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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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를 감시하자

  10월 12일부터 31일까지 20일간은 국정감사 철이다. 2, 3일 지났을 뿐인데, 벌써 개회조차 못했느니 증인이 출석하지 않았느니 말이 많다. 남은 기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편 낯설고 한편 익숙한 풍경이다. 그 익숙함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매년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니 어지간히 눈에 익었다. 첫째, 국회의원이 관심을 두는 것은 언론에 한 줄이라도 나는 일이라 모두가 눈에 띄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음 선거에 당선되는 것이 지상 목표니 이해할 만하다.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텔레비전 화면에 나올 만한 이벤트. 과거에는 종이로 차트를 만드는 정도였으나, 요즘은 슬라이드나 동영상을 비추는 것도 평범하다. 물건을 꺼내 직접 보여주거나 작동하는 단계를 지나 실험까지 등장한다. 바야흐로 ‘공연형’ 국정감사가 유행이라 할 것이다. 둘째, 일방통행과 동문서답의 질문과 응답. 참석한 모든 국회의원이 정해진 시간 안에 말로 존재감을 과시하려면 답은 들을 겨를이 없다. 앞사람과 겹쳐도 상관없고 이미 답을 얻은 질문도 그대로 반복한다. 답하는 쪽도 거기에 맞추어 정확성이나 내실에는 별 관심이 없다. 셋째, ‘한탕주의’ 질문도 많다. 짧은 시간 안에 존재를 드러내고 언론에 한 줄이라도 보도되려면 눈에 확 띄어야 한다. 이상한 통계, 예외적 사례, 처음 드러나는 것 같은 비밀과 음모일수록 유리하면, 선정성을 피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는 여러 ‘조연’도 등장한다. 며칠 전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는 단지 에이즈 환자를 많이 봤다는 이유로 한 의사가 참고인으로 나왔다. 의사에 에이즈면 다들 관심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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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해독에서 문해력(리터러시)으로

  한글날이라고 해서 한글이 우수한 문자라느니 세종대왕이 어쨌느니 하는 ‘의례’를 차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런 종류는 텔레비전의 습관성 특집 프로그램으로 충분할 것이다.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인종, 말, 문자, 전통과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하면,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힌다고 믿지만, 막상 그 문자가 제 기능을 하는가도 썩 미덥지 못하다. 그 기능이란 개인적 또는 사회적 삶을 편리하게 하는 것으로, 문자를 읽고 쓰고 셈하는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문해(文解, literacy)’라고 하는데, 그 기능이 충분치 않은 상태를 ‘비문해’라고 부른다(과거에는 ‘문맹’이라 했다). 문해와 비문해라는 말이 영 어색하지만, 다들 그렇게 쓰니 따르자.   한글이 그렇게 쉽다면 한국 사회에서 비문해는 아무 문제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보통 교육이 확대되면서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비문해는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조사를 보면, 2014년 현재 성인 인구의 6.4%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고, 쓰고, 셈하기가 불가능’(수준 1)하다(보고서 바로가기).     이른바 ‘기능적 비문해’까지 치면 수가 엄청나다. 수준 1의 비문해에 ‘기본적인 읽고, 쓰고, 셈하기를 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 활용에 미흡’하거나(수준 2) ‘복잡한 일상생활 문제 해결을 하기는 어려운’ 수준(수준 3)까지 합하면 비문해율은 성인 인구의 28.6%에 이른다. 네 명에 한 명 꼴로 문자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기능적 비문해율(문맹률)은 외국과 비교해도 높은 편이다. 2000년대 초반 통계로는 세계 최하위권이다. 최근에는 비교할 통계가 없어 확언할 수 없지만,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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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로 지탱하는 사회

