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과학기술에 대한 태도, 그 끈질긴 성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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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인사가 계속 불안하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과학기술 분야 인사는 ‘참사’라고 부를 만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에 기업인을 임명하고 황우석 사태에 책임이 있는 인사를 과학기술혁신본부장에 임명해 사고를 낸 것이 얼마 전이다.

 

이번에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지명자가 창조과학이니 역사관이니 하면서 말썽이다. 인사청문회까지 갈 수 있을지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이번 인사는 이미 개인 차원을 떠났다.

 

인사권자가 과학기술, 과학기술 정책, 과학기술 정책의 정책결정과 책임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졌는지 민낯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두 번 그런 것이면 우연이나 실수라고 하지만, 계속해서 그것도 한 분야에서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면 뭔가 원인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과학기술 분야 인사에 ‘헛발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경향신문>이 상세하게 분석했다(기사 바로가기). 기자는 참여 정부 시절 과학기술 정책을 잘 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 과학기술을 국가발전과 경제성장의 도구로 보는 박정희 시대 과학기술관의 답습,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세 가지 이유로 꼽았다.

 

 

 

인사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분석에 대해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인사인들 우연이나 실수라고 주장할 만한 일이 왜 없겠는가? 누가 추천을 했다, 인사 검증에 어떤 부분이 빠졌다, 우리도 잘 몰랐다,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다,…잘못된 결정은 많은 우연, 오판, 실수가 겹쳐서 나타난다.

 

그렇다고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가령 우연이거나 개인의 실수라 하더라도 체계(시스템) 수준에서 그것은 ‘무작위’가 아니다. 어떤 경향성은 맥락과 구조가 영향을 미쳐서 나타나는, 원인이 있는 결과이다. 실수지만 실수가 아닌, 체계 문제라고 해석하는 이유 중 한 가지.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의 상당수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인간은 주변 세계를 보고 기억하고 인지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구조적 편향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구조적 편향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조지프 핼리넌 지음, 김광수 옮김.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 문학동네 펴냄).

 

<경향신문>은 그 구조적 편향 중 하나를 박정희 시대 과학기술관의 전승 또는 답습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뿌리가 그보다 더 넓고 깊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영역의 가치와 의미, 결정, 실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성장주의’다.

 

성장주의에서 ‘성장’은 단연 경제 성장을 뜻하지만, 이미 대부분 영역은 ‘경제화’했으므로 굳이 경제에 한정할 필요도 없다. 정치, 사회, 교육, 문화, 보건의료, 어느 것 할 것 없이 성장은 50년 이상 시대의 주인이고 정신의 지배자가 아닌가.

 

몇몇 인사 문제로만 봐도 성장주의에 매몰된 결과는 규칙적이고 끈질기다. 첫째, 모든 가치가 경제와 성장에 종속된다. 기초 과학기술이나 인문학, 예술과 문화, 건강과 삶의 질은 부차적 가치나 장식용 치장에 머물고 결국은 소득, 성장, 일자리, 수출, 경쟁력, 부가 가치라는 경제로 치환된다.

 

계속되는 과학기술 분야 인사는 성장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국가 비전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다. <제4차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경쟁력>, 과학기술혁신본부장에 임명되었다가 사퇴한 인사가 지난 5월에 출간한 책의 제목이다(지금 대통령이 추천사를 썼다). 한 줄 한 줄 보는 것보다는 책의 구조를 보는 것이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기 쉬우니, 각 ‘부’의 제목을 살펴보자.

 

제I부는 ‘한국, 다시 새로운 출발: 소득 만드는 성장’, 제II부는 ‘제4차 산업혁명’, 제III부는 ‘한국의 경제 및 산업 경쟁력과 고용’, 그리고 제IV부가 ‘한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장, 그리고 그 패러다임을 굳이 또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런 인사를 한 이유가 개인적 친소관계가 아니라 패러다임을 공유했기 때문이라면 무리한 추정일까?

