 고령화 대응지수‘를 개발해서 발표했다(연합뉴스 바로가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고령화에 얼마나 잘 대응하는지 등수를 매겼다. 이번에도(!) 한국이 꼴찌다.
소득, 의료, 고용, 사회적 지원, 지속 가능성 등 다섯 개 분야 대부분이 최하위권인 가운데에 고용이 7위로 가장 나은 편이다. 중고령자들의 취업률이 높아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나이 들어서까지 비정규직이나마 일자리를 가져야 소득을 올릴 수 있으니, 높은 고용을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의료는 공공의료지출과 기대 수명을 지표로 삼았는데 전체 22개 나라 가운데에 18위 수준이다. 보고서를 보지 못해 장담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건강보험 덕분이 아닌가 싶다.
사실 비교 지표마다 일등 아니면 꼴찌니, 좋지 못한 등수가 놀랄 일은 아니다. 더구나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대응 태세가 잘 되어 있었다고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국제비교보다 국내의 변화 추이를 더 주목해야 한다. 언론보도를 보면, 고령화 대응 지수는 1990년 이후 20년 동안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2009년 성적은 1990년보다 오히려 더 낮다.
적어도 이 지표로만 보면 그동안 무엇 하나 제대로 ‘대응’한 것이 없다. 물론 지표가 얼마나 정확하게 현실을 반영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하지만 경험이나 인상으로도 지난 20년간 크게 달라졌다고 느껴지지 않으니 지표를 믿을 수밖에 없다.
새삼 고령화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동안의 대책이 크게 모자란다고 하기도 어렵다. 2003년 이미 대통령 소속 자문기구를 설치했고, 2005년 6월에는 ‘저출산ㆍ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했다. 지금도 대통령 소속의 위원회가 있고 보건복지부 내에 여러 관련 부서가 있다.
언론과 학계도 기회 있을 때마다 고령화와 그 대책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빼놓지 않는다. 그 어떤 주제보다 관심이 크고 제안도 많은 것이 고령화이고 노인 대책이다. 오히려 너무 잦아 습관이 된 것이 아닌가 걱정할 정도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법률과 정부 구조, 그리고 사회적 관심에 비하면 빈약하다. 앞서 말한 20년간 별 변화가 없다는 대응 지수가 더할 것도 없는 증거다. 형식과 말만 번듯할 뿐 구체적인 변화는 적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의료에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수도 없이 노인의료비 이야기를 해 왔지만, 구체적인 제안은 별로 새로운 것이 없고 그나마 실현된 것은 더 찾기 어렵다. 만성질환 대책이나 주치의 제도의 경과는 이미 모두가 아는 대로다.
이처럼 고령화 대책이 말뿐인 신세가 된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마도 ‘가치 할인’의 정치와 정책이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는 미래의 100원보다 지금의 90원을 더 높은 가치로 보는 것을 말한다. 비용과 고통도 마찬가지여서, 미래의 100만큼의 고통보다 현재 당면한 90만큼의 고통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법이다.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그 결과가 사회적으로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해도 여전히 미래의 일이다. 지금 벌어지는 빈곤과 실업, 질병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미래의 문제보다는 현재의 문제에 더 많은 노력과 자원이 투입되게 마련이다.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고령화를 경제적, 도구적 측면에서만 본다는 것이다. 의료만 보더라도 그렇다. 고령화 시대의 의료를 보는 눈은 대부분 사회적 ‘부담’이란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의료비 지출을 줄일까에 관심과 논의가 집중된다.
고령화를 경제 요소로 보는 것은 대부분 사람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주류 관점이다. 정책과 대책의 근거인 동시에 정책의 효과를 평가하는 핵심 잣대로 쓰인다. 고령화가 경제성장률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그 많은 논의와 통계가 모두 그런 시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시각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이 있으니, 뼈대가 되는 법인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의 조항이 그것이다. 이 법 제1조에는 법의 궁극적 목적을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규정해 놓았다.
제2조의 ‘이념’ 조항도 마찬가지다. 법의 기본이념은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인구 구성의 균형과 질적 향상을 실현하고, 국민이 건강하고 안정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령화는 ‘지속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속 가능성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한국이라는 국민국가가 계속해서 발전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야말로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
이미 ‘생태적 부채’ 상태에 있는 글로벌한 인구 상황은 뺀다고 치자(비르지니 레송의 <2033 미래 세계사>, 휴머니스트, 2013). 국내로 좁히더라도 이 패러다임으로는 고령화 대책을 작동시킬 수 없다. 경제와 성장, 경쟁력만 강조해서는 가치 할인과 ‘이해관계자 정치’를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본래 지속 가능성은 사회 연대와 공동체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지금의 접근으로는 개인의 이해관계와 동기가 더 중요해지는 역설을 피할 수 없다. 효과가 거의 없었던 저출산 대책이 이런 딜레마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래의 한국을 위해 더 많은 애를 낳으라는 그 지독한 도구적 시각이란.
이제 고령화 대책은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고령화를 사회 ‘문제’가 아닌 인권의 과제로 보는 것이다. 인권은 특별하게 노인이어서 갖는 권리가 아니다. 어린이, 장애인, 여성 등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갖는 보편적 권리를 말한다.
노인에게 적용되는 인권의 근거와 내용을 새로 개발하거나 논의할 필요는 없다. 보편적 인권의 내용은 국제협약(예를 들어 유엔 사회권 위원회의 일반논평 14, 바로가기)과 국내 법률, 그리고 많은 실천을 통해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권의 시각으로 문제를 보고 과제를 다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제와 지속 가능성의 관점에서 인권의 관점으로 이전시키면 고령화 대책은 근본부터 변화할 수밖에 없다. 대책은 (선의에 기초한) 혜택이나 자선이 아니며 민족국가 또는 사회의 지속이나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도 아니다(사실 ‘대책’이나 ‘대응’이란 말부터 바꾸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이가 평등하게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가 되고, 국가는 당연히 이를 충족시킬 책임을 진다.
의료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이제 노인과 고령화는 의료비 지출을 늘리고 건강보험 재정 위기를 심화시키는 ‘주범’이 아니다. 인권에 기초한 노인의료 정책은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어떻게 평등하게 보장할 것인가로 초점이 옮겨간다.
가용성, 접근성, 수용성, 질이라는 기준을 충족하는 서비스를 모든 노인이 차별 없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서비스를 보장할 책임은 국가에 있다. 이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그 다음 논의할 과제다.
비단 고령화 대책뿐 아니라, 많은 정책과 대책이 사람을 도구로 여긴다. 건강한 노인이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노인의 건강은 다른 무엇을 위해 보탬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삶의 가치이고 권리다.
이제 고령화 대책의 전반적인 틀을 인권에 기초한 접근(human-rights based approach)으로 바꾸어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고령화 대책이 사회적으로 지속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곧 다가올 초고령화 사회가 재앙이 아니라 또 다른 ‘진보’가 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