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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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미래? ‘착취’를 멈추자

[서리풀논평]  청년이 미래? ‘착취’를 멈추자     한국인은 아직 ‘퇴보’에 익숙하지 않다. 1960년대부터 거의 모든 것은 커지고 많아졌으며 좋아졌다. 굶지 않게 된 데서 출발했지만, 삶을 지탱하는 물질은 상전벽해로 바뀌었다. 이제 소득, 재산, 학력은 으레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인 줄 안다. ‘확대’와 ‘팽창’은 삶의 원리로 자리를 잡았다.   1990년대 말 경제위기와 2008년 무렵 세계 금융위기를 겪었지만, 성장과 발전의 ‘멘탈’을 바꾸지는 못한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 수많은 창업과 자영업의 기획과 좌절, 사회적으로는 정부가 제시한 경제계획을 뜯어보라. 삶의 물리적 조건이 정체하거나 후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사회변화와 생존의 물적 토대를 종합한 한 가지 지표,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평균수명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2030년 무렵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강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있고 보면, 감소와 후퇴를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성장주의는 한국의 근대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생활의 물적 토대, 그리고 그를 반영하는 건강은 오른쪽 위로 끝없이 뻗어갈 수 없다. 경제가 후퇴하고 소득이 줄어들 수 있으며, 사회 요소들의 종합 지표인 건강도 나빠질 수 있다.   한국을 벗어나 세계적으로는 사회가 퇴보하고 건강이 뒷걸음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현재 상황만 하더라도, 긴축으로 건강이 후퇴한 그리스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데이비드 스터클러와 산제이 바수. <긴축은 죽음의 처방전인가>, 안세민 옮김. 까치 펴냄).     최근에는 영국이 새로운 사례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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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논평] 누구를 위한 어떤 ‘일차의료 강화’인가?

