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세 살 쿠르디의 죽음과 한국의 난민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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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한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 된 시리아 아이, 쿠르디. 9월 3일 국내 언론에 보도된 쿠르디의 사진은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붉은 색 셔츠의 작은 남자아이는 파도에 떠밀려온 인형처럼 해변 모래에 엎드려 있었다.

쿠르디의 죽음(정확하게는 몇 장의 사진)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세계의 여론이 들끓었다. 유럽 여러 나라가 난민 수용 정책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토록 완강하던 몇 나라(예를 들어 영국)는 벌써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미디어와 언론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드라마가 된 타자의 고통, 그것을 중계하는 현대의 미디어, 그리고 분노와 연민조차 ‘외주’를 통해야 하는 ‘상호 수동’의 현실이 끔찍하다.

쿠르디의 죽음에 분노하는 것(정확하게는 분노한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분노를 관찰하거나 동참하는 것)은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의 녹음된 웃음과 얼마나 다를까. “고된 일에 지친 상태로 TV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어도 나는 코미디 쇼가 주는 긴장 완화를 느낀다. 마치 TV가 나를 대신해서 웃어주는 것처럼.”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40쪽)

‘상호 수동’을 벗어나지 못해도 그 현실조차 참혹하다. 오늘 이 시각에도 수만의 난민이(그리고 이미 죽어간 영혼들이) 유럽의 바다와 육지를 떠돈다. 유엔난민기구의 통계를 보면 2015년 6월에만 4만 3천여 명의 난민이 바다를 거쳐 유럽에 도착했다고 한다(바로가기).

사태의 원인과 결과는 여기에서 자세하게 살피지 않는다. 다만, 유럽에서는 현재의 난민 사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인도주의적 위기라고 인식하는 분위기다. 영국은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유대인 아이를 실어 날랐던 ‘어린이 수송(Kindertransport)’ 프로그램을 다시 호출할 정도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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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어떤가. 쿠르디의 죽음은 그 오래된 ‘해외토픽’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매일 미디어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국제 문제가 되었지만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상태라고 할까, ‘상호 수동’의 현실이(바로 그 때문에) 미치는 힘은 딱 여기까지다. 쿠르디의 사진을 보고 분노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이입되지 않는 이유다.

삶의 현실은 인식을 몇 발 앞서 있다. 난민은 우리에게도 문제가 된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한다. 우선, 보통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난민’의 상태로 한국을 찾는다. ‘난민인권센터’가 행정정보공개청구를 해서 얻은 자료를 보면, 한국에 난민을 신청한 사람은 2014년 한 해에만 2,986명에 이를 정도다(바로가기). 2015년에도 5월 말까지 1,633명이 신청을 했다고 한다.

한국이 난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는 더 큰 문제였다. 한국이 난민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다. 인구당 난민 인정 비율은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 그룹에 속한다(바로가기).

 

인정 여부를 둘러싼 시비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들을 얼마나 인간답게 대우하느냐 하는 것이다. 난민 신청자가 당면하는 현실은 간간이 소개된 적이 있으니 다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터. 2013년 10월 <한겨레신문>에 실린 이명수의 글은 난민에 대한 처우를 이렇게 설명한다(바로가기).

 

심사 기간도 몇년씩 걸린다. 그동안 난민 신청자들에 대한 생계지원은 전무하다. 그럼에도 취업을 하면 불법이다. 난민 신청자 중 절반 이상이 돈이 없어 식사를 거른 적이 있다고 했다. 단속 위험을 무릅쓰고 돈을 벌 수밖에 없다. 그러면 법무부는 기다렸다는 듯 불법 취업 명목으로 잡아들여 추방한다.

 

‘난민인권센터’가 묘사한 난민 신청자의 건강과 의료 현실은 좀 더 생생하다(바로가기).

 

난민신청자들은 지역건강보험적용대상에서 제외되어 직장건강보험만 가입 가능합니다. 취업허가를 받을 수 없는 첫 6개월 동안은 자연히 건강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됩니다. 이 때 발생하는 의료비는 난민신청자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큰 부담이 됩니다. 영아를 돌보느라 취업을 하기 힘든 한부모 가정의 경우 수입은 없고 의료비는 배로 들어가는 힘든 상황을 겪게 되기 마련입니다. 법무부에서 지원되는 난민의료비는 일정 금액이 일회적으로만 지원될 뿐이어서 수술을 받거나 지속적으로 치료비용이 들어가는 경우에는 사실상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유럽을 떠도는 난민들의 상황과 얼마나 다를까. ‘그들’에게만 적용하는 ‘유체 이탈’의 생각과 감각을 우리 스스로에게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유럽인과 유럽 국가들을 향한 인도주의의 요구는 우리의 난민에게도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이해해야 할 것은 ‘역지사지’를 넘어 난민의 현상과 원인, 그 본질로 향한다. 우선, ‘난민’이라는 좁은 말이 생각과 이해를 가로막는 점이 있다. 2014년 제정된 난민법에서는 난민을 이렇게 규정한다.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전에 거주한 국가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무국적자인 외국인을 말한다.

현실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신분’ ‘정치적 견해’ ‘보호’ ‘공포’는 불안정하고 동요하는 개념들이다. 자기 나라에서 최선을 다해도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다른 나라에 불법 체류하는 것은 어떤가? 이러한 ‘강제 이주’는 난민과 얼마나 다를까? 난민과 이주민의 경계는 흐릿하고, 이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반응도 만족스럽게 나뉘지 않는다.

현실로서의 국민과 시민, 민족, ‘우리’와 같은 정체성도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다. 난민과 이주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그 결과다. 규범적으로는 세계시민주의에 동의하는 경우에도 ‘민족국가’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모든 나라에서 조세 부담과 복지 혜택을 두고 갈등이 있으며, 이는 이주민의 권리와 의무 문제로 연결된다. 언어와 종교, 문화의 영역까지 가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솔직히 말해서 왜 한국이 저들에게 한국국민이 낸 세금을 사용해야 할까요? 이탈리아나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식민지 지배를 했던 나라면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보지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오히려 식민지 지배를 당한 한국이 무슨 이유로 저들에게 한국국민의 세금을 내야하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난민인권센터’ 게시판의 댓글)

 

어렵고 복잡한 문제에 당장 한 가지 답을 찾을 수 없다. ‘국민 너머’의 감각이 유독 약한 한국에서는 더 어렵다. 그러나 상대주의를 넘어 우리가 확인해야 할 마지노선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른바 ‘문명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 기본적인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세계인권선언에서 다시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바로가기). 냉엄한 국제 현실 때문에라도 냉소적인 반응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끝내 나아가야 방향이 대체로는 이럴 것이라는 공감대, 이 역시 또 다른 현실이다. 특히 이런 권리가 국경 안에서 국민에 대해서만 유효하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제14조)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하여 다른 나라에서 비호를 구하거나 비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1조)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제25조) 모든 사람은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사회복지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와, 실업, 질병, 장애, 배우자 사망, 노령 또는 기타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인한 생계 결핍의 경우에 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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