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서리풀 논평

<건강 격차>의 저자가 한국에 오는 이유

  11월 20일 마멋(Michael Marmot)이 한국에 온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이 분야 전문가나 겨우 이름을 알까, 연예인처럼 유명하지는 않다. 그래도 무려(!) 기사 작위까지 받아 경(卿, Sir)이니, 아주 무명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책 저자로 더 유명할지 모른다. 최근 번역된 책이 <건강 격차>이고(책 소개 바로가기), 10년도 더 전에 <사회적 지위가 건강과 수명을 결정한다>가 출판된 적이 있다(책 소개 바로가기).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건강과 보건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건강 불평등 전문가다.   그냥 연구만 하는 사람이면 이 분야에서 기사 작위를 받지는 못했을 터, 영국과 유럽, 세계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하다. 정치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정부, 학계, 언론, 국제기구가 이 사람의 말에 늘 귀를 기울인다. 물론 역할을 하는 분야는 건강 격차와 불평등이다.   영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계기는 2008년까지 세계보건기구(WHO)의 ‘건강 불평등 위원회’(정확한 이름은 다르지만, 이렇게 부르는 것이 편할 듯하다) 위원장 일을 한 것이다. 그 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는 각 나라에 건강 불평등의 상황을 알리고 행동을 촉구한 것으로 유명하다(보고서 바로가기). 곧 ‘고전’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니, 사정이 되면 전체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유감스럽게도 번역본은 없다).   2010년에는 잉글랜드 보건부가 의뢰한 건강 불평등 정책 평가를 주관하고 ‘공정한 사회, 건강한 삶’이라는 보고서도 펴냈다(보고서 바로가기). 2013년 영국의 도시 코번트리(Coventry)가 ‘마멋 시(市)’가 되기로 선언한 것은 그와 그가 하는 일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 아닌가 싶다(기사 바로가기). 이 시는

서리풀 논평

병원에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폭력’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최근 불거진 성심병원 사례다(기사 바로가기).   소속 간호사들은 짧은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선정성을 강조한 춤을 춘다. 이들은 이 같은 의상과 안무, 심지어는 표정까지 윗선으로부터 사실상 ‘강요’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재단 소속 한 병원의 중견급 간호사 A 씨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규간호사들이 장기자랑의 주된 동원 대상”이라며 “이들은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간호부 관리자급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유혹적인 표정과 제스처가 되는 지’ 등을 얘기 듣는다”고 설명했다.   전통적인 것, 병원에서 빈발하는 전공의와 하급자 폭력도 잊을 만하면 다시 터진다(기사 바로가기).   A교수의 전공의 폭행은 무차별적이고 상습적으로 이뤄졌다. 상습적으로 머리를 때려 고막이 파열됐고, 수술기구를 이용해 구타하기도 했다. 정강이를 20차례 폭행하거나, 회식 후 길거리 구타,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는 일 등이 수차례 반복적으로 이뤄졌다.   노골적인 신체 폭력은 폭로라도 할 수 있지만, 교묘한 폭력과 은폐는 관행, 개인 특성, 일탈, 일시적 감정, 내부 문제 등을 이유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부터 어렵다(기사 바로가기).   대한전공의협의회는 23일 성명을 통해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일부 교수진의 상습적인 폭언, 폭력 및 성희롱으로 인해 전공의 2명이 동반 사직했으며, 남은 전공의들은 여전히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명백히 부적절하고 비윤리적인 교수들의 태도 및 열악한 수련 환경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며, 피해자들에게 더 이상의 가해를 중단하기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군데도 아니니, 병원에 폭력이