  긴 연휴를 앞두고 이런 기사를 읽는 기분이란…더구나 휴일 동안 아수라장이 된다는 응급실 이야기다.   “- 이번 연휴에도 집에 못 들어가나요? “이번 금요일부터 어마어마하게 환자들이 몰려들 거예요. 연휴가 제일 무서워요.” – 서른여섯 시간씩 밤새워서 근무를 하면 집엔 언제 가세요? “같이 일하는 OOO 선생은 1년에 네 번밖에 집에 못 간 적도 있어요.” – 이런 식으로 얼마나 버티시겠어요? 건강도 사생활도 희생해 가면서. “안 돼요. 안 된다니까. 그걸 알지만 가망이 없어요. 고쳐질 수도 없고 제가 고칠 수도 없어요.”(기사 바로가기)   한 해에(한 주가 아니고 한 달도 아니다!) 딱 네 번 집에 들어갔다는 응급실 의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삶의 질은 그만두고라도 응급실 의사 노릇은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공교롭게 같은 날 같은 신문에 실린 기사가 겹쳐 보인다. 사람과 문제, 그리고 영역과 차원이 모두 다르지만 뭔가 통하는 것이 있다. 보통 ‘부실하다’ ‘형식만 갖췄다’ ‘엉망이다’ 식으로 표현되는 것. 그리고 그 원인. “2015년 보건복지부가 정신요양원 59곳에 대해 정리한 ‘정신요양원 장기 입원자 현황’에 따르면 가족 등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이 6476명(59.1%), 시·군·구청장에 의한 입소가 3351명(30.5%)에 이르렀다. 타인에 의한 강제입소 비율이 90%나 되는 셈이다….전체 장애인요양시설 이용자의 77%가 발달장애인이고, 90%는 기초생활수급자…사회적 취약계층 중에서도 제일 약자이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장애인요양시설로 입소하고 있다.”(기사 바로가기)   정신요양원 장기 입원자가 어떤 삶을 사는지는 같은 기사에 잘 나와 있다. 이들에게 인권이니 정신건강이니 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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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만으론 보장할 수 없는 ‘생명권’

정치, 경제, 사회, 과학의 진보는 흔히 몸으로 나타난다. 몸에 새겨진다. 현생 인류가 나타난 이후 이 시대 사람은 지금 가장 잘 먹고 가장 건강하며 가장 오래 산다. ‘역사’로는 명백한 성취이자 진보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매일 현실을 사는 우리는 이런 진보를 실감할 수 있는가? 찰나의 시간을 쌓아 삶을 구성해야 하는 살아 있는 개인은 오히려 고통받고 좌절하는 때가 더 많다. 지구상 모든 사람이 먹고 남을 식량을 생산하면서도 10억 명 가까운 사람이 굶주리는 현실을 뭐라 설명할 것인가? 다름 아닌 몸이 드러내는 세계이자 역사, 인간 현실이다.   오늘 세계 곳곳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몸을 위협하는 지경은 진보는커녕 역사의 퇴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노력한 결과 이제 막 ‘시민권’을 가지게 된 ‘건강’이나 ‘건강권’조차 알량한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만3,092명으로 전년보다 421명(3.1%) 줄었다….그러나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압도적 1위다…입시 지옥과 사상 초유의 청년실업 등의 여파에 10대와 20대 자살률은 각각 16.5%, 0.1% 증가했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국경없는의사회(MSF)는 43만 명의 로힝야족 난민들로 북적이는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 난민촌에서 탈수증세로 생명을 다투는 환자가 급증했다면서 대규모 ‘보건 재앙’을 우려했다….“요즘은 매일 탈수증세로 생명을 다투는 성인 환자들이 생겨난다. 성인이 탈수증세를 일으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 이는 공중보건 비상사태가 임박했다는 신호”라며”(관련 기사 바로 가기) “유니세프 북한사무소에 따르면 2011년 기준 5세 미만 사망률은 1,000명 당 33명이며, 대부분 식수와 위생시설이 부족해 폐렴과 설사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산모사망률은 10만 명 당 81명으로 조사됐다. 특히 5세 미만 아동의 28%가 영양부족으로 발육부진을 겪고 있다. 2012년 7월 홍수로 식량사정이 더욱 불안한 상황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연인 간 폭력 사건으로 입건된 사람은 8천367명(449명 구속)으로 집계됐다. 2015년 7천692명보다 8.8%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연인을 살해하거나 미수에 그쳐 검거된 사람도 52명에 달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233명이 연인에 의해 숨졌다. 