 

둘째, 목적과 가치가 전도(뒤집어짐)되면 의사결정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권위주의는 강화된다. 성장 그 자체, 그리고 성장 목표 달성을 위한 효율(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기 때문이다.

 

말썽이 난 과학기술계 인사를 어떤 과정을 거쳐 선택하고 검증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공식적으로 ‘시스템 인사’를 거쳤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작동했다는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아주 좁은 범위, 청와대 내부의 의사결정에서도 민주주의는 부재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는 나아질 수 있을까? 새 정부에서 고위 공직자를 임명하는 입장에서는 마음이 바쁠 것이다. 빨리 성과를 내야 하는데, 전략 가운데 하나로 내놓은 ‘제4차 산업혁명’도 빨리 시동을 걸어야 하는데, 연이어 발목을 잡히니 답답할 만하다. 정치도 아니고 외교·안보도 아닌데, 복지 재정과도 상관없는데, 박정희 시대의 ‘일사분란’이 아쉬울지도 모른다.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다.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성장’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않는 한, 성과와 효율에 더 조급할 수밖에 없다. 꼭 인사만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의사결정의 절차와 과정에서 권위주의가 득세할까 걱정스럽다. 예를 들어 실체도 모호한 ‘제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의 주류로 밀어붙이는 것.

 

셋째, 경제가 주도하는 성장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탈정치화’ 한다. 심하면 가장 정치적인 현실 정치조차 탈정치화하는 역설이 벌어진다.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유례없이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지명자를 적극 옹호(?)하는 이상한 상황이 바로 이런 경우다.

 

창조과학이나 뉴라이트는 과학기술과 성장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 또는 “중소벤처기업부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 입장을 갖고 있다고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시각이 탈정치화의 전형이다.

 

정치가 필요 없는 것에 탈정치화는 아무 문제가 아니지만, 정치적 탈정치화는 경계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과학기술이다. 정치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배분하는 것에 대한 것”으로 보는 한, 과학기술의 탈정치화는 불가능하다. 아니, 오늘 이 사태가 과학기술이 정치의 대상이란 것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탈정치화가 사실은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데 봉사하기 쉽다는 것이 문제다. 다음과 같은 장관 지명자의 정치적 발언이 탈정치화를 통해 은폐되는 것은 심각하다.

 

그는 이 강연에서 “창조 과학은 창조 공학을 통해 인간의 실제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창조 공학은 창조론이 재무적으로 지속될 수 있도록 돕고, 다음 세대의 창조 과학자들 확보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면서…(기사 바로가기).

 

탈정치화는 성장을 절대화하는 가장 좋은 전략이자 ‘국가이성’이다. 특히 정치와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정치를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이 탈정치화의 제물이 된다는 데에 주목한다. 지금 과학기술의 예를 보고 있지만, 교육이 그렇고 문화와 예술이 또한 그러하며 보건이나 복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영리병원 허용 문제. 제주의 영리병원 허용을 지역 발전, 외국인 투자 유치, 건강보험, 의료 서비스의 질 문제로 한정하는 것은 비정치화의 전형이다(기사 바로가기). 핵심은 건강을 기본적 권리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것, 그리고 사회가 어디까지 책임지고 어디까지 보호할 것인가 하는 정치의 문제다.

 

인사 문제만 봐도 문재인 정부 또한 성장주의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고위직 인사도 그렇지만 사회경제 정책 전반에 성장주의의 그림자가 오히려 더 짙어지고 있다. 저출산조차 탈성장주의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다.

 

정권은 정치, 사회, 경제의 ‘현실’을 이유로 댈지도 모르지만, 어떤 정권, 어떤 정부도 현실이 만만했던 때가 있었던가. 더 큰 문제는 성장으로는 그 현실조차 개선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다시 저출산의 예를 들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인사 ‘참사’가 우연이나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슷한 일이 더 벌어지지 않게, 나아가 더 이상한 정책이 나오기 이전에, 그 모든 사단을 불러온 박정희 시대의 성장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당장 탈성장의 비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 하더라도, 질적으로 ‘다른’ 성장 정도라도 새 틀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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