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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연구통] 자연재해의 트라우마, 물질남용으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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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영펠로우 박여리

 

9월 12일 경주에서 발생한 진도 5.8의 지진은 한국 사회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한반도만큼은 지진의 안전지대라고 생각해왔던 통념이 무너졌다. 적절한 후속 조치 없이 여진만 500회 이상 계속된 채, 경주 인근 지역 주민들은 지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서리풀 논평: 지진까지 보탠 ‘위험 사회’)
많은 학자들과 언론은 피해지역 주민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이하 PTSD)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정부는 경주지역 피해자들에 대한 심리치료를 포함한 종합적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경주지역 뿐만 아니라 인근 포항, 대구, 울산 등지의 주민들 역시 지진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자연재해의 트라우마에 대처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시스템은 여전히 부재하다는 지적이다. (☞관련 기사: 지진 트라우마 컨트롤타워 마련 시급)

지난 10월, 미국의 ABC news는 자연재해가 물질 남용 장애(substance abuse disorders)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관련 기사: Natural Disasters May Increase Substance Abuse Risk, Study Finds) 기사에서 소개된 Moise와 Ruiz의 연구는 2005년 8월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하여 300만 명 이상의 이재민과 1883명의 사망자를 낸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에 관한 것이다. (☞관련 자료: Hospitalizations for Substance Abuse Disorders Before and After Hurricane Katrina: Spatial Clustering and Area-Level Predictors, New Orleans, 2004 and 2008)

연구진은 루이지애나 주 보건당국의 병원 자료를 바탕으로, 2004년(카트리나 이전)과 2008년(카트리나 이후) 뉴올리언스 내 물질 남용 장애로 인한 입원율을 비교하였다. 그 결과 2004년에는 1000명 당 7.13명이었던 입원 환자 수가 2008년에는 1000명 당 9.65명으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연구진은 “많은 사람들이 카트리나 이후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카트리나 이후 많은 사람들이 타 지역으로 이주한 것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설명하였다.

연구진은 또한 카트리나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간 격차에 주목하였다. 2000년(카트리나 이전)과 2008년(카트리나 이후) 뉴올리언스 인구조사 자료와 2005~2009년 미국 지역사회 조사 자료를 기반으로, 물질 남용 장애로 인한 입원율이 지역별로 군집을 이루는지, 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였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군집 분석(cluster analysis)을 실시하였다.
또한 지역별 피해 정도(침수 깊이), 손상 복구율(손상된 건물의 잔존 정도), 타 지역으로의 주민 이주율(2005년부터 2009년까지 가구 수 변화), 사회경제적 수준(인종, 가구 중위 소득, 인구밀도, 공공부조 수급 비율, 빈곤선 이하 인구 비율) 등을 고려한 회귀분석을 통해, 카트리나 이전과 이후 입원율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 특성을 확인하였다.

‘그림 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동쪽 지역 위험군의 경우 카트리나 이전에는 나머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위험도(상대 위험도 0.36)를 보였으나, 이후 군집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많은 인구가 피해지역을 떠났기 때문이다.
기존에 상대 위험도가 높았던 지역은 카트리나 이후에도 높은 위험도가 유지되는 경향을 보였지만, 군집은 사라지고 흩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 상당한 위험도 증가가 관찰되었다. 2004년 이 지역의 상대 위험도는 1.77(연보라색) 이었으나 2008년에는 소 지역별로 11.91(짙은 주황색), 23.38(연보라색), 심한 경우 831.23(짙은 보라색) 까지 증가하였다.

[그림 1]

▲ 2004년(왼쪽, 카트리나 이전)과 2008년(오른쪽, 카트리나 이후) 뉴올리언스의 물질 남용 장애로 인한 입원율의 상대 위험군 분포도. 청색 사각형은 상대적으로 낮은 위험군을, 적색 사각형은 높은 위험군을 나타낸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

각 지역별 특성을 고려한 회귀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카트리나 이전과 이후 모두, 빈곤율이 높은 지역에서 물질 남용 장애 입원율이 높게 나타났다. 둘째, 카트리나 이후, 주민들이 떠나지 않은 손상된 지역, 유색인 거주 비율이 높은 지역, 피해 정도가 큰 지역(평균 깊이 이상의 침수)에서 입원율이 높게 나타났다. 한편, 손상 복구율이 높은 지역은 낮은 입원율을 보였다.

이 연구는 재해 경험이 개개인들의 삶에 깊이 각인되어 보다 심각한 정신장애를 유발할 수 있고, 지역사회 해체까지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위험이 자연적이거나 무작위적으로 분포하기보다는, 사회경제적으로 불평등하게 분포한다는 점도 드러낸다.

이미 적지 않은 경주 시민들이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관련 기사: “작은 소리에도 떨려요”…경주 지진 트라우마 상담 500여 건) 카트리나의 사례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재해 대처 시스템이 온전하게 구축되어 있지 않은 상황. 카트리나의 경험은 한국에서도 예견되는 미래이자 이미 현실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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