해마다 46명가량이 연인의 손에 고귀한 목숨을 잃는 셈이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언뜻 건강과 보건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 이상이다. 널리 퍼진 이들의 고통, 질병과 아픔, 죽음에 의사와 간호사, 병원, 약품과 의료 지원으로 대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스트레스 해소 기법으로 10대의 죽음을 막을 수 없으며, 몇 가지 약으로 로힝야의 설사병은 멈추지 않는다.   북한 어린이와 산모의 생사도 더는 의료나 보건 문제가 아니다. ‘구조적 폭력’에서 비롯된 최종 결과를 백신과 분유로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기껏해야 다들 미봉책에 지나지 않을 테니, 한 마디로 건강과 보건과 의료는 무력하다!   이들의 질병과 죽음은 전쟁, 억압과 구속, 인권 침해, 인위적 재난 등 폭력과 부(不)자유가 몸으로 드러난 결과다. 우리는 한국 청소년, 로힝야의 난민, 북한 어린이와 산모, 데이트 폭력 피해자가 겪는 죽음과 상처에서 그 관계의 증거를 발견한다.   그리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거창한 연구나 이론을 동원하지 않아도 생활의 상상력으로 충분하다. 물리적 폭력, 억압과 지배, 차별, 불평등이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에 침입하여 삶과 신체와 정신을 망가뜨리고 병들게 하며,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자살과 탈수증, 영양 결핍, 손상과 같은 구체적 건강과 생명 현상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로부터 폭력의 구조와 경로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폭력과 부자유, 특히 구조에서 비롯된 것은 흔히 몸을 통해 제 모습과 힘을 드러내고, 비로소 만지고 알 수 있으며 분노할 수 있는 ‘물질’로 바뀌어 다시 새로운 몸을 구성한다.   질병과 죽음이 진입 지점이긴 하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구조를 온전히 다 드러내지는 못한다. 몸이 말해야 하면 폭력과 부자유는 극단에 이른 것이기 쉽다. 로힝야의 예에서 보듯 성인이 탈수증에 걸릴 정도면, 교육과 주거, 이동, 정치적 자유 따위를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먹고 입고 자는 삶의 기초 조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계 곳곳에서 질병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폭력과 그 구조에 대해, 그로부터 위협받는 생명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생명권’의 절대성을 주장하려 한다. 왜 생명권이 보장되어야 하는가는 새삼 따지지 않는다. 다시 왜 생명권을 꺼내야 할 형편이 되었는지, 그 논의도 잠시 미룬다.   생명권의 절대성 또는 우선성이라는 자명한 원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모자랄까? 헌법에 생명권을 명시한 국가는 독일과 일본뿐이라고 하나, 어느 나라든 생명권이 가장 앞서는 권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이 생명권의 법률과 조항에 있는 것은 아니나, 현실에서 생명권을 주장하고 방어하는 것은 그 정도로 충분하리라 믿는다.   다만 한 가지, 새삼 생명권을 말하려니 그동안 우리가 주장했던 ‘건강권’에서 한 발 후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원이 다르고 특별한 맥락이 있다고는 하나(한국에서는 흔히 사형제도, 안락사, 낙태 등과 연관된다), 생명권이 죽고 사는 것과 관련된 것임은 틀림없다. “달성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건강”이 아니라, 죽지 않고 살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형편이라니.   굳이 비교하면 분명히 생명권이 건강권에 앞선다(생명권 주장이 ‘정치적으로 유리한’ 점이다). 건강권이 확장되면 생명권에 닿는다고 생각하지만, 생명권은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 모두에 관련되는 넓고도 절대적인 권리다. 또한, 국민국가만 권리 충족의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 또한 의무 주체에서 제외될 수 없다.   