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는 정부 조직이 아니다.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이라 하기도 어렵다. 굳이 법률대로 하자면 보건복지부가 관리하는 사단법인이다. 적십자 회비를 내고 남북적십자회담도 하는 바람에 생긴 흔한 오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적십자’라는 말부터 짚고 넘어가자.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이슬람권에서는 적십자라 하지 않고 ‘적신월(赤新月)’이라고 한다. 종교적 배경이 달라 적십자 대신 초승달을 상징으로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국제‘적십자’위원회와 달리 국제 연맹은 적십자, 적신월을 같이 쓴다. 연맹, 위원회, 회의, 협약 체결 당사국 등의 관계는 대한적십자사의 홈 페이지를 참고할 것 (바로 가기). 누가 보더라도 국제성, 보편성을 가진 조직임을 쉬 알 수 있다.
그런 적십자 운동, 한국 내에서 그 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인 대한적십자사에 기업인이 총재에 취임한다. 재벌가 출신에 대기업을 운영하면서, 지금 대통령의 선거 운동을 열심히 하신 분이라고 한다. 당장 낙하산이니 보은 인사니 하는 비판이 거세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잘 된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적십자 내부에서 합의해서 뽑았다고는 하나, 형식만 그렇다 뿐인 것을 누가 모를까. 막상 당사자는 그걸 몰랐다는 소리도 참 가소롭다. 적십자가, 또 그 총재 자리가 이런 지경인가 싶다.
이번 인사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데에는 ‘낙하산’과 ‘전문성’이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평생 기업 활동을 해 왔고 지난번 대선에서 선거운동을 도왔다니 말이 나올 만하다. 남북관계를 다루었거나 구호 활동에 참여한 것 같지도 않다. 터무니없는 비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유로 치면 적십자사 총재만 가지고 그런다고 억울해 할 것이다. 하루가 멀다고 발표되는 낙하산과 비전문가가 워낙 한둘이 아니니 말이다. 그나마 이번 경우는 조직 운영(민간의 사적 조직이지만)의 경험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가능하면 좋은 쪽으로 보자. 낙하산은 나름대로 이해해 줄 구석이 있다. ‘국정 철학’을 잘 이해하고 또 공유한 사람이 국가기관의 운영을 맡아야 한다는 말이 영 우스운 말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지금 이해하고 공유할 국정 ‘철학’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심스럽긴 하다.
비전문가라는 비판에도 당사자는 억울해 할 수 있다. 과거의 대한적십자사 총재만 하더라도 모두 무죄라고 하긴 어렵다. 일부 언론은 과거 총재가 주로 “경륜과 덕망, 사회적 신임을 고루 갖춘 원로”였다고 하나, 꼭 그런가 싶다. 정부 고위직이 ‘관피아’로 자리를 차지한 모양이 많았고, 무슨 원칙인지 모를 뒤죽박죽도 꽤 있었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낙하산도 비전문가도 아니다. 과거에 무슨 품위 없이 막말을 했다는 것도 관심 밖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으니, 바로 ‘기업인’이 새 총재라는 사실이다.
일부 언론은 기업인으로는 처음이라고 했으나 꼭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2007년 총재를 맡은 분도 기업인 출신이긴 하나, 적십자 내부 사람으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이번 정부에서 이 시기에 기업인이 적십자사를 맡아 운영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관심의 출발은 사태가 이러 결과에 이른 이유. 임명권자도 영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비판과 비난을 예상 못했을까. 보은 인사니 비전문가니 하는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꼭 명시적, 체계적으로 어떤 구상을 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직관이고 암묵적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인 의미는 매한가지다.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적십자의 활동 범위는 꽤 넓다. 그 가운데는 일반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은 역할도 적지 않다. 이산가족 찾기로 대표되는 남북 교류협력, 적십자 병원 운영, 헌혈 사업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런 적십자 활동들이 기업과 경제의 논리로 재해석되는 일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분을 임명한 데에 여전히 말 못할 속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비판을 무릅쓰면서도 기업인을 적십자의 운영 책임자로 뽑은 이유는 적십자 조직과 활동의 ‘경제화’ 그리고 ‘기업화’를 빼고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본다.
지나친 해석에 억지 춘향식 의미 부여라고 할 것인가. 백 걸음을 양보해서 임명권자의 심오한(?) 의도 같은 것은 없었다고 치자. 그래도 우리의 예측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게 ‘경향성’이다. 새로 임명된 총재가 무엇으로 스스로를(충성과 열정과 실력을) 증명하려고 할까?
