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국민으로, 때로는 시민으로 호명된다.
만일 일을 하고 있다면 직장인, 혹은 근로자, 아주 가끔은 노동자로 호명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정체성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이 두 가지를 철저하게 분리한다. 물건을 사고 친구들을 만나고 가족 나들이를 하는 ‘시민’과 일터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는 같은 사람들이지만 평행 우주처럼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보건복지부와 노동부는 한 사람의 몸을 시민의 부분과 노동자의 부분으로 세심하게 분리하고 그들 각자의 시간대와 구역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매년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 때문에 죽어가도 보건복지부에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자칫 한 마디라도 했다가 타부서에 대한 월권행위로 비칠까봐 우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시민’으로서 아픈 것인지, ‘노동자’로서 아픈 것인지 알아서 판단하고, 건강보험으로 해야 할지 산재보험으로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인위적 구분,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떼어내고 분리하는 접근은 일하는 사람의 건강문제를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무고한 시민’이 다치고 병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노동자’가 다치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 전체 인구의 절반이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일터에서 보낸다. 일터의 건강 문제, 일하는 사람의 건강문제를 고려하지 않고는 전체적인 건강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가 사실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문제는 보건학 내부에서조차 ‘주류’가 되어본 적이 없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이 그렇게나 떠받드는 소위 ‘글로벌 트렌드’에 배치된다. 2008년에 발표된 “세계보건기구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위원회” 최종 보고서 <한 세대 안에 건강불평등을 없애려면 (Closing the gap in a generation)>은 핵심적인 건강결정요인의 하나로 고용과 근로환경을 지적했다. 건강불평등 문제를 다룬 국제적인 학술논문과 국제/국가 전략보고서들 또한 고용, 근로환경 요인을 문제의 중심에 두는 것이 현재의 ‘글로벌 트렌드’이다.
문제를 우리 사회 전체,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니라 일부 한정된 집단의 것으로만 바라본다면 해결의 전망을 찾기 어렵다. 한국 사회, 한국의 보건학계는 일하는 사람의 건강문제를 ‘산업재해’라는 특별한 범주로 구분하고, 일부 불행한 혹은 불쌍한 근로자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터에서의 건강문제, 노동자의 건강문제는 일하는 사람 모두의 문제이며, 보건학 전체의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월급쟁이로 혹은 자영업자로, 일하며 살아가는 시민이 아니던가?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산재사망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누군가 죽어가며 생산한 타이어가 장착된 자동차를 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에밀레 종의 절절한 사연에 감동받은 이라도 청년의 뼈와 살이 녹아있는 철로 만든 바늘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하던 대학생을 질식사하게 했던 냉동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어컨 바람을 쐬며 쇼핑을 하고 싶은 이도 없을 것이다. 노동자의 원혼이 떠도는 지하철을 타고, 노동자의 피가 묻은 아파트에서 살고 싶은 이도 물론 없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 시민이고, 또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실험실 철망상자 안에서 제 동족의 살을 뜯는 실험쥐의 광란 이야기를 듣고 몸서리쳤던 이라면,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그와 얼마나 다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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