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청년수당 반대는 ‘도덕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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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하겠다는 청년수당을 보건복지부가 반대했다. 놀랍지 않다. 진작 반대 의견을 냈고, 사전에 ‘경고’까지 했던 일이다. ‘전과’도 있다. 작년(2015년)에는 경기도 성남시가 하겠다는 공립 산후조리원을 무산시킨 실적이 있지 않는가.

 

우리는 반대했다는 것 그 자체보다 무슨 이유를 앞세웠는지 ‘명분’에 주목한다. 그 명분이란 이 정부의 철학과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니, 꼭 이번 일뿐 아니라 복지와 사회정책의 기조를 나타낸다. 나아가 단순히 정권 차원을 넘어 이 ‘체제’의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서울시의 청년수당에 반대하는 첫째 이유는 이 사업이 ‘도덕적 해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8월 2일의 보도자료는 “서울시 청년수당에 대한 정부 입장”이라는 제목이다. 보건복지부 한 부처가 아니라 중앙정부 전체의 공식 입장이라는 것을 뜻한다.

 

“청년수당처럼 구직활동을 벗어난 개인 활동에까지 무분별하게 현금을 지급하는 것은 도덕적 해이를 초래하고, 서울시 청년수당은 자기소개서에 기입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지출항목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으로써, 예를 들어 관광가이드 희망자에게 개인관광비용 지급, 음식점 창업, 요리사 희망자에게 식사비, 맛집 탐방비 지급, 프로그래머 희망자에게 pc방 이용비용, 게임비 지급 등도 가능할 수 있음.”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그 유명한 ‘포퓰리즘’ 논리다. 어떤 주장이나 제안, 지방정부가 하는 일을 두고 정부 부처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보건복지부가 용감하게 이런 말을 쓰는 것을 보니, 행정부가 노골적인 정치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거나 압력을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보도자료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옮긴다.

 

“정부가 우려하던 무분별한 현금살포 행위가 현실화 된 것이며, 청년의 어려운 현실을 이용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무책임한 포퓰리즘적 행위임.”

 

청년수당이 현실 정치가 된 마당에 여당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 논리는 정부의 보도자료와 판박이다.

새누리당은 ‘청년수당이 도덕적 해이를 부른다’는 정부 측 입장에 공감하면서 이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했다. 새누리당 지상욱 대변인은 3일 논평을 통해 “서울시 청년수당은 대다수 성실한 청년의 꿈과 의욕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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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해이’와 ‘포퓰리즘’의 칼은 익숙하다. 어디 정부·여당만 그런가, 일부 학자와 언론도 입에 달고 살기는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오용되고 남용되는 경우가 태반이니, 빈곤한 논리를 가리려는 안이한 습관이거나 수준 낮은 선동이다. 그런 의도라면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말을 되돌려줘야 한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권고한 대로라면 ‘코끼리’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하지만(<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유나영 옮김, 와이즈베리 펴냄), 다른 코끼리를 생각하기 위해서 코끼리 이야기를 해야겠다. 도덕적 해이와 포퓰리즘을 다시 생각하자.

 

우선 ‘포퓰리즘’. 정부가 무슨 의도로 이 말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길게 논박할 것이 없다. 일반 대중이 좋아하는 정책이라는 뜻이면 마땅히 그런 정책을 해야 할 일이고, 표를 얻기 위한 것이란 뜻이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중과 유권자를 바보로 보지 않은 다음에야, 정부는 마땅히 포퓰리즘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종합’과 ‘장기’가 아니라 ‘일부’ 계층에 ‘단기’를 뜻하는 것이면, 그 뜻 그대로 지금 정부에 되묻는다. 일부에다 단기라도 좋으니 청년실업 대책을 내놓으라고. ‘삼포’ ‘오포’의 청년들에게 그나마 최소한의 기초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지방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른 대안도 없이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용기가 놀랍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도덕적 해이’라는 비난이다. 이 말이 본래 무엇을 뜻하는지는 학술적 정의를 달달 외운 학생들이 더 잘 안다.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이라는 학생용 참고자료에 나와 있는 설명을 보자.

 

“‘도덕적 해이’를 뜻하는 모럴해저드(Moral Hazard)는 원래 보험시장에서 사용됐던 용어이다. 화재 보험에 가입한 보험 가입자가 보험에 들지 않았더라면 당했을 화재 예방에 대한 주의 의무를 게을리 함으로써 오히려 화재가 발생하여 보험 회사가 보험료를 지불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의 용법은 본래 뜻에서 벗어난 지가 오래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할 바가 있다. 도덕적 해이의 ‘도덕’은 사람과 행실, 양심과 악행의 그 도덕이 아니라는 점이 그 중 첫째다(자세한 교과서적 내용은 ‘클릭’ 몇 번으로 쉽게 찾을 수 있다). ‘도덕’이란 말이 잘못되었으니 다른 말로 바꾸자는 주장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 도덕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화재 보험에 가입하고 난 다음 예방을 게을리했다는 것이 도덕이면, 누구의 시각에서 도덕을 판단하는가?(도덕적 해이의 이념적,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링크된 논문을 참고할 것.)

