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복지국가 건설의 경험과 교훈 – 독일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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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건설의 경험과 교훈 – 독일의 사례

 

박근갑 (교수, 한림대 사학과)

 

 

지난 11월 14일(월) 오후 7시 30분부터 우리 연구소에서 박근갑 교수님(한림대 사학과)을 모시고 “복지국가 건설의 경험과 교훈 – 독일”이라는 주제의 특강을 개최하였습니다. 우리 세미나 실을 꽉 채운 수강생들의 열기와 교수님의 열의가 합쳐져 2시간 30분이 넘도록 진행되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박근갑 교수님이 직접 작성해 주신 강의 요약문입니다. 강의해주시고 이렇게 요약까지 해주신 박근갑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이 강의는 ‘독일 모델’을 사례로 복지국가의 역사적 성격을 밝힌다. 다음 두 가지 주제가 이야기의 얼개를 이룬다.

 

그 첫째는 이 시대의 첨예한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복지비용’의 문제를 역사적 줄기에서 다루는 과제이다. 사회보장은 좌편향 이념의 산물인가? 그것은 경제성장의 짐인가? 그 제도는 낭비와 게으름의 온상인가? 이 분분한 질문들은 오늘날 재편성의 압력에 시달리는 복지국가의 위기를 둘러싸고 있다. 전후 ‘황금시대’를 노래했던 성장과 분배와 완전고용의 합주곡은 이제 실제로 어느 곳에서도 울리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그 위기의 진원이 명백히 밝혀진 적도 없다. 그것은 시장의 실패인가, 아니면 잘못된 복지 프로그램인가? 분명한 점은 이미 복지국가 형성기에 비용과 효율을 둘러싼 논란이 시작했으며, 그럼에도 아직까지 사회보장을 능가하는 대안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줄기에서 이 강의는 ‘더 많은 시장’과 ‘더 많은 국가’ 사이의 논쟁이 선진 복지체제에 이르는 학습과정이었다는 점을 밝힌다.

 

그 다음은 현대 복지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시민권의 지평에서 오늘날 첨단의 정치현상을 상징하는 협상민주주의(Verhandlungsdemokratie, consensus democracy)의 기원을 조망하는 과제이다. 이 정치 모델은 승자독식의 다수결 민주주의 내지는 다원 민주주의(plural democracy)와는 달리 국가를 통하여 정형화된 집단적 참여기구 속에서 상이한 이해집단들의 협상정치로 중요한 정책과제를 해결하는 제도의 총 개념이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사회협약 지수가 높은 국가에서 사회보장의 성과가치도 높게 나타난다는 점이 일반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복지정치와 협상정치의 유기적 관계가 복지국가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하나의 이념형(ideal type)을 설정할 수 있는데, 다음의 두 가지 명제가 그 역사적 추론을 이끈다. 1) 사회적 협약에 참여하는 행위주체들의 응집력은 제도적으로 보장된 ‘자치행정 자율권’의 정도에 따른다. 2) 협상기제를 수용하는 노동계급은 계급투쟁의 노선에서 이탈한다. ‘독일 모델’을 형성하는 몇 가지 역사적 사례를 보자.

 

 