서리풀 논평

심평원의 진료정보 장사, ‘사고’가 아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민간 보험사에 진료정보를 팔았다고 뭇매를 맞았다(기사 바로가기1, 바로가기2). “’표본 데이터셋’을 1건당 30만 원의 수수료를 받고 총 52건(누적 6천420만 명분) 제공”했다는 것이 핵심. “’학술연구용 이외의 정책, 영리 목적으로 사용 불가하다’는 서약서를 받았지만, 민간보험사가 ‘당사 위험률 개발’과 같은 영리 목적으로 자료를 활용하겠다고 신청해도” 자료를 주었다는 것이다. 학술연구용 자료만 줄 수 있다는 규정을 위반한 사고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2016년 8월부터는 “정책, 영리 목적으로 사용이 불가하다“는 이용서약서 조항을 삭제했다니, 규정 위반이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그러기로 했던 모양이다. 이 한 가지 일을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심평원이 민간보험사에 건강정보 빅데이터를 팔아넘겨 보험사 이윤창출의 조력자 역할을 하고, 국민의 건강정보 보호에 대한 책임을 방기”했다는 시민단체의 비판이 옳다.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그리고 이 일이 전부인가 하는 점이다. 원인이 구조적이면, 비슷한 일은 이번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고 심평원만 이런 것도 아닐 터. 결론부터 말하면, 심평원이 혼자서 뜬금없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배후는 심평원의 감독기관인 보건복지부를 훌쩍 넘는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운동 등을 통해 가입자의 건강 상태가 좋아진 만큼 보험료 할인 등의 혜택을 주는 건강 증진 보험상품 설계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보험사는 가입자가 건강관리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주기적으로 측정하고 이를 검증해 정해진 기준을 충족하면 보험사는 약속한 혜택을 줄 수 있다….가입자가 실제 이런 노력을 했는지,

서리풀 논평

길을 잃은 문재인 정부의 ‘공공보건의료’

  문재인 정부가 건강과 보건 분야에서 무엇을 할지, 대체적인 구상이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문재인 케어’로 표현되는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그리고 ‘치매 국가책임제’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게 끝이라고 하면 청와대와 보건복지부는 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이것 말고도 계획이 많고, 아직 준비 중인 것도 여러 가지라고. 시시콜콜한 ‘작은’ 정책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허술한 정부라도 대통령 공약만 신경 쓰는 데는 없다. 그 많은 공무원이 그냥 놀고 있을 리 만무하니, 뭔가 열심히(!) 하고 있을 터.   그래도 진짜 중요한 것은 골격, 국정 원리가 아닌가? 아무리 많은 정책을 늘어놓아도 백년대계가 없으면 새로운 정권이라 말하는 의미가 없다. 정치는 현재와 일상을 관리할 뿐 아니라 미래를 꿈꾸고 개척한다.   적폐와 새로움을 말하는 문재인 정부의 건강정책, 보건과 의료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 확실하지 않으니 걱정스럽다. 이미 내놓은 브랜드인 ‘문재인 케어’와 ‘치매 국가책임제’는 비용 부담을 줄이자는 것 빼고는 말하는 바가 많지 않다.     다른 것을 그대로 두고 보건의료의 ‘경제’를 바꾸자는 셈이어서 더 걱정이다. 있던 문제가 풀리기는커녕 더 복잡해져 고질병이 될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일차의료나 지역 보건을 강화하지 않고 건강보험 급여만 늘리면, 환자는 대학병원으로 더 몰리고 동네 병원의 의료는 더 왜곡될 것이다.   그 중에도 오랜 숙원, ‘공공보건의료’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묵묵부답인 것이 가장 큰 불만이다. 다시 말하지만, 무슨 실무나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은데도

서리풀 논평

다른 ‘공론화위원회’도 가능한가? 필요한가?