  보건과 의료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새해 벽두 관심을 기울이는 한 가지 주제가 ‘일차의료’다. 국회에서 양승조 의원이 ‘일차의료발전특별법’을 제안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대한의사협회, 가정의학회, 일차보건의료학회, 지역사회간호학회 등이 이 법안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냈다고 하니, 그동안 잘 볼 수 없던 풍경이 아닌가 싶다. 먼저 우리 의견부터. 우리는 원칙적으로 일차의료를 키우고 강화하는 모든 시도와 노력을 환영하고 지지한다. 법률, 시범사업, 행정조치, 예산, 건강보험 개편, 그 무엇이라도 좋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주장과 요구, 연구, 성명서도 마찬가지다. 일차의료가 사회의 관심사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법’이라니, 이번에는 일차의료가 주목을 받고 뭔가 변화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이번에도(!) 사태를 낙관할 수 없다고 본다. 냉소나 회의 때문이 아니라 과학과 합리성에 기초한 객관적 전망이다. 4년 전 <서리풀 논평>에서 지적한 상황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서리풀 논평 동네 의원이 ‘빅5’를 대신할 수 있을까 참고로, 이 논평은 ‘2부작’이니 연결해서 읽어야 완성된다). 이 법안이 입법에 실패하거나 변질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본래 뜻대로 법안이 통과해도 바뀌고 나아지는 것은 그저 시작일 뿐, 많은 과제가 그대로 남을 것이 틀림없다. 작은 발걸음은 그것대로 의의가 있을 것이나, 비현실적 기대 지나친 희망은 오히려 해롭다.     전망을 밝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재를 규정하는 허약한 ‘일차의료의 정치’ 때문이다. 정치가 약하다니? 유력 국회의원이 그것도 보건복지위원장이 직접 입법에 나섰는데,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맞다. 국회와 이 법안만 보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정치가 작동한다고 할 수도 있다. 유무가 아니라 어떤 정치인지가 문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차의료의 정치는 입법과 국회를 넘어 일반 대중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일반 과제에 이른다. 둘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고 또한 연속적이다. 국회와 입법이라는 현실 정치는 좀 더 너른 정치를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실현한다. 어떤 정치가 얼마나 강한가? 정치는 ‘가치’를 둘러싼 경쟁과 각축을 다룬다고 할 때,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에서 일차의료는 그런 가치가 될 만한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일차의료가 전혀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일차의료를 둘러싼 직접적인 이해관계만 봐도 금방 드러난다. 정치에(또한 정책에) 참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 대부분에게 ‘일차의료 강화’는 그리 절실하지 않다. 아쉽거나 절실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일부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 무엇 때문에 그런다는 것도 아예 모른다. 의료인과 의료기관은 그나마 말이라도 알만한 처지지만, 대부분이 무심하다. 대학병원과 병원? 그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의사와 의료 전문직들? 무심함이 대부분이지만 잘 알더라도 일차의료의 정치는 순방향으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상황이 같이 변하지 않는 한, 일차의료 강화는 오히려 그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대안이 될 공산이 크다. 이때 일차의료라는 의제는 억압되거나 배제된다. 동네 의원은 병원과 완전히 다르지만, 현재가 결정적으로 고통스럽지 않으면 이들에게도 일차의료 강화의 동력은 약하다. 동네 의원의 상황이 나빠져 무언가 변화가 절실해도 여럿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다. ‘강화론’이 말하는 그 일차의료가 무엇인지에 따라 일차의료의 정치 또한 크게 달라질 것이다.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같은 ‘특수’ ‘단과’ 의원과 내과, 소아청소년과, 가정의학과 같은 곳이 같을 수 없다. 정치인은 어떤가? 정치인에게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도 이해관계지만, 현실의 정치적 이익은 그런 가치 실현의 동기를 압도한다. 