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의료, 내일은 다르게
최 용 준(건강정책연구센터, 한림대)
오는 17일, 보건복지부가 “의료 기관 기능 재정립 방안”을 발표합니다. 재작년 정기 국회 국정 감사에서 ‘동네 의원의 위기와 몰락’이 거론된 지 일 년 반만의 일입니다. 그해 말에 정부는 “의료 기관 기능 재정립 태스크 포스 팀”을 만들어 논의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와 별도로 복지부와 의사협회는 작년 6월 일차의료 활성화를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여 상호 논의를 진행해 왔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정부와 의료계를 중심으로 일 년 이상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어 온 셈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 발표는 이해 당사자들과 언론의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그러나 정책 논의의 한 축이었던 의료계 내부에서부터 발표를 앞둔 정책에 대한 반대 기류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정부 발표 내용에 ‘선택 의원 제도’가 포함될 것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선택 의원 제도를 노인, 만성 질환 등 지속적 관계를 통한 통합서비스가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또 정책의 세부 내용은 의료계와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의료계에서는 이 제도가 주치의 제도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반대하고 있습니다. 정부 관계자가 선택 의원 제도가 이번 발표의 핵심이라고 밝힌 만큼, 갈 길이 험난해 보이기만 합니다.
기대감과 불확실성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는 의료 기관 재정립 방안. 뚜껑을 열어 봐야 실제 내용을 알고 합리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일을 조금 뒤로 미루고 정책 논의의 핵심인 일차의료 정책 과정에 관하여 몇 가지 사항을 짚어 보고 싶습니다.
첫째, 일차의료 정책은 핵심 이해 당사자인 의료계의 찬성, 적어도 동의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운 정책입니다. 금전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뿐 아니라 일상화된 진료 관행을 깨뜨리는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10여년 전 의약 분업을 떠올리면 이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설령 밀어 붙이기 식으로 정책을 시행한다 하더라도 이해 당사자들의 충분한 공감대 형성에 실패하는 정책은 원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부가 선택 의원제 등 여러 정책 방안들을 실현하려면 인내심을 갖고 의료계를 설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정책 시행과 성공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료계는 주치의 제도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선택 의원 제도 등 비슷한 정책 방안에 대해서 의구심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좋은 일차의료는 주치의 제도를 필요로 합니다. 환자-의사 관계의 지속성을 제도화함으로써 일차의료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런 제도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의료계의 처지와 속내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할 수 없고 오히려 그 이유와 원인을 냉정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치의 제도, 선택 의원 제도를 꼭 의료(medical) 부문부터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또 다른 각도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한방 주치의 제도, 민간에서 자발적인 시범 사업을 한 경험이 있는 치과 주치의 제도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안입니다. 때로는 순리에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접근 전략이 성공한다면 의료계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것입니다.
셋째, 타협의 가치를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식의 태도로는 논의가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원하는 의사와 원하는 주민을 맺어 주는 것이라 해도 주치의 ‘주’자조차 입에 담기를 거부하는 의료계의 태도는 문제를 꼬이게 할 뿐입니다. 거꾸로 주치의 제도가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강변하는 자세도 문제일 것입니다. 주치의 없이 60여 년을 살아온 한국인들입니다. 양질의 의료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급증하는 의료비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겠지만 억지로 한다고 안 될 일이 될 리 만무합니다. 정책의 향방에 영향을 미치는 이해 당사자들일수록 스스로의 처지를 객관화하고 타협에 적극적으로 임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책 결정 과정에서 타협이 필요한 이해 당사자들을 배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일 년 반에 가깝게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시민을 대표하는 이해 당사자가 배제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시민 단체에 관여하는 여러 사람이 그 논의에 참여하였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이해 당사자인 의료계와 정부 외에, 보건의료의 중요한 한 주체인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의료 기관 종별 본인 부담률 차등화 등 정부의 정책 구상에 일부 시민 단체가 벌써부터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여기에도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과거 일차의료나 의료 전달 체계 정책은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본 적조차 없었습니다. 이 점에서 지난 일 년 반 간의 논의는 의료 정책 논의상의 뚜렷한 진전이었습니다. 이제는 한발짝 더 나아가 정책에 대한 합의와, 합의에 기초한 실천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물론 그 합의와 실천은 이해 당사자들만을 위한 짬자미가 아니라 좋은 의료를 향한 타협이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