    지난 20일,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이하 ‘위원회’)가 권고 결정을 내놨다. 결과는 모두 아는 그대로다(기사 바로가기l). 건설 재개 쪽을 선택한 비율이 59.5%로, 건설 중단을 택한 40.5%보다 19% 포인트 더 높았다.   ‘탈원전 정책’은 지지하는 의견이 훨씬 더 많았다. 원자력 발전을 축소하자는 쪽이 53.2%, 유지하는 쪽이 35.5%, 확대하자는 쪽이 9.7%로 나타나, 축소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애초에 정부가 정했던 정책 방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다.   일반적인 평가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긍정하는 쪽인 것 같다. 과정을 주관한 위원회부터 ‘놀람과 감동’이라고 표현했고, 나아가 ‘집단지성’의 힘이라 자평했다. 청와대도 ‘값진 과정’이고 ‘또 하나의 민주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스스로 만족하는 것 아닌가 싶다.   발전소 건설과 탈원전 정책이 어떻게 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관심을 받게 된 ‘공론조사’ 방식에 주목한다. 이번 공론화 과정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새로운 방식을 실험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실무적으로는,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비슷한 방식을 활용하자는 주장이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당장 정부부터 이 방식을 확대할 분위기다. 대통령이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데에 관심이 큰 데다((기사 바로가기), 민감한 결정을 해야 할 정부로서는 정치적 부담을 덜 수 있는 방식이다. 결과론이지만, 이번 공론조사의 결정도 정부로서는 손해 본 것이 전혀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동안 중요한 사안인데 사회적 논의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시민, 소비자운동도 공론화에 관심이 크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민간의료보험과 국민건강보험의 역할을 논의하기 위해 공론화위원회와

서리풀 논평

국정감사를 감시하자

  10월 12일부터 31일까지 20일간은 국정감사 철이다. 2, 3일 지났을 뿐인데, 벌써 개회조차 못했느니 증인이 출석하지 않았느니 말이 많다. 남은 기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편 낯설고 한편 익숙한 풍경이다. 그 익숙함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매년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니 어지간히 눈에 익었다. 첫째, 국회의원이 관심을 두는 것은 언론에 한 줄이라도 나는 일이라 모두가 눈에 띄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음 선거에 당선되는 것이 지상 목표니 이해할 만하다.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텔레비전 화면에 나올 만한 이벤트. 과거에는 종이로 차트를 만드는 정도였으나, 요즘은 슬라이드나 동영상을 비추는 것도 평범하다. 물건을 꺼내 직접 보여주거나 작동하는 단계를 지나 실험까지 등장한다. 바야흐로 ‘공연형’ 국정감사가 유행이라 할 것이다. 둘째, 일방통행과 동문서답의 질문과 응답. 참석한 모든 국회의원이 정해진 시간 안에 말로 존재감을 과시하려면 답은 들을 겨를이 없다. 앞사람과 겹쳐도 상관없고 이미 답을 얻은 질문도 그대로 반복한다. 답하는 쪽도 거기에 맞추어 정확성이나 내실에는 별 관심이 없다. 셋째, ‘한탕주의’ 질문도 많다. 짧은 시간 안에 존재를 드러내고 언론에 한 줄이라도 보도되려면 눈에 확 띄어야 한다. 이상한 통계, 예외적 사례, 처음 드러나는 것 같은 비밀과 음모일수록 유리하면, 선정성을 피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는 여러 ‘조연’도 등장한다. 며칠 전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는 단지 에이즈 환자를 많이 봤다는 이유로 한 의사가 참고인으로 나왔다. 의사에 에이즈면 다들 관심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서리풀 논평

문자 해독에서 문해력(리터러시)으로

  한글날이라고 해서 한글이 우수한 문자라느니 세종대왕이 어쨌느니 하는 ‘의례’를 차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런 종류는 텔레비전의 습관성 특집 프로그램으로 충분할 것이다.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인종, 말, 문자, 전통과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하면,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힌다고 믿지만, 막상 그 문자가 제 기능을 하는가도 썩 미덥지 못하다. 그 기능이란 개인적 또는 사회적 삶을 편리하게 하는 것으로, 문자를 읽고 쓰고 셈하는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문해(文解, literacy)’라고 하는데, 그 기능이 충분치 않은 상태를 ‘비문해’라고 부른다(과거에는 ‘문맹’이라 했다). 문해와 비문해라는 말이 영 어색하지만, 다들 그렇게 쓰니 따르자.   한글이 그렇게 쉽다면 한국 사회에서 비문해는 아무 문제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보통 교육이 확대되면서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비문해는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조사를 보면, 2014년 현재 성인 인구의 6.4%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고, 쓰고, 셈하기가 불가능’(수준 1)하다(보고서 바로가기).     이른바 ‘기능적 비문해’까지 치면 수가 엄청나다. 수준 1의 비문해에 ‘기본적인 읽고, 쓰고, 셈하기를 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 활용에 미흡’하거나(수준 2) ‘복잡한 일상생활 문제 해결을 하기는 어려운’ 수준(수준 3)까지 합하면 비문해율은 성인 인구의 28.6%에 이른다. 네 명에 한 명 꼴로 문자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기능적 비문해율(문맹률)은 외국과 비교해도 높은 편이다. 2000년대 초반 통계로는 세계 최하위권이다. 최근에는 비교할 통계가 없어 확언할 수 없지만,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할