생명권은 여러 기본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전쟁과 폭력을 막는 것, 인종이나 종교, 성별, 경제 능력 등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것, 음식과 주거, 위생 등 삶의 기본 조건을 보장하는 것, 자기를 발전시키고 스스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 등이 모두 생명권과 무관하지 않다.   생명권을 지키고 보장하며 증진하는 인간 활동은 개방적이고도 실천적이다.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누가 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한 가지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선 생명권의 절대성과 우선성을 다시 확인하는 것부터.   다음으로 진보적인 생태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리처드 레빈스의 성찰에서 배우고자 한다. 다음 말에서 ‘건강’을 우리의 관심인 ‘생명’으로, 또는 그 무엇으로 바꾸어도 의미가 통한다(리처드 레빈스 지음, 신영전 외 옮김, <리처드 레빈스의 열한 번째 테제로 살아가기>, 한울 펴냄).   “건강은 한번 획득하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어떤 행복한 최종 상태가 아니다…. 건강한 유기체 또는 개체군이란, 새롭거나 반복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자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여력, 그 자원을 필요한 곳에 동원할 수 있는 융통성, 파괴적인 영향을 가능한 한 잘 예견하고 더 최악의 사건을 최소화하는 환경을 만들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며,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일은 사회와 개인의 영구적인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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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케어, 민(民)-의(醫)-정(政) 협의로 풀자

  새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을 발표한 지 한 달이 좀 더 지났다. 당시 우리는 방향에 동의하면서 몇 가지 당부를 보탰다(논평 바로가기). 그 사이 여러 당사자가 의견과 주장을 내놨고 정부 구상도 좀 더 진전된 모습을 드러냈다. ‘오리무중’을 벗어나는 느낌이다.   우리는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정책은 정책 결정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미칠 집단이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을 가다듬을수록 의견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자칫 이견 정도가 아니라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진료비는 얼마나 더 나갈 것이고 보험 재정이 얼마나 더 들지 따지면, 이견은 곧 자원 배분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으로 비화한다. 돈, 수입, 경제, 부담 무엇이라 부르든 경제적 가치를 나누는 문제는 이 정책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 정도면 어떻게 결론이 나는가 하는 것보다 평화롭고 원만한 과정과 진행, 그 운영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사실 ‘과정’과 ‘결과’를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어디에서 타협하고 무엇을 양보할지에 따라 정책 결과(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정이 곧 결과를 결정한다.   내용과 무관하게, 즉 어떤 비급여가 급여가 되든 말든, 시민 부담이 늘든 줄어들든, 오로지 과정이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시민의 요구를 더 잘 충족하기 위해서도 본래 취지와 가치, 목표를 훼손하지 않도록 정책을 만들고 결정해 나가는 과정을 잘 설계하고 운영해야 한다. 과정과 결과는 둘이 아니다.     비슷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니, 최근에도 사드 배치 과정과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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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에게 고통을 주는 길밖에 없나?

