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총선 이후,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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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총선 결과를 생각한다. 집권 여당의 참패,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들’만 모르고 다들 예상했던 것인가. 개표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니 이제는 ‘후(後)견지명’도 난무한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결과를 일부러 낮추어 비틀 필요는 없다. 그동안 정부 여당이 해온 일을 심판했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럴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4월 16일 2주기를 지난 세월호 사고만 해도 그렇다. 사고 수습도 수습이지만, 지금껏 ‘국가’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일로 버텨왔다. 당사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욕하고 조롱했다(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실정’을 말하다 보면, 국정교과서며 남북관계, 경제와 일자리 대책도 저절로 떠오른다. 담뱃값 인상에 기댄 세수 확대에 원격의료와 의료 수출을 앞세운 경제성장이라니. 마치 자기만 아는 비법인 양 의심과 반대를 가르치려 들었다. 비록 후견지명일망정, 심판은 당연하다.

 

총선 결과는 앞날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당의 오만한 전횡을 막을 수 있으니, 보통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특히 핵심 ‘개혁’ 과제라고 소리를 높인 노동개혁을 주목한다. 일자리는 그대로인데 비정규직과 파견만 늘릴 ‘사이비’ 개혁을 바로잡아야 한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서비스법)도 ‘정상화’되길 바란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서비스 산업 육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동형’ 정책이라고 주장해 왔다 (바로가기). 앞으로도 이 법이 필요하다고 우기겠지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혹시 몇 가지라도 좋은 쪽으로 변화할 수 있다면, 특히 법이 그렇다면, 총선이 만들어낸 새로운 의회 권력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더 달라지는 것, 그리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그 파급효과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번 선거가 ‘부분적’ 성취를 넘기 어렵다고 본다. 권력의 횡포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약간의 힘을 보였을 뿐, 새롭고 적극적인 대안은 정체하거나 오히려 후퇴했다. ‘징벌적’(그런 의미에서 회고적인) 투표는 통했는지 모르지만, ‘대안적’ 투표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도 없다. 그나마 대안을 말하는 소수파 정당들이 무슨 성과를 낼 수 있었나. 국회의원 몇 명이 당선되었는가는 두 번째 문제다. 몇몇 신생 정당은 시간이 없었다 치더라도, 그동안 나름 노력해온 노동당과 녹색당조차 공론장에 진입하지 못했다. ‘진보’와 ‘보수’의 균형추는 말도 꺼내지 못할 형편이다.

거대 정당 안을 들여다봐도 곳곳에서 정체와 퇴보를 발견할 수 있다. 도무지 무너지지 않는 지역 구도를 빼고도 그렇다. 지역을 발전시킬 힘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당선된 부적격 인사가 어디 한둘인가. 지역 권력을 대변할 뿐인 ‘토호형’ ‘유착형’ 국회의원이 더 늘어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 큰 성과라고 자족하기에는 적이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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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결과가 바로 미래다. 의회 권력(또는 그 구도)이 바뀔 것이라고는 하나 진정한 변화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주류 언론이 군불을 때는 것처럼, 절대 다수당이 없어서 대결과 갈등이 심해질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과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시비가 잦아지면 혼란이고 지체인가?

벌써 대화와 타협을 주문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만의 시각이다. 갈등이 기껏 국회의장을 어느 당이 하고 상임위원장은 누가 차지하는지를 두고 다투는 것이라면, 그런 이해는 참으로 안이하다. 대통령이 여러 정당 대표를 자주 만나야 타협의 정치가 가능하다는 참견도 소박하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에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곳곳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이해관계의 갈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20대 국회는 이를 대표할 수 있을까? 거리와 광장, 논밭과 공장, 시장의 날선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

거듭 생각해도 확신하기 어렵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앞으로 국회의원과 정당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메시지가 혼란스러운 것이 첫째다. 당선자와 정당은 당장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다시 당선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당 지지도를 올리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의식하며 움직여야 하는지, ‘시그널’은 유례없이 희미하다. 국회에서 정책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 지역구를 관리하는 것, 거대 권력에 줄을 서는 것, 그 어느 것도 다음 당선을 보장하지 않는다. 전에도 어느 정도는 그랬지만 이번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설사 과거보다 나아졌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느 분야 어떤 일이든, 평가기준이 명확한 것만큼 강력한 시그널은 없다.

 

얼마 전 각 당의 공천과 선거운동, 그리고 그 후의 결과를 이어서 생각해보면 더욱 혼란스럽다. 여러 정당의 이념은 더욱 희미해졌고, 정강정책은 대체로 수렴한다. 게다가 공천 과정에는 전례 없을 정도로 ‘자의성’이 개입했다. 그나마 명맥만 남아있던 정당의 정체성은 거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지역구와 정당 투표의 기준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다. 모두가 말하는 지금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는다. 불평등과 그 구조는 제대로 거론하지도 못했다. 노동개혁이니 서비스법, 의료 영리화 정책도 형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 되지 않는 거대 권력과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대변한 사람들이 (마치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국회에 다시 들어왔다.

작게(?) 봐도 정치와 투표의 관계는 느슨했다. 세월호 유가족을 모욕하고도 거뜬히 당선되었고, 성적 소수자의 인권을 공공연히 침해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들이 다음 당선을 위해 생각과 태도를 바꿀 리 만무하다. 지금 이 시각, 정치적 이해관계를 생각하는 당선자와 정당은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 마당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아마도 길을 돌아 국회(정당과 국회의원을 포함하여)를 압박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국회의원과 정당이 혼란스럽다는 것은 그만큼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대선을 앞두고 있으니, 이 또한 기회다.

먼저, 투표 곳곳에 숨겨진 정치적 의미를 되살려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되돌려 유권자의 것으로 삼으면, 총선 결과는 ‘전취(轉取)’ 된다. 그들이 얻은 표가 아니라, 우리가 투표한 것으로 바꿔내자는 것이다. 세월호, 성적 소수자의 인권, 노동개혁, 서비스법, 의료영리화가 모두 마찬가지다.

다음 투표 때까지는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서 대의제 기구를 보완하는 것이 과제다. 이는 다시 다음 선거로 이어질 것이다. 원내 정당이 아니어도, 그리고 정당이 아니어도 괜찮다.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자신을 알리고 역량을 보이는 것이 2년 뒤, 4년 뒤 성과로, 그리고 우리의 결과로 연결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지나친 기대도 절망도 하지 않는다. 이제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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