서리풀 논평

‘착취’로 지탱하는 사회

  긴 연휴를 앞두고 이런 기사를 읽는 기분이란…더구나 휴일 동안 아수라장이 된다는 응급실 이야기다.   “- 이번 연휴에도 집에 못 들어가나요? “이번 금요일부터 어마어마하게 환자들이 몰려들 거예요. 연휴가 제일 무서워요.” – 서른여섯 시간씩 밤새워서 근무를 하면 집엔 언제 가세요? “같이 일하는 OOO 선생은 1년에 네 번밖에 집에 못 간 적도 있어요.” – 이런 식으로 얼마나 버티시겠어요? 건강도 사생활도 희생해 가면서. “안 돼요. 안 된다니까. 그걸 알지만 가망이 없어요. 고쳐질 수도 없고 제가 고칠 수도 없어요.”(기사 바로가기)   한 해에(한 주가 아니고 한 달도 아니다!) 딱 네 번 집에 들어갔다는 응급실 의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삶의 질은 그만두고라도 응급실 의사 노릇은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공교롭게 같은 날 같은 신문에 실린 기사가 겹쳐 보인다. 사람과 문제, 그리고 영역과 차원이 모두 다르지만 뭔가 통하는 것이 있다. 보통 ‘부실하다’ ‘형식만 갖췄다’ ‘엉망이다’ 식으로 표현되는 것. 그리고 그 원인. “2015년 보건복지부가 정신요양원 59곳에 대해 정리한 ‘정신요양원 장기 입원자 현황’에 따르면 가족 등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이 6476명(59.1%), 시·군·구청장에 의한 입소가 3351명(30.5%)에 이르렀다. 타인에 의한 강제입소 비율이 90%나 되는 셈이다….전체 장애인요양시설 이용자의 77%가 발달장애인이고, 90%는 기초생활수급자…사회적 취약계층 중에서도 제일 약자이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장애인요양시설로 입소하고 있다.”(기사 바로가기)   정신요양원 장기 입원자가 어떤 삶을 사는지는 같은 기사에 잘 나와 있다. 이들에게 인권이니 정신건강이니 하는 것은

서리풀 논평

보건의료만으론 보장할 수 없는 ‘생명권’

