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데도 ‘새해’라고 부르는 것이 꼭 좋을까. 갑자기 새해를 따질 일이 아니라, 매일 새로워진다는 뜻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옳다는 주장이다.
그의 말대로 새해조차 상품이 된 것처럼 보인다. 물건값이나 공공요금 인상, 다시 시작하는 일 년의 계약, ‘2016’이라는 숫자가 박힌 수첩,…혹시 세상과 우리의 삶은 일 년 단위로 쪼개져 팔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을 허구라 할 수는 없다. 시간과 진보 모두 근대 이후에 구성된 개념이라는 말이 옳겠지만, 그리하여 상당 부분 상품이 된 것이 맞겠지만,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은 그 개념에 영향을 받고 스스로 삶을 다시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 모든 반론을 무릅쓰고 새해는 실재하는 ‘리얼리티’다.
이번 <서리풀 논평>으로 2016년 한 해를 다짐하는 계기로 삼는다. 다만, 우리는 그 무엇이라도 새로움을 보태야 상품을 넘어 실재하는 진보의 뜻이 살아난다고 생각한다. 더 넓고 정확한 이해와 새로운 실천이 ‘우일신’하려는 핵심이다.
다짐을 말하기 전에 정치사회적 환경 한 가지를 먼저 지적해야 하겠다. 많은 사람이 예상하는 대로, 2016년 전반기는 현실 정치, 좁게 보면 총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좋은 싫든 거부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한다.
객관적 환경이라 했지만 희망과 요구가 왜 없을까. 우리는 정당을 매개로 한 현실 정치가 제대로 ‘정치적’이어야 함을 늘 주장해 왔다. 먼저, 현실 정치는 이념과 지향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가 말한 대로, 정당이 공직자를 선출하는 데 머무를 뿐 정책강령을 수립하고 실현하지 못한다면 시민은 절반의 주권자일 수밖에 없다(<절반의 인민주권>, 현재호, 박수형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그런 점에서 ‘실용’의 오용과 남용을 경계한다. 이념과 정책강령을 실천하는 방법 또는 접근이라면 모르되, 당선과 의석을 위해서는 이도 저도 다 괜찮다는 의미라면 본말이 바뀌었다. 실용의 결과가 무의미하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국회의원이 되어, 또는 다수당이 되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달리 보면 정당정치와 총선은 ‘대표체계’를 둘러싼 경쟁이다. 대표체계의 핵심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이고, 이는 이념과 정책에 반영되고 또한 이를 통해 실현된다. 다가오는 총선은 마땅히 이에 충실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어느 정당인들 어떤 이 또는 어떤 희망을 대표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희망이라면, 좀 더 나은 대표체계로 한 걸음만이라도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주어진 조건을 넘어, 올 한해 우리는 깊어지는 불평등 현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이에 저항하는 권리를 주장, 실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주된 관심인 건강에 적용하면 건강 불평등과 건강권이 핵심 표적이다(현실의 불평등과 권리는 앞서 말한 정치와 대표체계를 통해 반영되고 실천되며 교정된다).
2016년, 사회 불평등은 더욱 나빠질 것이 명확하다. 불평등 자체도 문제지만, 그것이 꼼짝 못하고 굳어지는 것, 고착화, 구조화가 정말 걱정스럽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금수저, 흙수저 논란은 이런 사회경제적 사정을 한발 앞서 포착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경제성장 둔화, 일자리 정체, 가계 부채, 소비 절벽도 문제지만, 신앙처럼 작동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사회경제 정책이 사정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있다. 이른바 ‘노동 개혁’과 ‘의료 산업’에서 보는 대로다. 더 유리한 시장과 불리한 복지,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신자유주의적 국가 개입은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듯이, 이길 수 있다는 이성적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문명화된 사회”라면 그래야 한다는 “윤리적 이유” 때문에 물러설 수 없다(<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홍지수 옮김, 봄아필 펴냄). 온갖 불평등, 그리고 그것을 변명하는 모든 종류의 조건에 도전하는 실천의 근거는 권리, 인권, 건강권이다.
인권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로, 자격과 잘잘못을 가리지 않는다. 인권은 자본주의의 생존과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가 아니며 사회 불안을 줄이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대중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는 더구나 해당 사항이 없다.
꼭 우리의 관심사여서가 아니라, 건강권은 가장 적극적인 권리에 속한다. 유엔의 사회권 규약이 정한 건강권은 “성취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누릴 권리”를 말한다.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으면 다른 인권도 전진한다는 점에서, 건강권은 한 사회가 누리는 인권의 잣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누군가가 불평등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인권과 건강권을 주장할 것이다. 어떤 이들이 복지의 후퇴를 설득하려 한다면, 우리는 교육과 주거, 사회보장에 대한 기본권으로 맞설 것이다. 그 어떤 집단적 가치(특히 국가주의적 가치)도 좋은 삶에 대한 기본권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가능한 것 이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정정훈이 말한 대로, 우리가 주장하는 권리(인권)와 현실의 권리(인권) 사이에는 언제나 너른 틈과 긴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인권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권리, 절대적 이념으로서 ‘인권’을 집요하게 고집하는 정치적 실천”이다(<인권과 인권들>, 그린비 펴냄).
2016년 한 해, 우리는 비현실적인 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모든 인권의 확장을 위해 그리할 것이나, 특히 건강과 보건의 불평등에 맞서 끈질기게 건강권을 주장할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