백 걸음을 양보해도, 도덕적 해이가 강조하는 도덕은 강자와 권력자의 논리다. 화재보험을 드는 이유가 걱정을 덜 하고 안심하고 좀 더 편하게 살자는 것이 아닌가? 약자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비도덕이라 비난하는 것은 강자의 논리다.

정부가 ‘도덕적 해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고 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몸과 마음에 익은 이 시대의 정치적 실천 방식이라는 점이다. 지식과 이해가 있든 없든, 습관이든 아니든, 이 말은 의도적으로 동원되었고, 초점은 ‘도덕’에 맞추어져 있다. 예를 들어, 서울시장의 도덕(예를 들어 ‘정치적 의도’나 ‘대선용’), 그리고 돈을 타 가겠다는 청년들의 도덕(예를 들어 ‘식사비’ ‘맛집 탐방비’ ‘게임비’).

 

복지부의 반대로 청년수당 지급이 중지되자 학원등록 계획을 어떻게 하느냐는 혼란이 곳곳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현실이 이럴진대, 도덕적 해이의 예로 맛집 탐방과 PC방을 거론하는 의도는 악의적이다.

 

우리는 서울시의 제한조차 없애야 한다고 본다. 창업을 위해 맛집 탐방이라도 할 수 있으면 그게 어딘가, 출발도 할 수 없는 청년이 수두룩하다. 먹고 살아야, 단칸방 집세라도 낼 수 있어야, 병이라도 나아야, 취직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청년에게 청년수당이란 무엇일까.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을 받아, 몇 년 만에 처음 과일을 사 먹었다는 청년의 지출을 우리는 차마 도덕적 해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도 술과 노름으로, 또는 게임으로 날리지 않을까 믿을 수 없다고? 꼭 실무적인 답을 구한다면, 인도에서 기본소득을 실시하고 난 후 벌어진 일이 교훈이라고 하고 싶다. 또는, 기본소득(사회적 배당)이 ‘권리’라고 생각하면 어떤가? 권리는 자격(특히 도덕적 자격)과 ‘응분’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도 함께.

 

도덕적 해이라는 말로 도덕을 오용, 남용하는 중앙정부의 행태는 공공과 정부의 ‘도덕’에 반(反)한다. 좁게 봐도 넓게 봐도 비도덕적이다. 더구나 공공연히 설파하는 논리에 다른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특히 부정적 의미의 포퓰리즘적 행동이라면? 참 ‘나쁜’ 정부다.

 

스스로 “사회보장기본법에 따른 협의·조정제도는 중앙과 지방간 조화롭고 균형 있는 사회보장제도의 운영을 통해 국가 전체의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라고 했으면, 중앙정부가 해야 할 도덕적 의무는 따로 있다. 특히 두 가지. 하나는 제도 자체의 품질 향상,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역간 불평등 해소.

 

우리는 정책으로서의 청년수당이 많은 한계와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충분히 ‘실험’할 가치가 있고, 그 결과에 따라 좋게 고칠 수 있는 정책이라고 판단한다. 더 생각할 것은 많다. 무엇을 목표로, 누구에게,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청년수당(또는 배당) 제도를 해야 하는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정책인가, 또는 중앙정부가 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지방 정부도 실행할 수 있는가.

 

수많은 의문이 있는 것이야 어떤 시도도 마찬가지다. 그중에는 지방정부가 풀어야 할 질문도 있지만, 중앙정부가 고민할 과제도 많다. 예를 들어 자치단체의 경계를 넘어 청년이 이동하는 문제. 문제를 푸는 첫 단계로 ‘시범사업’을 하겠다는데, 협력하고 돕는 것이 중앙정부의 도덕적 의무다.

또 있다. 여건이 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면, 그 격차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야말로 중앙정부가 해야 할 (결정적) 역할이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전국이 같이 갈 수 있게 좀 더 준비하자고 했으면, 보건복지부의 말을 진심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면, 대안을 내놔야 한다. 중앙정부는 서울시의 청년수당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청년들의 어려움에 대한 긴급한 처방의 하나로 선정자격을 갖춘 장기 미취업 청년들에게 6개월 범위에서 월 50만원의 활동지원금을 지원해 구직 등 청년들의 사회진출을 돕고자 하는 취지”에 반대하지 않으면, 더 좋은 대안을 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냥 안 된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라. 그것이 정부가 정말 긴장해야 할 도덕적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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