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지속 가능한 보건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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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재정 논쟁을 환영한다. 누가 말한 대로, 기왕이면 제대로 했으면 한다. 낌새를 보니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금방 바람을 불러올 것 같던 여당의 새 지도부도 벌써 발을 빼는 모양이라니, 큰 기대를 갖기는 힘들다. 연말 정산이든 건강보험료든 ‘논의 중’이라는 이유를 대며 버티지 않을까.

그러나 이 시대의 복지 문제는 정략으로 풀 수 없다. ‘당리당략’만 가지고는 더구나 어렵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정치인과 정당의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넓혀 보면 오늘날 우리 정치의 운명이다.

 

무엇보다, 힘없는 약자들이 매일 온 몸으로 저항하는 증언을 막을 도리가 없다. 자살과 출산 파업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달리 대신해 주는 이도 없으니, 스스로 나서야 하는 몸의 복지정치와 역설의 ‘생명권력’. 어떤 정치도 이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다.

그 동안도 사실은 논쟁 중이었다. 몸을 던진 비명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다만, 그 논쟁은 억눌렸고 또 그를 위해 왜곡되었다. 다른 사정이 그대로면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큰 역할을 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 ‘지속 가능성’이라는 올가미다. 앞으로 우리는 보건과 복지, 그 재정에서 매일 지겹도록 지속 가능성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벌써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다.

몇 해 전에는 국민연금의 재정 때문에 또 최근에는 공무원 연금 때문이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2050년, 2060년을 예측하면서 지속 가능성을 교육 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다.

표현이야 갖가지지만, 지속 가능성이란 잣대(가치? 목표?)는 누구도 함부로 도전하지 못하는 성역이다. 모든 논의와 논쟁도 이를 전제로 하고 여기서 출발한다.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니 권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지속가능성’이란 개념이 내포한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는 일단 치워놓자. 언제 이 논평을 통해 다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렇더라도 이 말이 남용, 오용되고 있다는 문제는 남는다. 말과 개념의 낭비(남용)보다 잘못되고 비틀린 사용(오용)이 더 심각하다.

 

보건복지의 지속가능성, 또는 “지속 가능한 보건복지”. 우선 물어보자. 무엇을 위한 지속 가능성인가? 복지 재정을 계속 충당할 수 있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면 정부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 또는 한국 사회가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남는 것? 지속되어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야 본질 가치와 수단을 분별할 수 있다. 한국의 심각한 저출산을 흔히 지속 가능성과 연관시키지만, 이때도 무엇이 목표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와 국익, 경제, 공동체, 인류 사회, 사람다운 삶,…무엇의 지속을 뜻하는 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지속되어야 하는 것은 그만한 좋은 가치와 상태이다. 그래야 그보다 못한 가치나 수단,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지속 가능성이 흔히 가치와 정치의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높은 가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무엇의 지속 가능성인가는 모호하거나 의도적으로 은폐된다. 형식으로만 남아 있고 신화가 된 습관이라고나 할까. 그 가운데서도 지속 가능성은 경제를, 더 좁히면 경제성장을 말하는 것으로 굳어져 있다.

오죽하면 대통령 자문위원회의 이름도 지속가능‘발전’위원회다. 2011-2015년 발전전략은 “환경 친화적 성장 동력 육성과 경제와 사회의 동반성장을 융합하는 전략”이라고 밝혀놓았다 (바로가기). 경제와 사회를 나란히 놓은 동반성장이 말은 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잘 봐도 보건과 복지, 또는 그 재정의 지속 가능성은 경제의 지속 가능성 다음에 자리한다. 그러니 복지 재정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지속 가능성) 묻는 것은 곧 이런 뜻이다. “경제 발전(성장)에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복지 재정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떤 삶 또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를 묻는 것은 지속 가능성의 본래 뜻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내일도, 경제가 어려워도, 환경이 고갈되어도, 그래도 지속되어야 할 우리의 삶과 사회는 어때야 하는가.

따지면 보건복지의 지속 가능성은 논리의 모순이거나 왜곡이다. 보건(건강)과 복지는 이 자체로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자 목표가 아닌가. 노인에게 최소한의 소득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하거나 지속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가치이자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건강하고 삶의 질이 높은 사회, 노인이 기본적인 물질적 생활은 누릴 수 있는 사회, 마음 놓고 애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사회. 이를 위해 경제와 경제 성장과 경제성장률이 도구로 쓰여야 한다. 경제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 결국은 보건과 복지가 지속되기 위한 것임을 부인할 수 있을까.

 

저 유명한 필립 모리스의 흡연 연구를 떠올려보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소개되어 있으니 그리 낯설지는 않을 터. 이 연구의 결론은 경제 친화적이다. 국가 예산(연구는 체코를 대상으로 했다)에 미치는 효과를 비용 편익으로 보면 흡연을 하는 것이 국가 경제에 더 유리하다고 한다.

같은 방식으로 연금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려면? 막말로 연금을 받기 이전에 모든 가입자가 죽는 것이다. 설마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국가와 정부, 사회가 있을까만, 워낙 가치의 역전이 심한 세태니 웃어넘길 농담치고는 아프다.

질병을 예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방이 더 경제적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예방이 지나치면(?) 어느 순간 전통적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한다. 예방의학자 제프리 로즈의 말대로, 그럼에도 예방에 애쓰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더 높은 삶의 가치를 구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속되어야 할 가치와 그 수단으로 쓰여야 할 경제의 관계가 뒤집히면 어떻게 될까. 가치가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물론, 경제조차 오래 가지 못한다. 한국 사회를 압도하는 저출산의 공포가 이를 말해준다.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이 처음 만들어진 2006년부터 작년까지 123조원의 예산을 썼지만 저출산 정책의 효과는 없었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정책의 진정성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지속되어야 할 가치 대신 경제를 앞세웠기 때문이라고 본다. 경제성장, 성장잠재력, 노동력, 노인 부양 등등을 앞세우는 한, 애를 낳고 키우는 것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의 가치가 수단이 되었으니, 출산과 양육에 ‘파업’으로 맞서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애를 낳고 기르는 것은 삶의 본질적 가치이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수단이 되어야 한다. 건강하고 행복한 출산과 보육, 교육이 가능해야 경제로서의 저출산 문제도 추세가 꺾일 것이다.

 

경제 발전이 없고서야 복지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반론할 것이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경제의 지속 가능성도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역사의 종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세계체제의 위기가 눈앞에 왔다는 전망도 많다. 월러스틴이나 아리기 같은 사람들은 대략 2030-45년이 전환의 시기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언제가 그 때인가는 덜 중요하다.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새로운 전망과 좀 더 나은 사회적 삶의 모습 또는 그 지속 가능성을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에 맞선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의 ‘참살이(부엔 비비르, Buen Vivir)’가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월러스틴, ‘긴축이 세계경제를 구원할 수 있을까?).

 

보건복지와 그 재정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 그리고 경쟁은 단지 재정 조달, 증세, 소득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삶과 사회를 원하고 지향하는지, 무엇을 지속할 지의 문제다. 재정 뿐 아니라 그 조건을 규정하는 지속 가능성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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