[서리풀논평] 북한 주민에게 고통을 주는 길밖에 없나?   “적어도 북에 대한 원유공급을 중단하는 것이 부득이한 만큼 러시아도 적극 협조해 달라”, “원유중단이 북한의 병원 등 민간에 대한 피해를 입힐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기사 바로가기). 잠시, 어느 것이 누구 말인가 혼란스럽다.   문재인 대통령이 원유공급 중단을 요청하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민간이 피해를 본다며 반대했다. 병원이 등장한 것이 정확하면서도 비현실적이다. 국제정치의 논리가 아니면 요구도 여기에 대한 반응도 설명하기 어렵다. 이제 ‘이중 사고’(조지 오웰, <1984년>)도 따로 훈련을 받아야 할 지경인가.   북핵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높아지면서 북한에 대한 압박과 제재 요구가 거세다. 국내, 국제 모두 북한을 고립시켜 무릎을 꿇리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미국이 앞장서 월요일(11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추진한다고 하니, 어느 쪽이든 곧 결정될 것이다. 미국이 준비한 결의안은 대북 석유 수출과 섬유 수입을 금지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 외통수가 될지는 더 두고 볼 일, 북한을 ‘봉쇄’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강하다. 안보리 결의만 하더라도,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거나 시큰둥하니 미국 뜻만 따를 수 없다. 말로는 더 강하게, 실제로는 과거와 비슷하게 결론이 날 공산도 있다.     오늘 우리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 방법으로 거론되는 초강력 제재, 특히 북한 봉쇄에 관심을 둔다. 많은 이들이 더 강력한 제재와 압박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몰고 올 효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부수적 피해’가 나타나는가?   경제 제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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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에 대한 태도, 그 끈질긴 성장주의

  문재인 정부의 인사가 계속 불안하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과학기술 분야 인사는 ‘참사’라고 부를 만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에 기업인을 임명하고 황우석 사태에 책임이 있는 인사를 과학기술혁신본부장에 임명해 사고를 낸 것이 얼마 전이다.   이번에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지명자가 창조과학이니 역사관이니 하면서 말썽이다. 인사청문회까지 갈 수 있을지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이번 인사는 이미 개인 차원을 떠났다.   인사권자가 과학기술, 과학기술 정책, 과학기술 정책의 정책결정과 책임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졌는지 민낯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두 번 그런 것이면 우연이나 실수라고 하지만, 계속해서 그것도 한 분야에서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면 뭔가 원인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과학기술 분야 인사에 ‘헛발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경향신문>이 상세하게 분석했다(기사 바로가기). 기자는 참여 정부 시절 과학기술 정책을 잘 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 과학기술을 국가발전과 경제성장의 도구로 보는 박정희 시대 과학기술관의 답습,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세 가지 이유로 꼽았다.       인사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분석에 대해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인사인들 우연이나 실수라고 주장할 만한 일이 왜 없겠는가? 누가 추천을 했다, 인사 검증에 어떤 부분이 빠졌다, 우리도 잘 몰랐다,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다,…잘못된 결정은 많은 우연, 오판, 실수가 겹쳐서 나타난다.   그렇다고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가령 우연이거나 개인의 실수라 하더라도 체계(시스템) 수준에서 그것은 ‘무작위’가 아니다. 어떤 경향성은 맥락과 구조가 영향을 미쳐서 나타나는, 원인이 있는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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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생리대, 다음은?