건강, 보건, 의료 과제는 더 어려워, 한국에서는 일부를 제외하면 건강 정치의 현실적 이익은 거의 없다. 특별법을 발의한 양승조 위원장만 보더라도 셈법은 간단하다. 법안을 성공적으로 입법한다고 해서 국회의원 재선이나 자신의 정치적 성장에 무슨 도움이 될까? 장애물이 나타날 때 좌절하지 않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할 동기가 있을까? 행정부와 공무원도 정치적 이해를 따져봐야 한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효율적인 ‘통치’에 달려있다고 할 때, 모든 개혁과 변혁은 이해관계를 거스르기 쉽다. 통치를 위협할 만한 문제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변화는 곧 위험이고 손실이 아닌가. ‘보건의료체계’와 ‘의료전달체계’, ‘일차의료 강화’는 지식과 규범의 수준에 머무르고, 실제 행동으로 바뀌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자가 남았으니, 바로 대중, 시민, 인민이다. 이들에게 일차의료는 무엇일까? 장담하건대, 무엇이 문제인지는커녕 대부분 용어도 잘 모를 것이다. 건강과 보건의료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만족한다는 뜻이 아니다. 생활과 문제는 정의되지 않고, 따라서 프레임으로서의 ‘약한 일차의료’라는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날 것인 경험과 그에 기초한 지식은 일차의료 강화에 적대적일 가능성마저 있다. 첨단 의료와 명의, 대학병원을 찾아야 하는 마당에 ‘일차’와 ‘동네’에 묶어둔다면 누가 좋다고 할 것인가? 이 상태로는 일차의료를 지지하는 어떤 정치적 행위도 일어나기 힘들다. 이상의 셈을 합하면 일차의료를 밀고 갈만한 이해관계의 방향은 명백하게 (-)다. 영향을 미치거나 의견을 가질 만한 그 누구에게도 변화는 절실하지 않고 현상 유지가 더 편하다. 일부에게는 이익이 있더라도, 그것은 아주 작고 추상적이며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로서 이해관계의 정치가 힘을 발휘할 가능성은 미미하다. 장황할 정도로 이해관계의 정치를 말했지만, 모든 정치를 비관하기는 아직 이르다. 정치는 이해관계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 결과물로서의 정책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실재’하는 한, 대안의 정치에는 여전히 기회가 있다. 언제 어떻게 기회가 올지 모르지만, 인구 노령화, 비용, 의료에 대한 불만 그 무엇이라도 일차의료가 가장 유력한 대안임은 틀림없다. 문제와 대안이 정치적 기회로 만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지식’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이 지식은 의학이나 보건, 질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질서, 사회제도의 합당한 배치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가리킨다(셸던 월린.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후마니타스 펴냄, 142쪽). 보통의 용법으로는 지식이라기보다 ‘될 법한’ 미래나 상상에 가깝다. 특히 그것은 전문가나 체계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관점에 기초한 것이다. 다음은 앞에서 언급한 <서리풀 논평>의 일부다. “형식이 된 제도와 체계와 정책을 중심에 놓으면, 본질은 놓치고 관료적 목표만 남기 쉽다. 또한 의사와 병원, 의료인과 전문가끼리 뜻을 모아봐야 한계를 넘지 못한다.,..(중략)…평범한 시민과 환자의 시각에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무엇보다 시민이 참여하는 가운데에, 일차의료의 가치와 방법을 새롭게 가다듬는 것이 급하다.”     둘째, 능동적 정치에는 기획과 기획자가 필요하다. 기획자는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대안을 드러내는 데 헌신하는 행위자(집단, 세력)이다. 이들은 “중요한 정치/정책 참여자가 문제와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게 할 뿐 아니라, 문제와 대안을 결합하고 이를 정치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p. 20). 이 두 가지 조건은 아직 ‘필요하다’는 수동형으로 되어 있다. 누가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주체가 될 것인가? 정해진 답은 없다. 시민사회, 활동가, 연구자, 전문가, 이해당사자, 또는 그 ‘연합’, 가능성은 다 열려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경로를 개척해야 하지만, 지금은 정치적 가시물인 바로 그 ‘법안’이 실천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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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공부와 실천을 결의하다

