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할머니’가 생을 마감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 때 방송에 나왔던 그 자리는 아니지만, 외롭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나마 마지막 자리가 길거리가 아니었다는 것이 조금은 덜 불편하다.
그러나 길거리가 아니라고 해서 퍽 나을 것도 없다는 소리도 들린다. 부산에서 5년 만에 발견되었다는 연고 없는 죽음을 마주하는 소리다. 방 안이라고는 하지만 옷을 껴입고 장갑까지 끼고 혼자 죽음을 맞는 것이 무엇이 더 나을까.
부산의 죽음은 워낙 오래 전이라 언론에 보도된 경우다. 사실 연고 없는 죽음, 이른바 무연고 고독사는 이미 상당한 수에다 계속 늘어난다. 2009년 587명, 2010년 636명, 2011년 727명이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공식 통계다. 그러나 ‘무연고’라는 것이 퍽 엄격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음이 분명하다.
무연고나 고독사란 말을 들을 때마다, 충격이 이미 시작된 일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마도 많이들 기억할 것이다. 2010년 NHK의 <무연 사회>라는 프로그램이 한국에도 금방 알려졌고 책으로도 나왔다. (<무연사회 :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김범수 옮김, 용오름 펴냄)).
이 방송 프로그램의 공식 이름에는 ‘3만2000’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일본에 ‘무연사’ 즉 연고 없는 죽음이 연간 3만2000명이나 된다고 추산해 충격을 안겼다. 한국은 아직은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마냥 언제까지 안심하고 있을 수 있을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 때문에라도 한국은 일본을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한국보다 더 빠른 나라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사실 겁난다. 추세를 그냥 두면 일본의 현재가 한국의 미래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물론, 고독사나 무연고가 노인의 전유물은 아니다. 일본이나 한국 모두 가족 해체, 노숙, 정신장애 등 다른 이유도 꽤 많다. 그러나 주로 노인의 일인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통계를 보더라도 무연고 고독사의 약 절반쯤은 60세를 넘은 경우라고 한다.
ⓒ김원형(프레시안) |
노인의 고독사와 뗄 수 없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노인 자살이다. 물론 세세하게는 원인도 의미도 그리고 처방까지 다르다. 그러나 자살이 삶의 질을 반영하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할 때 한꺼번에 생각할 수밖에 없다.
원인과 구조로 보면 무연고와 자살은 더더욱 분리하기 어렵다. 심리학자 토머스 조이너는 유대감의 좌절이 자살을 감행하는 한 가지 핵심 원인이라고 주장했다(<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김재성 옮김, 황소자리 펴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에서도 외로움이 노인 자살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모두가 아는 대로, 한국의 노인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10년 현재 노인 인구 10만명당 노인 자살률은 80.3명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단연 1위라니, 늘 들어도 또 가슴이 먹먹하다. 10년 새 거의 두 배로 늘었다니 더욱 우울해진다.
고령 사회는 코앞의 일이다. 정말 빠른 속도로 노인이 늘어나고 있으니, 그냥 두면 앞으로 더 자주 보게 될 일이 틀림없다. 당분간은 기가 막힌 일로, 어떤 때는 ‘사회 문제’로 거듭 보도될 것이다.
사회적 반응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고독사와 노인 자살이 불행한 개인 문제이자 중요한 사회적 과제라는 것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어쩌면 사회적 합의를 쉬 이룰 수 있는 드문 문제인지도 모른다. 얼마간은 ‘도덕적’ 문제의 특성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의제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또 다르다. 마땅하고 도덕적인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 있게 예측하건대, 거듭 미래의 과제로 미루어질 것이다(기초 연금 논의를 보라).
그렇게 되는 사정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 사회가 경제와 성장의 맹목과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노인 문제는 ‘부담’과 ‘지출’로 요약된다. 의료비 문제만 해도 그렇다. 건강’보장’은 찾을 길 없고, 어느 때를 가릴 것 없이 의료비 ‘부담’이 관심이고 과제이다.
결국 현재 노인 문제에 대응하는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은 부담과 지출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고령화와 저출산, 인구 대책, 건강과 복지 정책이라는 것이 많이 다르지 않다. 의미와 가치보다는 경제와 비용이 먼저다.
가족과 효라는 과거의 가치는 희미한데, 새로운 대안 가치는 명료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성장과 효율과는 거리가 먼 문제가 사회적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아무리 봐도 비현실적이다.
그래도 이런 현실에 그냥 굴복할 수는 없다.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다시(!) 강조해야 하겠다. 먼저 노인 문제에 접근하는 기본 패러다임을 인권으로 바꾸어야 한다.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자는 이야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얽힌다. 얼마나 비용이 들지 누가 부담할지, 보편인지 선별인지는 그 다음이다.
다음이 실제적인 이야기다. 우선, 의료 모델과 사회 모델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현재 상황은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의료화(또는 시설화) 되었고, 다른 편으로는 여전히 개인의 부담에 의존하고 있다. 반대로 의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방치되는 경우도 흔하다.
병원과 노인 병원, 요양 시설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자칫 모든 문제를 의료로 해결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다. 새로운 진단법과 약물, 무슨 요법이라는 이름의 개입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의학적 개입으로 활동과 기능을 회복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특히 개인을 넘어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개인과 가족, 지역 사회가 함께 하는 사회적 지원 체계와 프로그램이 같이 필요하다. 그 사이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노인 거주 시설도 크게 보강할 필요가 있다. 고독사와 노인 자살을 염두에 두면, 개인 단위가 아닌 지역 사회와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당연한 소리도 한 가지 보탠다. 의료 모델이든 사회 모델이든, 개인과 가족의 지나친 부담, 그리고 부담 능력에 따른 불평등으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앞서 말한 인권에 기초한다는 개념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그러려면, 보험이든 조세든 노인의 삶을 ‘사회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완이자 토대가 남았다. 피해갈 수 없는 당연한 과제가 노인의 소득 보장이다.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재정을 변명 삼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다. 기초 연금도 아직 논란을 벌이고 있지만,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사회적 지원이 아무리 강화되어도 소득 보장이 없으면 의미가 줄어든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노인 스스로 질 높은 삶을 꾸릴 수 있는 원천이 소득 보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한 사람 한 사람 개입해야 고독사와 노인 자살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균적인 사회적 관계와 삶의 복원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경향적 추세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 전체의 분포, 평균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이미 누군가 말했다. 고독사가 아니라 고독생(生)이 문제라고. 마찬가지로, 노인 자살을 해결하려면 노인 ‘자생(自生)’을 봐야 한다.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삶은 누구에게나 기본적 권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