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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 증후군, 개인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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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 증후군, 개인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조효진 (시민건강증진연구소 회원)

 

최근 버스 졸음운전으로 인한 안타까운 사고가 잇따랐다. 그리고 나서야 많은 버스 운전기사들이 애써 졸음과 싸워가며 운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관련기사.: ‘2시간30분 운전에 휴식 5분’ “생마늘, 생양파 먹고 운전”.) 생양파와 생마늘까지 먹어 가면서 억지로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피로 수준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는 비단 버스 운전기사들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노동자들은 장시간 근로와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에 시달리고 있다. 소진증후군이란 일로 인해 신체적, 정서적 피로가 장기간 누적된 결과, 말 그대로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상태를 뜻한다. ‘하얗게 불태웠어’라는 만화 속 대사와 학술 용어가 드물게도 일치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소진증후군은 무기력감, 냉소주의를 동반하며, 특히 만성적 소진 상태는 불면증, 우울증, 공황장애를 불러올 뿐 아니라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관련자료: 죽도록 일하다간 정말 죽는다!!!).

 

인터넷에 ‘소진증후군’을 검색해보면 소진 상태를 자가 진단할 수 있는 방법,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다(☞관련기사: 불안에 중독된 당신, 하루 10분이라도 ‘마인드 바캉스’). 예컨대, 조용한 곳에서 천천히 음미하며 식사하기, 10분 동안 산책하며 사색하기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진을 호소하고 있다면, 이를 사회적 현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과연 ‘개인의 노력’만으로 소진증후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지난 4월 국제학술지 <응용심리학회지(Journal of Applied Psychology)>에 발표된 위스콘신 대학교 장릭신 교수팀의 논문은 소진의 ‘사회적 성격’에 주목하고 있다. 연구진은 고용 불안과 소진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고, 나아가 소득불평등 수준에 따라 고용불안이 소진에 미치는 영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았다(☞논문 바로 가기). 연구진은 30개국에서 시행한 설문 자료를 이용하여 ‘고용불안을 많이 느낄 때 소진상태가 심각해지고, 소득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고용불안으로 인한 소진이 더 심각할 수 있다’는 가설을 검정하고자 했다. 소진상태는 ‘당신은 일을 마친 후 얼마나 자주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에 돌아옵니까?’, ‘당신은 자신의 일이 얼마나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까’(냉소주의)의 문항을 통해 측정했다.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고용불안이 심할수록 소진상태가 심각했다. 즉 자신의 일자리가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노동자들이 더 높은 수준의 소진상태를 호소한 것이다. 고용불안을 느끼면 미래의 잠재적 실업에 따른 소득과 여타 자원 상실을 걱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고용불안은 그 자체로 소진상태를 촉진시키는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둘째, 소득불평등이 심한 국가의 응답자들일수록 소진상태를 더 많이 경험했으며, 연구가설대로 소득불평등이 심한 국가들에서 고용불안이 소진에 미치는 영향이 더 심각했다. 즉, 소득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비슷한 정도의 고용불안에 대해서도 더 높은 수준의 소진상태를 호소한 것이다. 이는 소득불평등이 맥락적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결과는 국가 간 비교뿐 아니라 미국 48개 주의 자료를 분석했을 때에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소득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물질적 자원과 심리·정서적 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불평등하게 제한된다는 점을 들어 분석결과를 설명했다. 소득이 불평등하다는 것은 개인이 필요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기회에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있는 물질적 자원뿐 아니라 심리·정서적 자원도 포함된다. 이미 많은 연구들에서 소득불평등이 사회적 신뢰, 행복 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는 소득불평등이 심해지면 고용불안 같은 스트레스에 개인이 대응할 수 있는 심리·정서적 자원이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소득불평등이 심각할 때 고용불안에 따른 스트레스는 더욱 심화될 수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소진상태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용불안, 소득불평등 모두 개인이 만들어냈다고 보기 어려운 사회적 요인이다. 한국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노동시장 유연화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특히 질적 측면보다는 비정규직 확대를 통한 수량적 유연화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어 왔다. 한편 오늘날 한국의 경제발전 수준은 외환위기 이전으로의 회복을 넘어 큰 폭으로 성장했지만, 소득 불평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소개한 연구 결과에 비추어 본다면, 오늘날 우리사회의 많은 노동자들이 소진상태를 호소하고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셈이다.

 

피로 누적과 그로 인한 건강의 이상신호는 나의 책임과 나의 나약함 때문만은 아니다. 좋지 않은 근로환경, 불안한 고용상태를 박차고 나가도 더 나은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그 누구도 큰소리를 내거나 사표를 던지기 어렵다. 그렇게 피로는 누적되어가고 우리는 그나마 혼자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 밥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기, 10분 산책하기, 그것도 안 되면 생양파와 생마늘의 효능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대책들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버스 운전기사의 졸음운전을 생양파와 생마늘이 막아주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장시간 노동과 과중한 업무량, 고용불안정과 소득불평등. 이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제도와 정책의 결과물이다. 소진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 필요하다. 집단적 문제는 집단적 해결을 필요로 한다.

 

< 서지정보 >

Jiang, L., & Probst, T. M. (2017). The rich get richer and the poor get poorer: Country- and state-level income inequality moderates the job insecurity-burnout relationship. Journal of Applied Psychology, 102(4), 672-681.http://dx.doi.org/10.1037/apl000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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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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