  습관적인 새해 인사는 생략한다. 새로운 희망이 넘치는 것도 아니니, 새 정부 출범을 기대하던 작년 이맘때보다 오히려 못하다. 일상은 여전하고, 어려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갑자기 들이닥친 유토피아 같은 것도 없다.   새로움이 없다 해서 사태를 영 비관하는 것도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 잘 풀리지 않는 것, 해답을 찾기 어려운 것들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마치 ‘디폴트’ 같은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냥 쉬운 것은 없었으며, 괜한 기대를 하고 괜히 좌절하는 쪽이야말로 우리 자신이었다.   스스로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지금을 특별한 때로 오해하지만 않으면, 새해는 낙관이나 비관해야 할 때가 아니라 다시 살피고 갱신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새롭지 않지만 다만 새로워지는 때, 희망을 결의하고 새로운 출발을 각오해야 하는 때라 하겠다.   조건과 맥락조차 무시할 수는 없으니 판단은 필요하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2018년 또한 삶은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경제는 쉽게 좋아지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발전국가 시기의 눈으로 본 경제는 여전히 ‘위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무엇이 위기인가? 위기는 어떻게 정의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대응이 달라지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것이다. ‘정통’ 또는 ‘주류’ 위기 담론으로 치면, 1997~8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낙관할 때가 한 번도 없었다. ‘위기론’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통치술의 하나가 되었을 정도다(구글과 아마존, 삼성에 이르는 대기업도 늘 ‘위기’를 먹고 산다!).   그 때문인가, 2018년 세계 경제의 전망은 비교적 괜찮다는데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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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과 건강 – 정부 시스템을 넘어 사회 시스템으로

  성격은 다르지만 둘 다 ‘후진국’형 사고다. 이대목동병원의 신생아 사망 사건과 제천의 화재. 조사가 끝나면 자세한 원인과 경과가 드러나겠지만, 무언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고 관리되지 않아 이런 참담한 결과가 빚어진 것이 틀림없다. 작게는 사람들이 잘못하거나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다. 지켜야 할 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잘 모르고 엉터리로 일을 했을 수 있다. 또는 제대로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직원이 너무 적거나 일이 힘들면 뻔히 알면서도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질병관리본부의 혈액검사에서 사망한 환아 3명에게서 유전적으로도 완전히 동일한 ‘시트로박터 프룬디’가 검출되고, 환아 4명 모두 동일한 영양수액 처치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인은 ‘세균감염’ 또는 ‘의료과실’에 무게가 실리는 중이다.”(기사 바로가기) 현상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이 중요하다면, 실수, 오류, 잘못, 무지, 태만 등에서 끝나지 않고 그 원인까지 살펴야 한다. 의료 인력의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사람이 없거나 적은 것, 시설이나 장비가 문제가 있는 것, 관리가 부실한 것 등이 모두 ‘중간’ 원인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원인이 개별적이고 우연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로 직결된다는 것.     시스템이라고 해서 바로 건강보험 수가나 대학 교육, 의료인의 자세로 비약하지는 말자. 그동안도 일부는 무사했고 다른 병원이나 시설이 모두 그런 사고를 겪는 것도 아니다.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가까운 작은 시스템이 있고 멀고 좀 더 근본적인 큰 시스템도 있다. 상위-하위 시스템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작은 시스템은 독립적이 아니라 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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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케어, 누구의 관점으로 어떤 범위에서?