  그냥 우연인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책임자를 잘못 뽑았다고 한숨을 쉬는 사이에 문제가 또 터졌다. 이번에는 생리대.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몸에 직접 닿는 것이라 불안감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전처럼 무슨 사건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사고가 너무 잦다. 사람이 만든 환경이 사람을 공격하는 인공 또는 문명의 ‘역습’. 장담하건대, 이름도 처음 듣는 유해물질이 발견되었다고 뒤늦게 야단법석을 떨 일이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그때마다 행정 당국이 원망과 비난, 비판을 들을 것도 뻔하다.   주변에 있는 아무 생활용품을 들고 성분표시를 살펴보라. 따라 읽기도 어려운 처음 보는 화학명이 빼곡하다. 헥산디올, 카프릴릴글라이콜, 소듐벤조에이트…이 글을 쓰면서 우연히 옆에서 집어든 휴대용 물티슈에 표시된 성분 중 일부다. 게다가 ‘편백나무잎 추출물’이라는 ‘문학적’ 성분명이라니.   일부 성분만, 그나마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밝히지 않으니 효과든 위험이든 알 도리가 없다. 전문가라 해도 언제 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안심할 수 있을까? 크게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 살충제 달걀, 오염된 생리대는 단지 빙산의 일각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일이 생길 때마다 공포가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화학물질이 건강을 해칠 위험은 ‘과소평가’ 되어 있다. 예를 들어, 2016년 세계보건기구 총회가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명시한 화학물질의 건강피해는 보통의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크다(결의문 바로가기).   “2012년 기준으로 몇 가지 화학물질 때문에 사망하는 사망자 수가 130만 명에 이르고,…독성물질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이 193,000명으로 추정된다….중독 위험은 여성과 어린이 등 일부 집단에 더

서리풀 논평

식품 안전성 위기, 보건당국은 왜 안 보이나

  이번에는 달걀 차례인가? 이른바 ‘살충제 달걀’ 때문에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비자는 안심하고 먹을 것이 없다고 불만이 가득하고, 생산자는 경제적 타격이 크다고 아우성이다.   먼저 안전성에 대해. 우리는 2017년 8월 18일 대한의사협회가 발표한 내용, 즉 최근까지 나온 과학적, 의학적, 보건학적 증거를 종합한 판단을 믿고 싶다(☞관련 기사 : 의사협회 “살충제 계란 먹어도 독성 한달이면 빠져나가”). 이에 따르면 지나치게 걱정하고 동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적어도 ‘급성’ 독성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피프로닐과 비펜트린에 가장 민감한 영유아가 하루에 달걀 2개를 섭취한다고 했을 때도 급성독성은 우려할 수준이 아니다.” 장기간 섭취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이 조금 걸린다. 연구와 조사가 더 많이 축적되어야 안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니, 모든 걱정을 내려놓기는 이르다.   개인과 가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또한 의사협회의 권고가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문제없다고 검증한 것은 먹어도 된다. (…) 다만 정부에서 살충제가 검출됐다고 발표된 계란은 가정에서 폐기하는 것이 좋겠다.” 어느 정도까지는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아직 정부의 검증과 보증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살충제 성분을 모두 검사하지 않은 지자체가 수두룩하고 전수 조사를 하지 않은 데도 많다는 것. 달걀을 살 때 생산 농장을 구분할 수 있는 ‘난각코드’도 오류와 수정을 되풀이해 혼란을 보탰다. 의사협회가 권하는 대로 정부가 보증하는 달걀은 먹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하나 판단하려면 며칠 더 기다려야 할

서리풀 논평

‘문케어’는 시작일 뿐, 더 큰 것이 남았다

  지난주 정부가 발표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이 획기적인 것은 맞다(프레시안 관련 기사 바로 가기, 라포르시안 관련 기사 바로 가기). 특히 국민건강보험에 포함되지 않았던 비급여를 대책에 포함했다는 점이 그렇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언론 보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국민건강보험만 놓고 보면 이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공보험(자발적으로 가입하는 민간보험 또는 사보험과 달리, 국민건강보험은 흔히 ‘사회보험’이나 ‘공보험’으로 부른다)만으로 의료 이용과 비용 부담을 해결하자는 기본 방향에 찬성한다(다만, ‘현재로서는’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방향에 찬성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시민 누구나 경제적 부담 능력에 무관하게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60% 초반(정부는 2015년 기준으로 63.4%라고 명시했다)에 머물러 있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으로는 빈곤층을 말할 것도 없고 중산층도 의료비의 두려움과 걱정을 떨칠 수 없다. 