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노동의 조건, 삶의 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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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그렇다. 누가 노동부 장관이 되는지가 더 큰 관심인지도 모른다. 새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새로 누가 자리를 차지하는지 온 신경을 쓰는 사이, 또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하릴없이 목숨을 잃었다.
 
한 ‘사건’은 서울의 한 구청에서 일하던 청원경찰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 40대의 남자가 당직 근무 이후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겼지만 회복하지 못했다. 
 
그냥 평범한 개인사일 수 있었다. 문제는 구의회가 “근무와 관련한 부당한 지시, 명령 등”이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심상치 않은 속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 신문이 보도한 내용만 보면 일이 일어난 과정은 상식을 벗어난다. 구청장의 관용차 주차 안내가 늦었다고 구청 측이 난방기가 설치된 초소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징벌’을 했다는 것이다. 청원 경찰이 늦장을 부렸고 초소 안에 있다가 그랬다는 것이 이유다.  
 
구의회는 그 징벌이 이번 사망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조사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징벌이 있었다는 이 시기는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오르내렸다. 실제 이 때 장시간 근무를 했다면 사망까지 불러올 심각한 위험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구청이 초소 문을 잠근 것과 사망 사건의 연관성은 분명하지 않다. 구청 측도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고 있다. 앞으로도 인과관계를 밝히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부검이나 역학조사 같은 것으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다른 슬픈 사망 소식은 며칠 전 제주도의 감귤 가공공장에서 일어난 것이다. 감귤처리 탱크를 청소하던 용역직원 두 명이 가스에 질식해 숨졌다. 
 
산소탱크와 산소마스크 등 아무런 안전 장구를 착용하지 않고 탱크 속에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 언론이 전한 사건의 전말이다. 만성적 ‘안전 불감증’이 원인이라는 한탄조의 분석도 빠지지 않는다. 
 
서울과 제주에서, 노동자가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빼면 두 사건 사이에는 공통점이 별로 없는 듯 보인다. 정확한 것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언뜻 봐도 이유, 결과, 그 과정이 모두 다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보기에 따라서는 분명 그렇기도 하다.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분명 익숙함의 결과다. 그동안 흔하게 봐 왔던 것과 비슷한, 그저 그런 후진국형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의 죽음은 노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상식을 떠올려야 한다. 죽음이 사고 때문이라면 노동은 더 중심에 있다. 그렇다고 두 사건이 노동의 결과라는,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은 관심 밖이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든 그리고 그 경과가 무엇이든 그 바탕에는 노동의 문제가 있음을 말하려고 한다. 서울과 제주에서 죽은 이들은 한국 노동과 노동 건강의 맨 살을 유산으로 남긴 것이나 다름없다. 
  
우선, 한국의 노동은(건강과 함께)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 머문다. 구조적 산물이라는 인식은 점점 더 옅어지고 있다. 고용과 노동의 조건은 개인의 능력이고 선택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번 사건에도 노동의 ‘개인화’ 경향은 역력하다. 
 
이번 사건들의 원인을 개인으로 환원시키면 이렇게 된다. 이상한 구청장(또는 부하 공무원)이 몰상식한 지시를 한 결과 심근경색을 불러올 수도 있는 큰 위험에 노출되었다. 또, 제주의 사건은 안타깝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각자 안전수칙만 잘 지켰어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사고다.  
 
구청장과 노동자 – 책임의 주체는 다르지만 개인에게 문제를 돌리는 것은 같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은 도덕적 책임을 묻고 비난이 따른다. 이상한 구청장과 안전에 민감하지 않은 무책임한 노동자에서 더 나가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관계가 무엇인지 갑론을박을 벌이다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다.   
 
그러나 노동자의 사망은 예외적인 사람들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다. 안전과 생명은 뒷전인 ‘착취적’ 노동관계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악명 높은 산재 사망의 구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음으로, 두 가지 사망 사건 모두 극단적으로 치우친 노동의 권력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사망에 이르게 된 인과관계가 무엇이든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서울의 해당 구청은 정해진 절차도 없이 ‘징벌’을 가했고 청원경찰은 꼼짝 없이 그것을 견뎌야 했다. 언론이 전한 것으로는 사고가 난 이후에도 다른 청원경찰은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한다. 어느 누군들 이 형편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으랴.    
 
제주의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지역 언론이 보도한 것에 따르면 사망한 노동자들은 모두 일용직이었다고 한다. 시간이 곧 돈인 이들에게 안전 수칙을 다 지키는 것은 배부른 소리였을 것이다. 
 
11월에서 1월 사이에만 일이 있는 감귤 가공에 종사하는 일용직 노동자. 무엇을 선택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 ‘권력’이라는 것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었을까. 강압적으로 지시해야 권력이 아니다. 이들은 노동 시장에서 조그마한 권력도 가지지 못했다.     
 
이들을 보호하는 사회적 장치가 매우 허약하다는 것이 세 번째 공통점이다. 앞의 두 가지 공통점으로 볼 때 이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과다. 개인의 일이고 권력을 가지지 못했는데 사회적 장치가 주어질 리 만무하다.  
 
제주에서 사망한 노동자들은 산재를 비롯한 4대 보험에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소속된 회사 차원에서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리가 전부다. 
 
제도가 아니라 선의와 노력이 작동한다. 개인 차원에서는 미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다. 아마도, 책임은 없지만 ‘성의’ 차원에서 무슨 보상을 했다는 소리가 그 다음에 나올 것이다.  
 
서울의 청원경찰은 좀 나았을까. 신분의 안정성이나 급여는 나았을망정, 스스로를 보호하는 권리가 허술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이들은 노조 가입이나 집단행동을 할 수 없다. 
 
가장 기본적 권리(노동권)가 없는데 무슨 방법으로 안전과 건강을 보호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들 역시 강자의 선의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시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자의적이다. 그 어떤 것도, 언제라도, 후퇴할 수 있다. 
 
서울과 제주에서 일어난 사건은 특수한 것이 아니다. 곳곳에서 오늘도 일어나고 있고 내일 또한 그럴 것이다. 구조의 문제이고, 권력은 일방적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더 진행된다면 노동자의 건강은 더욱 피폐해 질 것이 틀림없다.         
 
많은 사람이 ‘너’ 또는 ‘그들’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 나쁜 징조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노동자의 건강과 죽음은 노동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부인할 길 없이 노동자다. 
 
우리의 건강은 어쩔 수 없이 노동의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스트레스가 건강을 해친다는 사람이 많지만, 그 근원의 태반은 직장이고 그곳에서의 노동이다. 노동의 유연성이나 생산성을 포함해서 갖가지 중립적인 말로 치장된 권력관계가 그곳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라. 직관적으로도 노동은 곧 건강과 불건강 모두의 중요한 원인이다.    
      
노동이 죽음을 부추기는 현실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기울대로 기운 노동의 권력관계를 조금이라도 바꾸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흔히 소박한 소망이란 이름으로 건강을 바라지만, 그 역시 여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갑자기 목숨을 잃은 분들의 명복을 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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