  의사들이 찬바람을 맞으면서 ‘문재인 케어’ 반대 집회를 열었다. 여론은 싸늘했지만, 보건복지부가 협의체를 만들자고 나설 정도면 아주 실패한 결과는 아닌 모양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대통령도 의사들이 염려하는 것을 이해한다니, 오히려 성공했다고 해야 하나. 성공이면 어떻고 실패면 또 어떤가. 솔직하게 말하면, 의사들의 행동과 정부의 반응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디 의사뿐이겠는가, 그동안 배운 바로는 의료전문직, 아니 대부분 집단이 비슷하다. 이해관계가 걸린 일마다 집단의 힘을 보이고 의사결정권자를 압박하는 것이 표준 절차처럼 굳어졌다. 이 또한 놀랍거나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사회 어떤 사람이든 자기 이해를 지키려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만 있으면 힘을 키워 더 큰 가치를 차지하려는 것도 비판하기 어렵다. 모두가 ‘다양성’을 말하고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마당에, 지도층이니 직업윤리니 하는 책망은 과녁이 빗나갔다. 그게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다원성의 게임을 하겠다는 것이 문제다. 보건복지부가 의사들의 말을 듣기 위해 협의회를 한다는 것부터 그렇다. 정부는 그저 정치적 제스처라고 말할지 모르나, 집회의 압력으로 새로운 협의를 하는 것만으로 문재인 케어의 ‘민주성’은 크게 후퇴했다.     형식부터 문제다. 직접 이해관계만 생각해도 문재인 케어의 당사자는 의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다른 직종은 물론이지만, 보험료를 부담하는 가입자와 납세자, 환자와 그 가족, 또는 제3자는 어디에 있는가? 언론과 여론으로 충분하다고 보는지 모르지만, 착각이다. 흩어지고 산발적인 의견은 아무 힘이 없다. 그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해져야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미흡한 민주주의와 정치력, 강고한 관료주의가 어우러져 문재인 케어를 ‘침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역사적 교훈으로 보건대, 지금 추스르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말할 것이 많으나 크게 두 가지 원칙만 다시 확인하려고 한다.   첫째, ‘사람 중심’의 원칙을 다시 세우고 지켜야 한다. 문재인 케어가 달성하려는 목표는 (정책 의도와 무관하게) 큰 이견이 없다고 믿는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큰 비용 걱정 없이 필수 보건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비급여를 몽땅 없애거나 무슨 체계를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것, 누구의 수입을 보장하는 것은 그 목표를 이루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OECD 평균치와 비교하여 보장성이 떨어지느니 보장률을 얼마로 올리느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동의하겠으나, 옆에서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잊기도 쉽다. 정책을 추진하는 쪽과 그 정책이 내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쪽이 모두 마찬가지다. 추상적이고 사회적인 가치가 내 생활과 이해관계보다 앞서기 어렵다. 사람 중심의 원칙을 다시 세우자는 이유다. 건강과 보건, 그리고 그 정책을 관통하는 ‘사람 중심성(people-centeredness)’은 최근의 세계적 화두이자 경향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안한 내용을 보면 (통합적인) 사람 중심의 보건의료는 “질병이 아니라 사람과 지역사회를 보건체계의 중심에 두고, 사람들을 서비스 수혜자의 수동적 위치가 아니라 스스로 건강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도록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가리킨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문재인 케어에서 사람 중심의 ‘체계’를 논하는 것은 역부족이니, 먼저 “사람과 지역사회를 보건체계의 중심”에 두는 것으로 인식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 첫째 과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사람들의 고통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한 가지만 생각해도 이 필요는 다르지 않다. 정부에 묻는다. 그 흔한 여론조사라도 한번 했는가? 평범한 회사원, 늘 병원에 다니는 농촌의 독거노인, 애를 키우는 젊은 부부, 비정규 노동자, 청년 실업자, 그들은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는가? 사람 중심의 문재인 케어는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문재인 케어는 단지 ‘비급여’를 줄이고 ‘급여’를 늘리는 차원이 아니어야 한다. 당국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현실의 이해관계와 이를 둘러싼 정치는 점점 한 가지 문제로 수렴한다. 비급여의 포획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문재인 케어는 ‘보편적 건강보장’이라는 세계적 목표와 일맥상통한다. 참고로 이 말은 영어로는 ‘universal health coverage’, 약자로는 ‘UHC’라 부른다. 굳이 영어에 약자까지 소개하는 이유는 적어도 2030년까지 세계 모든 나라가 이를 달성하도록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세계적인 유행(?)이라 할 정도니, 그 정신과 목표를 우리만 모른 척하기 어렵다. 짐작하겠지만, 보편적 건강보장을 위한 (공식적) 국제운동을 지휘하는 것은 세계보건기구(WHO)다. 이 국제기구는 보편적 건강보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 조직의 새로운 수장인 에티오피아 출신 테드로스 사무총장이 며칠 전 내놓은 메시지는 이렇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보편적 건강보장은 단지 건강보험이나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차원을 넘는다. 이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촉진하고 질병을 예방함으로써 건강을 보호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빈곤의 한 가지 이유를 없애는 방법이며, 건강과 보건 분야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길이기도 하다. 건강과 노동 능력을 유지하여 포용적 경제성장으로 갈 수 있으며, 성 평등에도 기여한다. 이를 통해 감염병 유행을 예방하고 조기에 발견하며 유행을 억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지 세계보건기구의 허황한 소리라 할 수 없다. 이에 연결하여 다시 문재인 케어의 ‘본질’을 확인하자. 보편적 건강보장은 건강증진, 예방, 치료, 재활을 망라한다. 서비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체계도 종합적이다. 의사들이 반발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단지 건강보험 급여와 수가만 어떻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보건의료체계 전반을 같이 손봐야 하는 과제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시스템 전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문재인 케어가 목표로 하는 ‘작은’ 목표도 달성하기 힘들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정부에 묻는다. 문재인 케어는 이 정부 전체의 건강체제와 정책, 제도의 목표와 정렬되고 통합되어 있는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했는가? 일차의료와 공중보건체계, 공공보건의료와는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역할을 어떻게 분담했는가? 이 두 가지 원칙은 말 그대로 원칙일 뿐, 실제 정책으로 바꾸는 데는 정치와 정치적 리더십이 작동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지금까지는 그것이 그리 미덥지 못하고, 체계도 제대로 갖춘 것 같지 않다. 의사 시위를 계기로 심기일전, 원칙을 가다듬고 체계도 정비하기 바란다. 다시 강조하지만, 민주주의와 시민의 역량을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미 존재하는 역량은 작동할 수 있도록, 잠재한 역량은 모양을 갖추고 커질 수 있도록, 민주주의의 담대한 정치적 공간(들)을 창출하기 바란다.