그렇지 않아도 적십자의 일부 활동(그러나 핵심적인 것들)은 경제화, 기업화의 길을 닦고 있던 참이었다. 혈액 사업과 병원 운영이 대표적인 분야다.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길을 넓히고 굳히는 데 관심이 기울어질 것이 틀림없다.
먼저 병원 사업. 현재 서울, 인천, 상주, 통영, 거창 등에 6개의 적십자 병원이 운영되고 있다. 그리 유명하지 않다 뿐, 각각의 지역사회에서 대표적인 공공병원으로 역할을 하는 중이다.
그렇지만 적십자 병원은 같은 공공병원인 지방의료원에 비해서도 더 사정이 나쁘다. 최근에도 지난 2010년 대구의 적십자 병원이 적자 심화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프레시안 기사 참고 <’인도주의‘ 사라진 적십자병원> 바로가기).
아직 총 부채 규모가 1천 2백억 원이 넘고 매년 40억 원이 넘는 적자를 본다는 것이 작년 국정감사 보고였다.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조 조정’을 하자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 조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기업인인 새 총재는 아마도 공공병원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부채와 적자를 그냥 두고 왜 병원을 계속 운영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지역 이기주의와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 쯤으로 진단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 분이 살아온 이력과 평소의 소신으로 보건대 모두 문을 닫거나 민간에 팔아넘기는 길을 택하지 않을까. 최저 수준이라도, 기업식 운영으로 효율과 수익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할 공산이 크다.
혈액 사업도 위태롭다. 헌혈은 흔히 단체 헌혈이나 급하게 구하는 Rh- 혈액형, 그리고 사회적 도덕과 윤리로 상징된다. 하지만 이미 민영화의 바람에 노출되어 있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혈액사업에 민간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관련 보도 바로가기).
경과는 구구절절 복잡하지만 이런 ‘새바람’의 배경에는 역시 경제 문제가 있다. 적십자사는 15개 혈액원과 131개 헌혈의 집을 운영한다. 여기다 연구원과 전문시설, 검사센터 등을 운영하면서 매년 수십 억원의 적자를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또한 이런 종류의 적자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시장, 수요와 공급의 법칙, 가격 같은 생각을 먼저 하리라. 역시 또 문제는 비효율적 운영이나 관련자의 ‘도덕적 해이’ 또는 경쟁 메커니즘의 강화쯤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실 경쟁과 효율의 논리는 혈액사업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 벌써부터 다원화된 혈액관리 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적십자의 혈액사업은 민간 부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한마음혈액원과 사실상 경쟁한다.
새로운 총재는 이런 혈액사업을 어떻게 생각할까. 혹 혈액사업의 적자를 단번에 만회할 ‘상품’을 개발하라고 하지나 않을까. 아니면 기업에 모두 맡기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걱정이 그냥 쓸 데 없는 것으로 끝나기를 바란다. 새 총재의 경험이 적십자 본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좋게 쓰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래 봐야 헛된 바람 아닌가 싶다.
분위기가 그렇고 도도한 불퇴전의 각오가 그렇다. 그가 본래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은 꽤 괜찮은 셈이다. 경제 부처는 물론이고 전체 국정이 경제화, 기업화를 신조로 삼은 지 오래지 않은가.
멀리 가면, 혈액사업과 병원 운영을 넘어 남북 교류와 인도주의적 구호사업에도 영향이 미칠 수 있다.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시장의 근본주의는 장기 매매의 자유화까지 아무렇지 않게 말할 정도로 창의적이고 대담하다 (스콧 가니가 쓴 <레드마켓, 인체를 팝니다> 참조 ).
조만간 적십자 회비를 내는 이유를 묻게 될지도 모른다. 납부 거부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면 그건 정말 불행한 시나리오다. 더 크게 보면, 모든 것의 경제화에 어떻게 저항할까를 물어야 한다. 이런 새로운 흐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다시 과제다.
보태는 말. 적십자사의 새 총재가 시장 거래가 아닌 인도주의적 동기의 헌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모르겠다. 그럴 기회가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리처드 티트머스가 오래 전 쓴 그 유명한 <선물 관계(The Gift Relationship)>라는 책을 살펴보시길 권한다(유감이지만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 보도대로라면 영어로 읽는 것에 지장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또 한 가지, 이 책이 다만 헌혈뿐 아니라 적십자 활동 전반을 성찰하는 데도 ‘효율적’일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