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추석에, 지역 불평등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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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과 만남은 불평등을 몸과 마음에 새로 새기는 계기가 된다. 막 지난 추석에 벌어졌던 ‘민족 대이동’도 그랬을 것이다. 3천 2백만 명이 이동하고 서로 만났으니 왜 그러지 않았겠는가. 다른 어떤 것보다, ‘귀성’과 ‘귀경’이 압축하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를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을 터.

개인의 변화가 시간을 통해 드러난다면, 불평등이라는 집단(사회적) 현상은 주로 공간을 통해 드러난다. 귀향은 많은 사람에게 개인의 변화, 예를 들어 누가 얼마나 더 부자가 되었고 또 다른 누구는 얼마나 더 나이가 들었는지를 확인하는 기회다. 개인 ‘안’에서의 비교와 반성을 피할 수 없다.

‘재사회화’는 개인에 그치지 않는다. 명절이라는 의례, 그리고 재회를 통해 다른 공간에 사는 누군가의 삶이 나와 얼마나 다른지를 인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대상에는 물질과 정신, 삶의 양식이 모두 포함된다. 개인 ‘사이’에서 일자리와 돈벌이, 집, 교육 따위는 물론이고, 삶의 보람과 미래의 가능성도 저절로 드러난다.

공 간의 차이는 집단의 삶과 그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개인을 넘어 한 단계 더 추상화되어야 한다. 개인의 변화에 비해 바로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개인이 사회적 존재인 한, 결국 비교를 통해 격차를 인식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서도 지역 불평등은 가장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의 격차다.

지역 간 차이는 특히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차이를 가리킨다. 말도 여러 가지다. 불균형, 불평등, 불균등, 격차 등등. 조금씩 다르지만, ‘지역’ 사이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불평등 현상을 가리킨다. 추석을 계기로 다시 불려 나왔지만, 오래되어 어느 정도까지는 이미 내재화된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보자. 조명래 교수는 영호남 격차로 상징되는 구지역격차(불균형)와 비교하여 1990년대 이후 현재를 신지역격차(불균형)로 표현하는데, 지역 불평등의 새로운 양상은 정치, 경제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민주화와 지방자치제의 실시 및 경제구조의 첨단화”의 결과라는 것이다(이정우, 이창곤 엮음.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 후마니타스 펴냄.).

“새 로운 격차 혹은 불균형은 경쟁력이 있는 수도권과 그렇지 않은 비수도권으로 나누어지는 ‘광역적 지역 간 격차’, 생활 관계나 개발 가치가 장소 간에 분화되고 차등화되는 ‘미시 지역 간 격차’ 등 다층적 양상을 띠고 있다. … 새로운 공간 격차의 이면엔 하나같이 권력의 탈중앙화와 지방화, 그리고 신자유주의화의 논리가 깔려있다. 새로운 격차 양상이 본격 등장한 것은 1998년 IMF 위기 이후다. IMF 위기를 거치면서 그동안 줄던 지역 간 격차도 다시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의 공간적 반영이라 할 수 있다.”(245쪽)

지 역 간 격차가 신체를 통해 실현된 것이 바로 건강 불평등(격차)다. 소득과 교육, 문화의 불평등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데에 비해, 이들 요소가 작용한 결과인 질병과 사고, 장애, 사망은 눈에 보이고 직접 경험할 수 있다. 건강 불평등이 다른 불평등의 분명한 증거인 셈이다.

지역 간 건강 불평등은 어떤 지표로 보더라도 뚜렷하고 일관된다. 마침 최근 출간된 책에서 해당 부분을 인용한다(김창엽, 김명희 외, <한국의 건강 불평등>,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총 사망률이 가장 낮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와 가장 높은 전남 신안군의 격차는 10만 명당 286명에 이르며, 상위 10개 지역과 하위 10개 지역의 상대적 격차는 최대 2배에 달한다. 상위에 오른 지역들은 사회경제적 수준이 높은 곳들로 수도권과 신도시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위권은 부산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 단위의 농촌지역들이다. 이러한 양상은 3대 사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125쪽)

질병과 사망, 장애는 개인에게 나타나지만, 더 많이 아프고 더 빨리 죽으며 더 심한 장애를 갖는다는 것은 집단 사이의 비교결과, 즉 사회적 현상이다. 태어나고 사는 지역이 다르다고 해서 사망률 격차가 두 배다! 어떻게 개인의 탓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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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현상으로서의 건강 불평등은 온갖 종류의 불평등이 집약되어 신체를 통해 실현된 것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 지역에 따라 다른 정도의 “박탈과 물질적 결핍, 혹은 포괄적인 사회적 배제”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보건의료 자원(의료인력이나 시설, 재정)의 지역 간 차이, 건강행태, 사회문화적 요인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건강 불평등을 비롯한 지역 불평등 문제는 새롭게 제기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물음도 지루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문제와 물음은 묵은 것이지만, 해답과 노력은 아직도 그저 그런 수준에 머문다. 오히려 후퇴하는 징후도 보인다.

 

한 가지 새로운 것이 있다면, 문제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다. 2000년대 이후, 본격적인 신지역격차(불균형)의 시기에는 문제 자체를 부인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시기적 특징으로, 지역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이유와 문제를 부인하는 이유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경쟁하고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때라는 것, 그리고 좁은 땅에서 지역을 구분하고 격차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뿐 아니라 경쟁력을 훼손한다는 것.

정책에서는 포기한 분위기가 더 확연하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수도권에 대한 규제는 온갖 이유로 조만간 무력화될 것으로 보인다. 학생 수가 적다고 앞다투어 캠퍼스를 옮기는 대학은 정부와 정책의 무력함이 드러낸 한 가지 결과일 뿐이다.

건강과 의료도 다른 것이 없다. 공중보건의는 줄어든다는데, 농어촌 지역에 의사를 확보할 어떤 대책이 있는지 모르겠다. 분만취약지 지원사업을 한다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참고 기사).

 

다시 생각해도 삶의 방식과 사회의 작동 원리를 다시 짜지 않으면 어렵겠다. 지역균형 ‘발전’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경제성장이라는 전통적인 의미라면 뾰족한 해답이 없다. 국가와 지역 수준에서 발전의 새로운 틀과 방향을 모색하는 길 말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여기서 다시 정치를 불러낸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익숙한 지향은 말할 것도 없고,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에서 ‘참살이(부엔 비비르, Buen Vivir)’를 모색하는 것도 정치의 힘이자 역할이 아닌가. 정치는 현실의 평화와 연관되지만, 또한 꿈과 희망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실천이다.

 

정치의 한 부분인 현실 정치까지 가보자. 지역 불평등 문제를 두고는 마침 인구 과소지역 선거구를 논의하는 우리의 딱한 사정이 밟힌다. 농어민의 대표성을 내세우다니, 지금까지 무슨 역할을 했다고 갑자기 대변자 역할을 자처하는지 착잡하다. 지역 불평등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을까? 당위적 역할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더 아득하다.

다만 한 가지. 현실과 삶이 있는 한, 멈추거나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정치의 도덕이자 의무라는 점에 기대를 건다. 선거구를 지키느라 오랜만에 진정성이 있어 보이는 국회의원들에게 부탁한다.

그 알량한 선거구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지역 불평등을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라. 당신들이 대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 그 열정이면 (적어도 현실 정치에서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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