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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살의 의료화와 젠더 패러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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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의료화와 젠더 패러독스

임정빈 (경상국립대학교 사회학 박사)

 

에밀 뒤르케임(Émile Durkheim)이 1897년에 자살 현상을 사회적 원인으로 설명하는 선구적 저작 『자살론』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살 현상을 정신병리학적 원인 및 ‘불우한 삶’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은 강하다. 전자는 강화된 우울증 담론의 부상으로 인한 ‘자살의 의료화’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며 후자는 자살에 대한 편견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대중의 편견을 이용하는 언론 보도와 학문의 전문화 및 분업화, 그가 유발하는 전문가주의에 기반하여 오늘날 더 정교화되는 듯하다.

물론 뒤르케임이 인정했듯 우울증 등 정신질환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살을 야기할 수 있는 원인일 수 있고, 우울증을 많이 앓는 여성이 자살 시도율이 높다는 통계가 있음에도 자살률이 낮은 것은 방법론과 해석 차원에서 고찰을 요구한다. 여성이 차별받는 현상과 여성의 자살시도율이 높은 것도 무관하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뒤르케임은 자살이 감정이 침체된 우울한 상태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며, 상당히 격앙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짚었다. 따라서 우울증은 후자의 경우에 대해서는 자살의 면역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자살한 한 원인에 우울증이 자리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사회적 자살률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왼쪽 길과 오른쪽 길이 있을 때 왼쪽 길을 선택하여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오른쪽 길보다 왼쪽 길이 사람이 더 많이 죽는 길인 것은 아니다. 뒤르케임은 통계를 다룰 때 이같이 유의해야 할 사실을 일깨웠다. 그리고 사회적 현상인 자살률은 사회적 원인에 따라 변동하며 한 사회의 구조적 환경이 변하기 전까지는 자살률은 꽤 안정적인 수치를 유지한다는 것까지도 뒤르케임은 보였다(Durkheim, 2008). 이 글은 이에 기반하여 여성과 남성 간 자살률ㆍ자살시도율ㆍ자살생각률 차이에 대한 자살의 의료화를 극복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보다 높은 건 보편적 현상이다. 한국도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보다 약 2.5배 높다. 이에 대해 기존의 진보적 담론은 보통 “자살 행위에서의 젠더 패러독스론(이하 젠더 패러독스론)”이라는 설명을 제시한다. 하지만 나는 자살의 의료화에도 비판적이고, 젠더 패러독스론에도 비판적이기 때문에 젠더 패러독스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새로운 설명을 제시할 것이다. 젠더 패러독스론이란 “자살사망률은 남자가 높지만 자살생각이나 치명적이지 않은 자살시도는 여자가 더 높은 현상”을 말한다. 북아메리카, 서구 유럽, 뉴질랜드 등과 같은 서구 국가들에서 ‘발견’되었으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경우 총기 사용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가능하지만 남성에게 좀 더 적합한 것으로 인식되는 반면, 여성적인 자살 방법으로 간주되는 것은 독극물이다. 자살방법의 선택은 행위자가 살고 있는 지역의 성별 행위 대본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것이 자살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각 개인 수준에서 성별 행위 대본은 성별 사회화의 결과로 습득될 수 있다. 미국에서 비치명적인 자살의 시도는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남성들에게 심각한 낙인으로 작용되기 때문에 남성들은 자신들의 자살 시도를 덜 보고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남성의 자살시도율 및 자살생각률이 낮게 나타난다. 또한 여성들의 경우 우울의 발생률이 높기는 하지만 우울증 치료를 받는 비율도 남성들에 비해 훨씬 높아서 여성 우울에 따른 자살률이 남성들에 비해 현저히 낮다. 여성의 우울은 문화적으로 허용되지만 남성들의 우울은 남성답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문화적으로 허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Canetto, S. S., & Sakinofsky, 1998; 이수인, 2016).

미국에서 출발하여 한국에서 수용된 젠더 패러독스론은 한국에서의 자살에 대해 예컨대 여성들은 손목을 긋거나 수면제를 먹는 등의 비치명적 방식을 취하는 반면 남성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등의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다고 젠더 간 자살률 차이의 원인을 분석했다. 이러한 주장은 소위 ‘페미니즘적 분석’으로써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상에서 설명한 젠더 패러독스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 우선 19세기부터 내내 여성의 자살률이 더 낮은 이유를 과연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인지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를 크게 네 가지로 살펴보자.

