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은 정치적인 것이며, 또한 정치가 건강을 결정한다.
한 유명한 독일의 병리학자이자 정치인이 170년 전쯤 한 말을 요즘 사정에 맞게 조금 고쳤다. 큰 뜻은 별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건강과 질병은 단지 세포와 디엔에이, 살과 뼈와 피, 생물학과 해부학이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 경제다.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건강은 개인 차원의 현상이 아니라 정치이고 경제이자 문화다.
2018년에도 이런 명제는 어김없이 관철되었고 증명되었다. 먼저, 드러난 현상으로부터 ‘구조’로 가는 방향. 예를 들어 임신 중단이나 낙태와 같은 보건과 건강 이슈 뒤에서 우리는 반드시 젠더, 불평등, 국가권력 문제를 찾아야 했다(바로가기). 다시 말하지만, 이때 건강은 개인사가 아니다.
혹자는 극단적 현상이라 할지 모르나, 밀양의 한 병원에서 일어난 화재 참사와 많은 이의 죽음도 배후(또는 토대) 구조를 빼고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바로가기).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신생아 네 명이 숨진 사건 또한, 병원이나 의료 문제를 넘어 크고 복잡한 어떤 구조가 드러낸 증상이나 징후로 봐야 한다. 이때도 건강은 거의 정치적인 것이다.
그 역방향은 구조가 직접 사람에 닿는 것이니, 사회, 문화, 정치, 경제가 누군가는 살리고 누군가는 죽인다. 예를 들어, 아직 진행형이나 마찬가지인, 김용균이라는 스물네 살의 젊은이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은 사건. 구조 운운하는 인식에 이르기도 전에, 그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가 한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다른 김용균은 지금도 비슷한 위험에 몸을 내맡기고 있을 터.
구조가 사람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면, 생명과 안전에 반하되 겨우 시간만 연기해놓은 사건도 올해 일이다. 대표적 사건은 의료기기 규제완화(바로가기)와 제주 영리병원 허가(바로가기). 건강과 의료의 정치경제는 일자리와 이윤, 경제와 성장을 앞세우며 몸과 마음, 일상과 삶을 공격할 태세다.
올해 우리가 경험한 정치의 건강성과 건강의 정치성은 앞으로도 반드시 지속한다. 그것이야말로 구조이자 토대며, 필연성, 인과관계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면, 정치와 경제는 반드시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긴 시간에 걸쳐 축적된다. 그런 몸과 마음, 상처와 축적은 다시 구조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건강과 보건에 초점을 맞추되 더 넓혀 사람들의 삶과 고통에 주목하는 것이지만, 이런 이유로 밑돌인 구조와 이를 둘러싼 정치(넓은 범위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함하는)에 주목한다. 2019년을 맞으며 전망하고 다짐하는 것도 여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모든 전망과 다짐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2019년 한국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이 더욱 심화한다는 것이 우리의 전망이다. 정치와 사회는 당연히 이를 따른다. 현상적으로는 2018년에 드러난 ‘경제권력’의 상호관계, 예를 들어, 차원은 제각각이지만 최저임금,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이른바 김용균 법과 유치원 3법 등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은 더 격화될 것이다.
당면한 한국 경제의 기본 모순이 상식적이라면, 이를 둘러싼 정치는 구조인 동시에 어느 정도까지는 개방적이고 유동적이다. 2019년의 조건은 여기다 한 가지 더, 성장, 일자리, 소득, 그 어느 것도 전망이 밝지 않으니 경제는 더욱 정치화할 것으로 보인다. 자영자와 소상공인 문제에서 보듯, 그 구조가 과거의 축적이기도 하면 경제는 정치적 구조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 정치의 성격은 명확하다. 모두 애써 말을 피하지만, 그것은 계급정치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 이미 경험했고 지금도 보는 중이니, 이미 손에 넣은 권력이라면 그것을 쥐고 ‘포용’, ‘지속’, ‘공정’, ‘형평’ 같은 것에 순순히 동의할 리 만무하다. 기득권은 아주 작은 양보와 패배조차 ‘미끄러운 경사’로 여기는 법이 아닌가.
개방이고 유동이라 했으나, 구조의 틈을 활용하는 정치가 무능하면 기존 권력관계를 조금, 아주 약간 흔들기도 쉽지 않다. 2019년, 좀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로 밀고 가는 정치는 더 약해질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한국의 ‘기득권 동맹’은 약한 시도에도 강하게 저항할 것이 틀림없다.
성장동력, 혁신성장, 시장 메커니즘, 민영화와 영리화, 기업 살리기, 경쟁력, 규제완화 등이 더 힘을 키우는 것과 비교하여, 불평등 완화, 공정성, 공공성, 노동에 대한 보상, 인권과 기본권, 삶의 질, 건강과 생명은 (알게 모르게) 공격 대상이 될 것이다. 2019년의 정치, 경제, 사회 구조, 그리고 덧붙여 건강체제는 이런 기반 위에 작동하리라 예상한다.
힘의 크기로만 보면 예상되는 결과가 두렵다. 경제가 성공하더라도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 불평등은 더 커지고 90%의 삶은 더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임금, 일자리, 비정규 노동, 살 집, 비수도권 농촌, 소득과 가난, 산업재해, 의료비와 돌봄 비용 부담이 어찌 될지 모르겠다.
정부가 약속했으니 복지와 사회정책이 꾸준히 강화될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권력관계가 불가역적으로 기울어지면 필시 머뭇거리게 된다. 약속한 것조차 줄줄이 후퇴할 수 있고, 잘 된다 해도 자칫 기존 체제에 봉사하는 역할에 머물기 쉽다. 미봉책이거나 폭발을 방지하는 압력 제거 장치.
여기에 이르면, 2019년을 시작하는 몸과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다. 권력관계는 크게 기울어져 있고 그것이 바뀔 만한 기회를 예상하기도 어려우니, 낙관적으로 전망할 근거가 잘 보이지 않는다. 2018년 마지막이자 2019년 첫 번째 <논평>은 이처럼 답답하고 어렵다.
그래도 희망의 객관적 토대가 있으니, 여기에 충실할 윤리적 의무가 있다는 말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토대 중 하나는 고통의 객관성으로, 지금 사회적 모순은 그것을 만들어낸 체제를 안으로부터 무너뜨릴 정도에 이르렀다.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지 않는 ‘파업’이 더 강화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무정부적으로 폭발하는 아우성, 변화에 대한 요구가 현존하는 그리고 체제 파괴적인 고통과 모순의 실체다.
이런 가능성은 다른 정치에 대한 공동의 열망, 그리고 그 실천과 만나야 비로소 현실이 된다. 고통은 스스로 조직하거나 새로운 실천으로 바뀌지 않으며, 반드시 주체의 의지와 희망에 결합해야 동력을 얻는다. 김용균 씨의 죽음이 (불완전하지만) 법이 개정되는 계기가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전진은 미리 꿈꾸고 준비하며 실험한 상태에서야 ‘사건’이 될 수 있다.
공유하는 희망이라야 객관적이다. 다짐도 그렇다. 새해에는 점점 더 커지고 퍼지는 고통과 모순을 좀 더 날카롭게 감각하리라 다짐한다. 여기서 동력을 얻는 동시에 작고 큰 실천을 제안하고 참여하며 옹호하는 것도 우리의 역할로 삼는다.
* 2018년 한 해 동안 <서리풀 논평>을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2019년 한 해도 성실하게 듣고 응답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새해 건강하고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