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상황과 모든 것이 비슷하다. 광우병 소고기 이야기다. 근본에서는 정부의 대응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니, 모두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당연하다. 비슷한 말로 반대하고 설득해야 하니 참 답답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식에 속하는 말을 길게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부가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데에는 사실 전문적인 지식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우선 검역과 수입을 중지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 다음에 안전성을 점검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런 조치는 누가 보더라도 상식적이고 별로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정부(그냥 정부가 아니라 언론과 정당을 포함해서 “철의 삼각”이나 “철의 사각”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미련해 보일 만큼 허술한 논리와 무감각한 방식으로 버틴다.
< 광우병 발생을 보도한 워싱턴포스트 기사 >
왜 그럴까.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반복, 어쩌면 ‘조건반사’로 보이는 행동의 바탕에 있는 무의식에 가까운 동기이다. 몇 가지는 이미 지적되었던 것들이지만, 덧붙여 새로 볼 것도 있다.
첫째, 경제적 이익이 모든 사회적 가치를 압도하고 있다. 입으로는 국민건강을 말하지만, 미국과의 통상문제를 가장 중요한 이유로 내세우길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가치의 ‘전도(뒤집어짐)’는 이미 낯이 익다. FTA, 4대강, 영리병원, 의료관광이 모두 마찬가지다. 누구도 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혹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에 하나 건강에 문제가 있어도 통상마찰에 비하면 “경제적 손실”은 미미하다.“ 그렇다면 국익을 보호한다는 확신을 다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둘째, 잘 모르는 결과를 근거로 삼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과학’에 잘못 의존한다. 이른바 과학의 남용, 오용, 악용이다. 미국육류수출협회 대변인은 “이번 발견이 수출시장에 대한 접근 수준을 낮출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다”고 주장했고(한겨레신문 4월 26일),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도 29일 “광우병을 둘러싼 과학적 문제와 국제규범, 국제관행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연합뉴스 인터넷판). 한국과 미국 양쪽이 모두 과학을 근거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말하는 과학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생물학적 사실, 인과관계, 확률, 또는 비용-편익, 그 어느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양보하더라도 광우병의 과학은 아직도 논쟁 중이다. 누구도 100% 그렇다는 말을 못한다. 지난번 광우병 사태 때문에 유명해진 ‘사전예방원칙’에 비추어보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셋째는 아직 가설 수준이지만, 그렇지만 가장 중요하게,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세력의 ‘미국화’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미국화란 “미국의 다양한 제도와 가치가 …세계 각 지역에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지고, 그 결과 수용 지역에서 자발적이거나 강요에 의해 그러한 것을 베끼고 따라잡는 현상과 과정”을 말한다(『아메리카나이제이션』, 17쪽). 광우병 사태에서는 미국의 제도와 정책을 합리적인 것으로 볼 뿐 아니라 그 도덕적 기반과 사회적 반응을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광우병과 미국화를 연결시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니다. 26일 새누리당 이상일 대변인이 낸 논평은 이러한 혐의를 뒷받침한다. ≪내일신문≫ 4월 27일자 보도는 다음과 같다.
“이 대변인은 또 “내가 촛불집회 당시에는 미국에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매일 쇠고기를 먹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최근 국내의 광우병 우려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난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중앙일보 특파원으로 미국에 있었다. 이 대변인은 “미국 장관이 다른 나라에는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고) 말하고, 자기 나라에는 심각하다고 하지는 않을 게 아닌가. 일단 정부가 수입중단은 안하고 검역만 강화하자는 입장인 것 같은데 나름대로 정부가 미국의 이야기를 듣고 적절한 조치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정부입장을 두둔했다.”
26일 농림부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미국 대사관 관계자 얘기를 들어보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말도 근본은 비슷한 것 같다. 그의 말은 미국 대사관이 관련 사실을 투명하고 충분하게 전달했다고 믿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미국 대사관은 국익이나 미국 기업의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고 사실을 제대로 전달할 만큼 도덕적이다(!).
이들의 말에서는 스스로 강조해 마지않는 과학적 근거가 아니라, “미국이 그럴 리 없다”는 추정, 나아가 어떤 종류의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징후가 보인다. 여기에서 미국은 문명, 근대, 합리성 등으로 상징된다. 한국을 포함하여 미국화를 수용한 국가들은 후진, 전근대, 비합리로 대비될 것이다. 도축한 소의 0.1%만 검사하는 미국의 관리체계는 효율적, 합리적이지만, 살코기도 100% 안심할 수 없다는 한국 사람의 불안은 근거 없는 괴담이 된다. 그러니 “선진국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미국의 판단과 조치를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믿음, 이것이 현재의 정책담당자를 압도하는 가치체계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넓은 범위에서 정의하면, 앞의 세 가지 동기가 모두 미국화의 다른 모습이다. 또한 이들은 서로 맞물려 있기도 하다. 애당초 미국 소고기가 한국의 식탁에 등장한 것, 나아가 미국과의 통상이 한국인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처럼 된 일이 모두 미국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리고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그 미국화는 통상과 검역을 넘어 전사회적이고 전체계적인 것이다. 여당 대변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화와 가치, 심리까지 통합적으로 지배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환원주의적으로 미국화가 한국 사회가 가진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광우병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촛불시위의 정치적 트라우마가 정부가 지금 보이는 이상한 대응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화가 광우병 소고기 수입이라는 구체적 사건에도 넓고 짙게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아주 치우친 일부 사람을 뺀다면, 지나친 미국화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물론 탈-미국화가 당장 광우병 사태를 해결하는 해법이 될 수는 없다. 현실성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단지 어떤 국가를 ‘반대’하는 것으로 수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경향(이제는 이념 혹은 ‘아비투스’로 격상된)인 미국화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실천적, 실용적 의미를 가진다. 좀 더 주체적으로 광우병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참고
– 김덕호, 원용진 엮음. 『아메리카나이제이션』. 푸른역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