첫째, 나라마다 다른 자살률, 시기마다 달라지는 자살률이 젠더 패러독스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가 문제다. 결국 모든 시기, 모든 나라에서의 자살에 대한 문화적 서사가 여성보다 남성이 성공률이 높도록 조장한다는 건데 그에 대한 증거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젠더 패러독스론에 따르면 만약 치명적인 방법보다 덜 치명적인 방법으로 자살하는 서사가 대중매체를 통해 더 많이 전파된다면 자살률이 줄어들텐데 자살률이 줄어드는 게 그렇게 쉬울까? 자살률이란 큰 사회 변동이 없는 한 크게 변하지 않는 꽤 안정적인 통계다. 그런데 “원래는 여성들이 더 많이 자살하(려)는데 성공률이 낮은 것이다”라는 젠더 패러독스론의 주장대로라면 이런 대중매체의 서사 차이만으로도, 현재 여남간 자살률 차이 이상으로 자살률이 몇 배씩 차이가 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현재 한국 여성의 자살률이 더 낮은 우리의 현실이 그런 대중매체 등의 서사가 크게 작용한 결과로 몇 배씩 자살률이 차이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는 게 젠더 패러독스론자들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둘째, 통계 수집상의 문제다. 자살률은 전체 국민의 전수조사가 가능하지만 젠더 패러독스론자들이 인용하는 자살시도율은 표본의 수집 범위가 좁아 응급실을 내원한 자해 및 자살시도자 정도기 때문에 애초에 내용이 제한된 통계다. 더군다나 여성의 자살생각률이 남성보다 크게 높았다는 통계(남 9.9%/여 16.9%)도 있지만(보건복지부, 2011), ‘코로나 블루’라며 우울증이 높아졌다는 코로나 시기에 남성의 자살생각률이 여성보다 높아졌다는 통계(21년 3월 기준, 남 17.4%/여 15.1%)도 있다. 애초에 인간의 생각을 통계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부정확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통계를 자살률과 직결해서 진지한 사회과학적 주장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셋째,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살 시도를 택한다는 대항가설을 세우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손목을 수십 번씩 긋는 여성 우울증 환자가 있다면 정말 진지하게 죽음을 향해 시도했으나 수십 번을 실패한 사람이라는 설명과, 자신이 고통스럽다고 주위에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라는 설명 중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을까? 물론 특정 개별 사례에서는 둘 중 어느 한쪽을 완전히 확증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후자로 판단하는 게 더 상식적이고 현재 정신의학계의 중론도 그러하다.

넷째, 자살시도율과 자살생각률이 낮지만 자살률은 높은 현상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다. 예컨대 고등학생과 중학생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중학생은 자살시도율과 자살생각률이 고등학생보다 높지만 자살률은 고등학생보다 낮다. 통계청이 2022년에 발간한 『아동ㆍ청소년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자해 혹은 자살을 시도해서 응급실에 내원한 비율에서 중학생의 자살 시도율이 고등학생보다 높다(중학생 2.4%/고등학생 2.0%). 자살 생각 비율도 중학생은 13.4%, 고등학생은 12.0%로 나타난다. 그런데 자살률은 고등학생이 더 높다. 2022년 10대 자살자 194명 중 고등학생은 118명(60.8%), 중학생은 64명(33.0%), 초등학생은 12명(6.2%)으로, 고등학생이 과반의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중학생이 자살시도율과 자살생각률은 고등학생보다 높지만 자살률은 고등학생보다 낮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이걸 젠더 패러독스론 같은 입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자살에 대한 문화적 서사가 달라서 성공률의 차이가 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한 가지 사례를 제시했을 뿐이지만 자살시도율과 자살생각률은 높으나 자살률이 낮은 집단을 찾아서 다른 집단과 비교하는 건 여러 형태로 가능할 것이다. 그때마다 이걸 문화적 서사의 차이에 따른 성공률의 차이라고 설명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이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 패러독스론은 주로 여성학자들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동의와 지지를 얻고 있다. 나는 그 이유가 젠더 패러독스론이 언뜻 듣기에 ‘진보’적이고 ‘페미니즘’적으로 들리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젠더 패러독스론을 확고하게 지지해준다고 여길 만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젠더 패러독스론은 안티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의 자살률이 높은 것에 대해 역차별 때문이라고 말할 때, 성공률의 차이라고 반박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지만, 이건 과학적이지 않은 반박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적인 설명은 여성이 차별받기 때문에 자살률이 낮다는 것이다. 직관적이지 않은 주장이지만, 여성이 차별받는 건 보편적인 현상이며 여성의 자살률이 낮은 것도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 두 현상이 서로 대치된다고 여기면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서로 연동된다고 여기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된다.