서리풀 논평

불평등 시대, 새로운 정의의 원리를 수립하자

  비정규직을 줄이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자본과 기업이 어떻게 하리라는 상황은 예상했지만, 일부 정규직 노동자가 반대한다는 소식은 뜻밖이다. 특히 청년층 정규직이 강하게 반대한다니(☞관련 기사 :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 새로운 논란, 청년 정규직들 반발, 왜?),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느 회사 ‘정규직 전환 반대’ 포스터에 적혔다는 내용을 보면, 반대하는 이유와 심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공명정대한 공개채용 제도를 부정하는 특혜성 정규직화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규직화 정책인가요?”, “기준 없는 무분별한 그들만의 정규직화는 취업을 준비하는 수많은 청년들을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더 많이 준비하고 노력한 청년들에게 정규직 일자리가 돌아가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무수저 서민에게 평등이란, 기회의 평등입니다. 반칙으로 이뤄진 결과의 평등은 다음 번 당신의 기회를 빼앗을 겁니다”.  찬성과 반대를 넘어 먼저 안타깝고 답답하다. 정치와 경제 ‘구조’가 비정규 노동을 양산하고 온갖 고통을 만들어냈는데, 해결 과정에는 개인들이 분열하여 갈등과 긴장을 부담해야 한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부담은 사회화”하는 이 시대의 교리, 그리고 개인까지 이를 내면화하게 한 교묘한 통치는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셈이다.   갖가지 속사정을 모두 알기는 어려우니, 정규직 청년들의 불만을 일축하고 싶지는 않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정규직 취업에 성공한 것이 ‘공명정대한 제도’와 ‘기회의 평등’ 덕분이라 하지 않는가. 이제 이를 무너뜨리는 것에 스스로 성취한 것을 부정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와 역사가 구축한 ‘정의’는 이를 넘지 못했음을 절감한다.     일부 사정을 이해한다고 그들의 ‘반대’에 동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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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예산 나누기, 이래도 되나

  며칠 사이 국회에서(그리고 청와대에서) 벌어진 일.   “자유한국당 예결위 간사인 김도읍 의원도 통화에서 “의사, 간호사 인건비 지원과 수도권 헬기 한 대 도입 등을 위해 권역외상센터 예산을 212억 원 늘리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는 당초 내년 중증외상전문진료체계 구축 예산, 즉 권역외상센터 관련 예산을 올해보다 8.9%(39억2천만 원) 줄인 400억4천만 원으로 편성해 국회에 제출했다. 지난해 다 쓰지 못한 관련 예산이 100억여 원에 달한 데 따른 편성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국종 센터장의 북한 병사 치료를 계기로 열악한 권역외상센터의 문제점이 드러났고, 예산마저 줄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권역외상센터 예산을 증액해야 한다는 국민적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여야는 권력외상센터 예산 증액으로 화답했다.”(기사 바로가기)   한 언론은 이국종이 ‘활약’한 덕분이라 썼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기사 제목을 뽑은 사람은 예산 결정 과정을 제법 잘 아는 사람이 틀림없다. 마케팅이든 인맥이든, 하다못해(?) 공무원 ‘빽’이라도 있어야 예산을 딸 수 있다니 ‘활약’이란 표현이 딱 맞다.     광주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에 실린 이런 기사는 또 어떻게 봐야 할까? 시나 도 이름과 단체장 이름만 바꾸면 모든 광역자치단체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국회의 내년도 정부 예산안 처리 시한(12월 2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오면서 윤장현 광주시장, 이재영 전남지사 권한대행, 시·도 주요 간부, 시장·군수 등이 국회에서 상주하며 예산의 추가 및 신규 반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기사 바로가기)   예산을 모르고 정치를 모르는 탓인지, 둘 다 도무지

서리풀 논평

중증외상환자 진료, 청와대 청원으로 해결될까?

  2~3년마다 벌어지는 응급의료나 중증외상환자 사단, 이번에는 귀순 북한군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일의 경과는 따지지 않는다. 중증외상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을 형편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밝혀진 것에 집중하자.   처음은 2011년 11월 ‘석해균 선장’ 사고였다. 당시 석 선장의 총상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중증외상 전문병원을 설치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다음은 한국 사회가 늘 밟는 과정 그대로. 5년도 더 넘은 2012년 7월 9일 우리 연구소가 낸 <서리풀 논평>에서 일부를 옮긴다(논평 바로가기,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2016년까지 2000억원을 들여 전국에 중증외상센터 16곳을 설치한다고 발표한 것이 작년 10월. 이 계획은 사실 역사가 있었으니, 2009년에 세운 응급의료 선진화계획을 고친 것이었다. 처음에는 6개 권역에 각각 1,000억 원을 투자해 외상센터를 건립하겠고 계획을 세웠다. 사건 이후에 내놓은 계획이 처음과 달라진 이유는 돈줄을 쥔 기획재정부가 이미 퇴짜를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는 으레 단골로 등장하는 ‘예비타당성조사’에서 경제성이 낮게 나왔다는 것이 이유다….(중략)…그나마 복지부가 작년 10월 대책을 내놓은 이후에도 속도를 거의 내지 못했다. 지난 5월이 되어서야 우여곡절 끝에 재정지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 결과 지금 전국에 모두 16개의 권역외상센터가 지정되었고 병원 아홉 곳이 공식적으로 개소해서 운영되는 중이다. 이 수준이면 그래도 어느 정도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간단한 지표인 인력 현황만 봐도 아직 멀었다.     권역 외상센터의 전담 전문의 인력 기준인 20명을 채운 곳은 권역외상센터 9곳