정치, 경제, 사회, 과학의 진보는 흔히 몸으로 나타난다. 몸에 새겨진다. 현생 인류가 나타난 이후 이 시대 사람은 지금 가장 잘 먹고 가장 건강하며 가장 오래 산다. ‘역사’로는 명백한 성취이자 진보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매일 현실을 사는 우리는 이런 진보를 실감할 수 있는가? 찰나의 시간을 쌓아 삶을 구성해야 하는 살아 있는 개인은 오히려 고통받고 좌절하는 때가 더 많다. 지구상 모든 사람이 먹고 남을 식량을 생산하면서도 10억 명 가까운 사람이 굶주리는 현실을 뭐라 설명할 것인가? 다름 아닌 몸이 드러내는 세계이자 역사, 인간 현실이다.   오늘 세계 곳곳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몸을 위협하는 지경은 진보는커녕 역사의 퇴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노력한 결과 이제 막 ‘시민권’을 가지게 된 ‘건강’이나 ‘건강권’조차 알량한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만3,092명으로 전년보다 421명(3.1%) 줄었다….그러나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압도적 1위다…입시 지옥과 사상 초유의 청년실업 등의 여파에 10대와 20대 자살률은 각각 16.5%, 0.1% 증가했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국경없는의사회(MSF)는 43만 명의 로힝야족 난민들로 북적이는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 난민촌에서 탈수증세로 생명을 다투는 환자가 급증했다면서 대규모 ‘보건 재앙’을 우려했다….“요즘은 매일 탈수증세로 생명을 다투는 성인 환자들이 생겨난다. 성인이 탈수증세를 일으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 이는 공중보건 비상사태가 임박했다는 신호”라며”(관련 기사 바로 가기) “유니세프 북한사무소에 따르면 2011년 기준 5세 미만 사망률은 1,000명 당 33명이며, 대부분 식수와 위생시설이 부족해 폐렴과 설사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산모사망률은 10만 명 당 81명으로 조사됐다. 특히 5세 미만 아동의 28%가 영양부족으로 발육부진을 겪고 있다. 2012년 7월 홍수로 식량사정이 더욱 불안한 상황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연인 간 폭력 사건으로 입건된 사람은 8천367명(449명 구속)으로 집계됐다. 2015년 7천692명보다 8.8%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연인을 살해하거나 미수에 그쳐 검거된 사람도 52명에 달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233명이 연인에 의해 숨졌다. 해마다 46명가량이 연인의 손에 고귀한 목숨을 잃는 셈이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언뜻 건강과 보건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 이상이다. 널리 퍼진 이들의 고통, 질병과 아픔, 죽음에 의사와 간호사, 병원, 약품과 의료 지원으로 대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스트레스 해소 기법으로 10대의 죽음을 막을 수 없으며, 몇 가지 약으로 로힝야의 설사병은 멈추지 않는다.   북한 어린이와 산모의 생사도 더는 의료나 보건 문제가 아니다. ‘구조적 폭력’에서 비롯된 최종 결과를 백신과 분유로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기껏해야 다들 미봉책에 지나지 않을 테니, 한 마디로 건강과 보건과 의료는 무력하다!   이들의 질병과 죽음은 전쟁, 억압과 구속, 인권 침해, 인위적 재난 등 폭력과 부(不)자유가 몸으로 드러난 결과다. 우리는 한국 청소년, 로힝야의 난민, 북한 어린이와 산모, 데이트 폭력 피해자가 겪는 죽음과 상처에서 그 관계의 증거를 발견한다.   그리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거창한 연구나 이론을 동원하지 않아도 생활의 상상력으로 충분하다. 물리적 폭력, 억압과 지배, 차별, 불평등이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에 침입하여 삶과 신체와 정신을 망가뜨리고 병들게 하며,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자살과 탈수증, 영양 결핍, 손상과 같은 구체적 건강과 생명 현상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로부터 폭력의 구조와 경로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폭력과 부자유, 특히 구조에서 비롯된 것은 흔히 몸을 통해 제 모습과 힘을 드러내고, 비로소 만지고 알 수 있으며 분노할 수 있는 ‘물질’로 바뀌어 다시 새로운 몸을 구성한다.   질병과 죽음이 진입 지점이긴 하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구조를 온전히 다 드러내지는 못한다. 몸이 말해야 하면 폭력과 부자유는 극단에 이른 것이기 쉽다. 로힝야의 예에서 보듯 성인이 탈수증에 걸릴 정도면, 교육과 주거, 이동, 정치적 자유 따위를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먹고 입고 자는 삶의 기초 조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계 곳곳에서 질병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폭력과 그 구조에 대해, 그로부터 위협받는 생명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생명권’의 절대성을 주장하려 한다. 왜 생명권이 보장되어야 하는가는 새삼 따지지 않는다. 다시 왜 생명권을 꺼내야 할 형편이 되었는지, 그 논의도 잠시 미룬다.   생명권의 절대성 또는 우선성이라는 자명한 원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모자랄까? 헌법에 생명권을 명시한 국가는 독일과 일본뿐이라고 하나, 어느 나라든 생명권이 가장 앞서는 권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이 생명권의 법률과 조항에 있는 것은 아니나, 현실에서 생명권을 주장하고 방어하는 것은 그 정도로 충분하리라 믿는다.   다만 한 가지, 새삼 생명권을 말하려니 그동안 우리가 주장했던 ‘건강권’에서 한 발 후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원이 다르고 특별한 맥락이 있다고는 하나(한국에서는 흔히 사형제도, 안락사, 낙태 등과 연관된다), 생명권이 죽고 사는 것과 관련된 것임은 틀림없다. “달성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건강”이 아니라, 죽지 않고 살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형편이라니.   굳이 비교하면 분명히 생명권이 건강권에 앞선다(생명권 주장이 ‘정치적으로 유리한’ 점이다). 건강권이 확장되면 생명권에 닿는다고 생각하지만, 생명권은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 모두에 관련되는 넓고도 절대적인 권리다. 또한, 국민국가만 권리 충족의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 또한 의무 주체에서 제외될 수 없다.   생명권은 여러 기본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전쟁과 폭력을 막는 것, 인종이나 종교, 성별, 경제 능력 등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것, 음식과 주거, 위생 등 삶의 기본 조건을 보장하는 것, 자기를 발전시키고 스스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 등이 모두 생명권과 무관하지 않다.   생명권을 지키고 보장하며 증진하는 인간 활동은 개방적이고도 실천적이다.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누가 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한 가지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선 생명권의 절대성과 우선성을 다시 확인하는 것부터.   다음으로 진보적인 생태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리처드 레빈스의 성찰에서 배우고자 한다. 다음 말에서 ‘건강’을 우리의 관심인 ‘생명’으로, 또는 그 무엇으로 바꾸어도 의미가 통한다(리처드 레빈스 지음, 신영전 외 옮김, <리처드 레빈스의 열한 번째 테제로 살아가기>, 한울 펴냄).   “건강은 한번 획득하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어떤 행복한 최종 상태가 아니다…. 건강한 유기체 또는 개체군이란, 새롭거나 반복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자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여력, 그 자원을 필요한 곳에 동원할 수 있는 융통성, 파괴적인 영향을 가능한 한 잘 예견하고 더 최악의 사건을 최소화하는 환경을 만들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며,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일은 사회와 개인의 영구적인 활동”이다.  