1. 1880년대에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독일의 사회보험은 “세계사적으로 사회정책의 방향을 바꾼” 사안이었다고 부를 만큼 잘 짜인 연대보장성의 귀감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그 ‘최초의’ 복지입법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Otto v. Bismarck)의 이름으로 탄생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독일제국에서 독특했던 지배정치의 산물로 여기는 의견들이 아직도 여전하다. 비스마르크는 실제로 1881년에 처음으로 발의했던 산재보험 입법안에 “무산계급의 요구와 이익에 봉사하는” 공적 보험제도 수립이 곧 “인륜과 기독교의 의무이자 국가를 수호하는 정치의 과제”라는 제안 설명을 덧붙였다. 이러한 도덕적 수사의 이면에는 통제와 포섭의 양날을 지닌 지배정치가 숨어 있었다.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재갈을 물렸던 사회주의자법의 ‘채찍’을 감내하도록 ‘사탕과자’도 필요하다는 기획이었다. 그러고는 약 10여 년 세월을 거치면서 건강보험법과 연금보험법이 뒤따랐다. 그의 치적 기간에 그토록 오랜 기간을 끌면서 수많은 수정제안을 거친 입법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이룩한 복지제도를 “의회와 고위관료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혹평할 정도로 그 입법 결과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는 만년에 자신의 치적을 꼼꼼히 기록했던 『상념과 회상』에서 사회보험만은 단 한마디 말로도 언급하지 않았다. 왜 그랬던가? 공적 사회보험이 자신의 뜻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자본과 노동이 함께 자치행정의 원리로 보험조합을 관리하는 “자율적인 유기체”가 그 입법의 핵심내용이었다. 그것은 곧 “이익공동체의 바탕 위에서 전향적인 사용자와 노동자가 연대하는 조직체”를 의미했다. 개혁적인 고위관료들이 발의했던 “조정하는 노동정치”의 원리가 비스마르크의 ‘국가사회주의’를 제치고 정당들의 동의를 얻은 결과였다. 그 기대지평에서 앞으로 협상민주의가 자라나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옛 신분제의 향수에 깊이 빠졌던 비스마르크의 지배정치가 어찌 미래지향의 복지정치와 대결할 수 있었겠는가.

 

 

2. 공적 사회보험이 독일에서 처음 탄생했듯, 독일 사회민주주의 또한 최초의 노동정당으로 등장했다. 비스마르크 지배정치의 대척점에 있었던 이 정파는 국가의 사회정책을 어떻게 보았던가?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의 이름이 복지정당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점에서 이 질문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본래 이 입법안의 원조이다.” 처음부터 독일사회민주당을 이끌었던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이 ‘비스마르크 사회보험’의 첫 번째 입법안이 국회에 올랐을 때 했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이 당의 많은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 ‘덕택에’ 복지정책이 가능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사회민주주의 복지’의 신화가 그렇게 만들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 말은 공적 사회보험을 철저히 거부했던 당의 공식 성명과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그 시절 내내 완강하게 거기에 저항했던 적대세력이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선출된 국회의원 가운데 그 누구라도 비스마르크의 사회개혁이라는 바보들의 천국에 넋을 빼앗기게 된다면, 그는 그 순간부터 사회민주당의 당적과 의원직을 동시에 상실하게 될 것이다.” 당 기관지에 실린 이 주장이 그 시대 사회민주주의의 기류를 압축한 듯 보인다. 그렇듯 사회민주주의 진영은 ‘완전한 자치행정’의 원리를 앞세워 공적 사회보험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정파가 제기했던 복지기구의 자율성 논쟁은 곧 ‘우리의’ 자치행정과 ‘그들의’ 자치행정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으면서 계급전선을 구획하는 의미론 투쟁이었다. 그때 내세운 저항의 수사는 옛 수공업 노동인력이 자율적으로 관리했던 상조기구의 기억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 바탕에 섰던 고립전선은 퇴행적이었다. 왜 이 편의 자치행정만 ‘완전’했을까? 옛 상조기구는 다가올 미래국가에서 어떤 기대와 일치할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자치행정이 전선의 경계를 넘어서 보편개념으로 발전할 때 비로소 사회민주주의 참여정치의 길이 열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 사회민주당은 공적 복지제도의 수호자로 변신했으며, 현대적 의미의 복지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어떠한 ‘새로운 경험들’이 다른 관점을 열면서 거기에 새로운 보편적 기대가 스며들어가는 계기들을 만들었던가? 이 질문을 밝히는 일이 이 강의의 핵심과제이다.

 

 

*) 참고문헌

박근갑, 『복지국가 만들기.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기원』(서울 : 문학과 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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