서리풀 논평

<건강 격차>의 저자가 한국에 오는 이유

  11월 20일 마멋(Michael Marmot)이 한국에 온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이 분야 전문가나 겨우 이름을 알까, 연예인처럼 유명하지는 않다. 그래도 무려(!) 기사 작위까지 받아 경(卿, Sir)이니, 아주 무명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책 저자로 더 유명할지 모른다. 최근 번역된 책이 <건강 격차>이고(책 소개 바로가기), 10년도 더 전에 <사회적 지위가 건강과 수명을 결정한다>가 출판된 적이 있다(책 소개 바로가기).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건강과 보건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건강 불평등 전문가다.   그냥 연구만 하는 사람이면 이 분야에서 기사 작위를 받지는 못했을 터, 영국과 유럽, 세계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하다. 정치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정부, 학계, 언론, 국제기구가 이 사람의 말에 늘 귀를 기울인다. 물론 역할을 하는 분야는 건강 격차와 불평등이다.   영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계기는 2008년까지 세계보건기구(WHO)의 ‘건강 불평등 위원회’(정확한 이름은 다르지만, 이렇게 부르는 것이 편할 듯하다) 위원장 일을 한 것이다. 그 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는 각 나라에 건강 불평등의 상황을 알리고 행동을 촉구한 것으로 유명하다(보고서 바로가기). 곧 ‘고전’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니, 사정이 되면 전체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유감스럽게도 번역본은 없다).   2010년에는 잉글랜드 보건부가 의뢰한 건강 불평등 정책 평가를 주관하고 ‘공정한 사회, 건강한 삶’이라는 보고서도 펴냈다(보고서 바로가기). 2013년 영국의 도시 코번트리(Coventry)가 ‘마멋 시(市)’가 되기로 선언한 것은 그와 그가 하는 일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 아닌가 싶다(기사 바로가기). 이 시는

서리풀 논평

병원에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폭력’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최근 불거진 성심병원 사례다(기사 바로가기).   소속 간호사들은 짧은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선정성을 강조한 춤을 춘다. 이들은 이 같은 의상과 안무, 심지어는 표정까지 윗선으로부터 사실상 ‘강요’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재단 소속 한 병원의 중견급 간호사 A 씨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규간호사들이 장기자랑의 주된 동원 대상”이라며 “이들은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간호부 관리자급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유혹적인 표정과 제스처가 되는 지’ 등을 얘기 듣는다”고 설명했다.   전통적인 것, 병원에서 빈발하는 전공의와 하급자 폭력도 잊을 만하면 다시 터진다(기사 바로가기).   A교수의 전공의 폭행은 무차별적이고 상습적으로 이뤄졌다. 상습적으로 머리를 때려 고막이 파열됐고, 수술기구를 이용해 구타하기도 했다. 정강이를 20차례 폭행하거나, 회식 후 길거리 구타,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는 일 등이 수차례 반복적으로 이뤄졌다.   노골적인 신체 폭력은 폭로라도 할 수 있지만, 교묘한 폭력과 은폐는 관행, 개인 특성, 일탈, 일시적 감정, 내부 문제 등을 이유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부터 어렵다(기사 바로가기).   대한전공의협의회는 23일 성명을 통해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일부 교수진의 상습적인 폭언, 폭력 및 성희롱으로 인해 전공의 2명이 동반 사직했으며, 남은 전공의들은 여전히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명백히 부적절하고 비윤리적인 교수들의 태도 및 열악한 수련 환경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며, 피해자들에게 더 이상의 가해를 중단하기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군데도 아니니, 병원에 폭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