서리풀 논평

문재인 케어, 민(民)-의(醫)-정(政) 협의로 풀자

  새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을 발표한 지 한 달이 좀 더 지났다. 당시 우리는 방향에 동의하면서 몇 가지 당부를 보탰다(논평 바로가기). 그 사이 여러 당사자가 의견과 주장을 내놨고 정부 구상도 좀 더 진전된 모습을 드러냈다. ‘오리무중’을 벗어나는 느낌이다.   우리는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정책은 정책 결정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미칠 집단이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을 가다듬을수록 의견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자칫 이견 정도가 아니라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진료비는 얼마나 더 나갈 것이고 보험 재정이 얼마나 더 들지 따지면, 이견은 곧 자원 배분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으로 비화한다. 돈, 수입, 경제, 부담 무엇이라 부르든 경제적 가치를 나누는 문제는 이 정책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 정도면 어떻게 결론이 나는가 하는 것보다 평화롭고 원만한 과정과 진행, 그 운영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사실 ‘과정’과 ‘결과’를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어디에서 타협하고 무엇을 양보할지에 따라 정책 결과(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정이 곧 결과를 결정한다.   내용과 무관하게, 즉 어떤 비급여가 급여가 되든 말든, 시민 부담이 늘든 줄어들든, 오로지 과정이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시민의 요구를 더 잘 충족하기 위해서도 본래 취지와 가치, 목표를 훼손하지 않도록 정책을 만들고 결정해 나가는 과정을 잘 설계하고 운영해야 한다. 과정과 결과는 둘이 아니다.     비슷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니, 최근에도 사드 배치 과정과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