정부가 집권 기간 안에 달성할 목표를 내놓은 마당에 보장성 강화를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충분한 사회적 동의가 있다고 믿는다. 이 <논평>은 아쉬운 점을 짚고 의견을 달리하거나 찬성하기 어려운 점을 말하는 것을 역할로 삼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 건강보험의 ‘정치경제’를 배제하거나 ‘탈정치화’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가장 걱정스럽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정치와 경제가 아니면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지만, 그것 없이 가능하지 않은 일을 정책, 기술, 행정관리, 실무로만 접근하면 반드시 어려워진다. 첫째, 건강보험의 보장성 목표를 70%로 삼은 것에 대해 아쉽고 미흡하다는 반응이 많다. 대통령은 5년간 30조 6천억 원을 투입해 보장성 수준을 2022년까지 70%대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지만, 이것이 영 부족하다는 것이다. 목표가 좀 더 적극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도 불만스럽다(‘실무적’, ‘정책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한다). 적극성이나 불만, 선언이나 목표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 고민이다. 70%가 아닌 80%가 되려면 그만큼 재정이 더 필요하고 세금이나 건강보험료를 올려야 한다. 정부가 이런 정치적 부담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증세는 넓은 의미의 정치일 뿐 아니라 지금 이 시기 여야가 다투는 경쟁과 싸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정치적 지지와 세력의 문제에서 무관하지 않으니, 건강보험료 인상은 그 어떤 과학과 논리를 동원해도 정치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정부가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도 건강보험료 인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행정부는 관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겠지만, 한국의 의료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시장’이다. 제도가 확대 지향이면 의료이용과 비용은 반드시 늘어난다. 행정관리만으로 3천 개가 넘는 병원, 60만 개에 가까운 병상, 3만 개에 이르는 의원의 ‘행동’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연간 1천 5백만 건이 넘는 입원, 14억 건에 가까운 외래 이용 하나하나를 무슨 수로 들여다보고 관리한단 말인가.   둘째, 병원이나 의사 등이 주도권을 가진 ‘의료공급의 정치경제’를 소홀하게 다루지 않아야 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비급여 대책. 정부는 환자들의 부담이 늘어나는 핵심 원인 중 한 가지로 비급여를 꼽고, 꼭 건강보험에 넣지 않아도 될(비용이나 효과성 측면에서) 비급여까지 ‘예비 급여’ 제도 등을 통해 건강보험에 편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에 대해 의사와 병원이 반발하는 것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건강보험 급여에 대한 진료비(수가)가 낮아 비급여로 수입을 보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비급여가 급여로 바뀌면 가격과 서비스가 모두 규제를 받고, 본인부담이 몇 퍼센트든 상관없이 수입이 줄어든다. 환자에게는 비급여가 의료 서비스고 비용이지만 의사와 병원에게는 곧 수입이다. 한국 상황에서는 특별한 경제이자 생활의 이해관계가 된 지 오래, 의료공급의 경제를 건드리면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다른 대안 없이 수입의 원천을 막으면 ‘풍선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지금까지 건강보험의 경험이 아닌가? 정부는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겠지만 장담할 수 없다. 모든 비급여를 급여로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완전히 미용만을 목적으로 하는 수술이나 근거도 의심스러운 백옥주사, 마늘주사를 급여로 하는 것은 공보험인 건강보험의 원리에도 어긋난다. 문제는 급여와 비급여를 칼로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다는 것. 명백하게 의학적 필요가 없는 비급여, 지금보다 이상하고 극단적인 비급여가 개발, 도입, 유행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어디 비급여뿐이랴. 의원이나 병원 수입에 도움이 된다면, 급여 안에서도 왜곡이 더 심해질 수 있다. 수익이 문제라면 풍선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지점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불법을 왜 막지 못하냐고? 의료는 워낙 회색 지대가 넓어, 법과 규정으로는 옳고 그름의 경계를 정하기 어렵다. 