나는 모든 차별이 자살률을 낮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소수자처럼 사회적으로 비가시화된 집단은 확실히 차별이 자살률을 높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특정 차별은 분명 자살률을 낮춘다. 뒤르케임은 『자살론』에서 유대인의 자살률이 낮은 이유를 유대인의 높은 사회통합도에서 찾는다. 유대인들은 차별당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사회통합도를 높여서 자살률이 낮다는 것이다.

자살론의 요체는 “현대 사회에서 자살률은 사회통합도와 규제가 높은 집단이 낮다”는 것이다. 사회통합도는 집단이 결속과 응집력을 가지면 자살을 덜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규제 역시 규제가 낮으면, 예를 들어 주식이나 코인 투자에 전재산을 넣었다가 돈을 날리고서 자살할 수도 있다.

이를 참고로 현대 사회의 여성이란 집단을 보면 여성은 차별당하지만, 관계 지향형 사회화를 요구받는 집단이기도 하다. 돌봄 노동과 감정 노동도 강요당한다. 이에 따라 차별당하는 여성들끼리 서로 보듬기도 한다. 여성은 사회통합도와 규제 모두 높은 집단이다. 그렇다면 이런 집단이 자살률이 낮은 게 이상한 일일까? 오히려 사회과학의 전통적인 설명 방식에 비춰봤을 때 그렇지 않다는 설명이 더 합리적이다.

미국의 인종별 통계는 이를 뒷받침한다. 수 세기 동안 극심한 차별과 구조적 폭력에 노출되어 온 미국 흑인 공동체는 전통적으로 백인보다 현저히 낮은 자살률을 기록해 왔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발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흑인 9.1명/백인 17.6명이었다(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 2024). 이는 차별이라는 외부적 압력이 오히려 교회와 가족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사회적 통합과 ‘생존의 서사’를 만들어내어, 자살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하는 기제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이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이러한 인종 간 자살률 차이를 나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또한 전체 자살률은 백인이 여전히 높지만, 상승률은 흑인 청년층(10-24세)에서 가장 가파르다. 2011년부터 2021년 사이에 60% 이상 상승했다(CDC, 2023). 이는 교회나 대가족 같은 전통적인 공동체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흑인 청년들이 의료화된 담론이나 고립된 경쟁에 더 많이 노출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여성이 차별받기에 오히려 강력한 응집력을 갖게 된다는 역설은, 여성의 집단적 사회통합도가 유지될 때 비로소 유효하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한국의 20대 여성 자살률이 전년 대비 25.5% 급증한 사실은 서비스직이나 비정규직 등 취업전선에 있던 젊은 여성들이 코로나19의 타격을 직접적으로 받은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허완, 2020). 노동할 것을 요구받는 젊은 여성에게 해고 위기는 구성원 간의 연대보다는 각자도생의 경쟁을 부추기면서 여성의 공동체성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고용상의 차별 등의 차별은 그 자체로 자살률을 높이는 게 아니라, 특정 맥락에서 자살률을 변동시키기 때문에 사회구조적 맥락을 관계론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차별당하는 여성이 원래는 자살률이 더 높을 거다”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가진 젠더 패러독스론이 안이하다. 젠더 패러독스론은 남성의 높은 자살률 때문에 남성도 가부장적 책임의 부담을 느낀다는 식의 이야기를 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 인식과의 일관성이 부족하다.

나아가 젠더 패러독스론은 우울증이 자살을 야기한다는 자살의 의료화와도 연동된다. 앞서 젠더 패러독스론이 우울증을 앓는 여성의 자살생각률과 자살시도율이 높음에도 성공률 차이 때문에 남성 자살률보다 자살률이 낮은 것이라고 설명한다고 밝혔는데, 이 설명 자체가 젠더 패러독스론이 자살의 의료화-정신병리화를 승인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에 진보적 설명으로 제시된 젠더 패러독스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자살의 의료화도 더 잘 비판할 수 있다.