윤리를 따져도 마찬가지다. 2주에 한 번 하던 검사가 열흘이나 1주일에 한 번 하는 것으로 늘리는 것을 무슨 근거로 기준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을까. 자기공명영상(MRI)을 언제 얼마나 자주 찍어야 하는지를 행정 지침으로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옳은 의료와 그렇지 않은 의료 사이에는 넓은 틈이 존재하고 그 경계는 놀랄 만큼 희미하다. 결과적으로, 관료적 통제도 (서비스나 가격에 대한) 시장 경쟁도 수익을 찾아 움직이는 시장 참여자의 행동을 막기 어렵다. 비급여를 관리한다고 하지만, 의료 비용을 모두 감독,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담한다. 으레 나타날 의료인이나 병원의 수익 추구를 비난하는 ‘윤리화’ 전략도 정치경제의 측면에서는 말이 안 된다.   셋째, 건강보험의 의료 이용과 공급, 이에 따른 재정은 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의 한 요소다.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이용과 공급, 재정을 관리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필요하지 않은 데도 대학병원과 ‘빅5’ 병원을 찾아가는 것을 그대로 두고 과잉 진료와 과잉 이용, 재정 팽창을 관리하기는 어렵다. 일차의료, 동네 병원의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큰 병원 이용을 억제한들, 적자를 보지 않겠다고 목을 매는 병원들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막무가내로 ‘죽음’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 비급여와 과잉 진료는 저절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방향에는 동의해도 감시와 처벌로 비급여와 과잉 진료를 통제하기는 어렵다. 비급여와 과잉 진료에 대한 동기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대학병원이 아니라 동네 의원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인과 병원을 옥죄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문케어’가 내포한 세 가지 한계를 말했지만, 누군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변화를 제안하고 주도하는 정부의 고민이 가장 클 것으로 이해한다. 정부가 스스로 내놓은 제안의 한계와 그 성격을 왜 모를까. 의도적으로 ‘정책화’(정치화와 대비되는 말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해하는 것은 여기까지, 판단은 이제부터 갈린다. 정책으로 접근한 것을 이해하지만, 정치화를 하지 않고는 내놓은 목표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겉으로 목표를 달성해도, 온갖 부작용과 왜곡을 동반하는 그야말로 서류로만 존재하는 성과로 끝날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한다. 건강보험만으로 보면 우리는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 모든 것,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기대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얽혀 있는데 한 가지도 만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충분한 수준에 도달하는 데에, 시민이 동의하는 가운데 건강보험료를 ‘적정화’하는 데에, 비급여를 급여로 바꾸는 데에, 왜곡된 의료와 시장 참여자가 새로운 체계에 연착륙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너무 조급하면 그르친다. 기초 체력이 허약한데 무리하면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지사. 우리는 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숫자로 보이는) 가시적 성과를 내기보다는 진정한 ‘개혁’의 주춧돌을 놓는 것이라 본다. 근본 구조를 바꾸는 것은 바라지 못한다. 앞서 말한 한계가 곧 보장성 강화를 가로막는 조건들이니, 그것을 치우는 것이 핵심이다. 건강보험료를 비롯한 건강보험 재정, 급여와 비급여 정리, 일차의료를 포함한 의료전달체계, 민간의료기관의 구조와 역할을 논의해야 새로운 체계로 가는 징검다리가 놓인다. 성과와 과실은 다음 정부가 가져가면 또 어떤가, 역사가 기초 작업의 가치를 평가하고 기록할 것이다. 정부가 내놓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다시 건강보험의 정치가 필요하다. 많은 당사자가 알게 된 것은 다행이고 기회다. 이제부터 더 많은 시민이 이해하고 대안을 거론하는 데에 이르러, 그 개혁의 동력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병원과 의료인 등 의료공급자 또한 이해하고 바꾸어 새로운 체제에 적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 정치, 경제, 문화를 포함하여 이해당사자 대부분이 받아들일 만한 구조적 환경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건강보험 개혁이 성공하려면 평범한 시민과 의료공급자가 우군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저항보다는 개혁의 동력이 충분히 더 커야 전진하고 성취할 수 있다. 정책, 관료체계, 행정을 넘어선, 건강보험의 (재)정치화가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