우울증이 자살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현대에는 상식처럼 널리 퍼진 얘기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극히 최근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에단 와터스(Ethan Watters)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 따르면 일본에서 우울증은 자살과 연결돼서 생각되는 질환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자살이 도덕적 또는 철학적 의미를 지닌 의도적 행위라고 생각했다. 자살의 유행 또는 자살 행위 자체를 정신질환의 결과로 보는 공통의 여론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역사, 문학, 영화에는 일본 무사가 할복을 하거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들이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목숨을 끊는 등 ‘고상한’ 자살 이야기가 많이 등장했다. 1998년에 정신의학자인 마사오 미야모토가 자살 증가와 우울증 사이에 큰 연관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이것은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즉 자살은 우울증에 걸려 정신이 나약해진 바람에 하는 게 아니라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살을 한다는 견해가 강했다. 그런데 우울증약을 만들어 파는 제약회사가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며, 흔하게 걸리고 약이 필요한 위험한 질병이라는 얘기를 퍼뜨리면서 자살과 우울증을 연관시키는 담론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주변에 알리거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살 시도’라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고 와터스는 경고한다. 즉 역설적으로 우울증과 자살을 연관시키는 담론 자체가 자살 생각률과 자살 시도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Watters, 2011).

따라서 자살의 의료화와 젠더 패러독스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이 글은 자살과 관련한 새로운 치유적 담론의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 젠더 패러독스론이 자살의 의료화보다 더 까다로운 분석을 요구하므로 젠더 패러독스론에 대해 다룬 분량이 더 많지만, 이 글은 ‘페미니스트들이 틀렸다’고 얘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살의 의료화에 대한 보다 정치한 분석을 요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자살했으니 우울했겠지’라는 사고가 만연한 요즘 세태에 우울증 환자의 자살 가능성을 비우울증 환자보다 과도하게 부각하는 것은 역설적인 위험성을 낳는다. 이는 마치 통계상 그렇지 않은데도 이주민이 선주민보다 더 많은 범죄를 일으킬 거라는 편견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결국 자살을 우울증이라는 정신의학적 틀에 가두는 의료화와, 이를 단순히 성별 행위 대본의 차이로 해소하려는 젠더 패러독스론은 모두 자살의 진정한 사회적 층위를 가리는 장막이다. 자살을 우울증의 필연적 결과로 상정하는 담론은 고통을 해석하는 개인의 서사를 빈곤하게 만들며, 때로는 자살 시도를 자신의 비명을 알리는 유일한 언어로 선택하게 하는 비극적 유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젠더 패러독스론 역시 이러한 의료화의 문법을 비판 없이 승인함으로써, 여성의 고통을 수동적인 실패의 영역에 박제해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본 글의 목적은 기존 페미니즘적 분석의 파기가 아니라, 자살이라는 복잡한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 보다 정교하고 과학적인 토대를 구축하는 데 있다. 여성이 차별받기에 오히려 강한 사회적 결속과 응집력을 갖게 된다는 역설은, 소수자 집단이 자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기제를 이해하는 새로운 창이 된다. 뒤르케임이 100여 년 전 증명했듯, 자살률은 사회적 통합과 규제의 질서를 비추는 거울이다. 여성의 낮은 자살률을 ‘성공과 실패’라는 기술적 서사가 아니라 ‘차별에 맞선 연대와 사회적 응집의 역설적 산물’로 독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살 예방의 실마리를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회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살은 마음의 병이 낳은 비극이기 이전에,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가를 묻는 가장 아픈 사회적 질문이다. 통계의 숫자 뒤에 숨겨진 연대와 통합의 역설을 읽어내는 것, 그것이 자살의 의료화라는 거대한 파고 앞에서 사회과학이 견지해야 할 윤리이자 새로운 치유적 담론의 시작이다. 즉, 약물 처방이나 개인 상담을 넘어선 사회적 연대의 복원과 사회 문제 해결이 진정한 자살 예방 및 사회적 치유의 길이다.

 

 

참고문헌

김명희. (2025). 다시 쓰는 자살론. 그린비.

보건복지부. (2011). 국민건강통계.

보건복지부. (2021). 2021년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 (1분기).

이수인. (2016). 자살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사회적 요인의 성별 차이. 조사연구, 17(4), 67–103.

통계청. (2022). 아동·청소년 삶의 질 보고서.

허완. (2020년 11월 14일). 조용한 학살: 20대 여성 자살률이 유례없이 급증하고 있다. 허프포스트코리아. https://www.huffingtonpost.kr/article/102805

Canetto, S. S., & Sakinofsky, I. (1998). The gender paradox in suicide. Suicide and Life-Threatening Behavior, 28(1), 1–23.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2023). Notes from the field: Recent changes in suicide rates, by race and ethnicity and age group — United States, 2021. Morbidity and Mortality Weekly Report, 72(6), 160–162.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2024). Provisional suicide deaths in the United States, 2023.

Durkheim, É. (2008). 자살론 (황보정우, 역). 청아출판사. (원저는 1897).

Watters, E. (2011).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김한영, 역). 아카이브. (원저는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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