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한국과 일본, 시민의 연대가 중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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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는 지금 일본 정부가 하는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국제정치든 경제 전쟁이든 자기 이익을 지키려는 합리적 행동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치밀한 계획이나 ‘고도’의 정치행위? 아마도 과잉 해석이 아닐까 한다.

 

해석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약자이자 피해자(강제징용)를 핑계 삼은 사태가 이제 다시 약자에게 더 불리한 피해를 부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반도체니 불화수소니 하지만, 수출이 줄고 경제가 위축되면 누가 더 큰 손해를 보게 될까? 걱정스럽다.

 

엊그저께 가까스로 통과된 추경만 봐도 이런 ‘피해의 불평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내역은 더 살펴야 하겠으나, 삭감과 증액의 정치는 이 시기 맥락과 그 권력관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총지출 기준 연구개발(R&D)이 3천억원 순증됐다. 반면 보건·복지·노동 6천억원, 교육 1천억원, 산업·중소기업·에너지 1천억원, 사회간접자본(SOC) 1천억원이 각각 순감됐다. 사업별로 보면 일본 수출규제 대응과 관련해 해외 의존도가 높은 부품·소재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R&D, 실증, 사업화, 양산 지원 등의 사업 예산이 크게 늘어났다.(기사 바로가기)

 

누군가는 보건·복지·노동에서 돌려 연구개발과 사업화와 양산 지원에 쓰는 돈이 결국 전체 국민에게 돌아간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에게 묻는다.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그 유명한 ‘낙수효과(적하효과)’는 허구라는 것이 진작 밝혀졌으나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힘이 세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금방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으니 ‘반일’과 ‘극일’ 프레임이 힘을 발휘할 터, 국내 정치경제가 이를 오용 또는 악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일관계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빌미로 노동시간이나 화학물질에 대한 규제완화까지 동원되는 판이니 ‘이익과 피해의 배분’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국가를 우회하기는 어렵다. 주권을 가진 나라 사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실재하는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은 법을 정하고 주권(때로 폭력)을 행사하며 대외적으로 국민(인민)을 대표한다. 국가와 그 구성원은 쉬 분리되지 않는다.

 

하지만 또한 다르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왈가왈부하는 일제의 식민지배 문제만 해도 국가(권력)와 사람은 분리된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범죄적 식민지배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할 때, 그 조약을 맺은 두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누구를 대표하는가?

 

그 많은 이상한(?) 국가들을 생각하면 국가와 국민(사람)은 좀 더 나눠져야 건전하다. 우리는 국경을 넘어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 국민 사이의 관계조차 국가권력이 독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의 근원, 식민지배 문제도 마찬가지다. ‘법통’을 이었다 할 국가권력이야 과거 정부와 그 행위를 인정해야 하겠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두 나라의 국가권력, 집권 세력이 그냥 어정쩡하게 봉합한다고 식민지배의 범죄 행위가 모두 해결되지 않는다. 국제법이 어떻고 하지만, 그 또한 현실의 권력관계를 벗어나지 않는, ‘그들’만의 것이라 해야 한다. 성노예화와 강제징용의 범죄행위가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누가, 무슨 권위로, 결정하고 선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최근 한일관계에서 국가권력과 국민(인민)이 분리되는 조짐을 보이는 점은 그나마 과거보다 한 걸음 진보했다고 할 것이다. 아베 정권 또는 지금의 국가권력이 문제지 그냥 보통의 일본 사람을 반대하고 적대할 이유가 없다는 인식. 불매 운동조차 사람 사이 적대의 감정 표현이 아니라 비뚤어진 국가권력에 압력을 가하는 실천 방법으로 해석한다.

 

그래도 ‘건강한 분리’에 이르기는 턱없이 모자라고, 국가권력이 여전히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기울어진 이익과 피해의 운동장이되 현실의 힘은 국가권력이 독점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두 나라 모두 동아시아 특유의 국가주의 경향이 강한 것도 생각해야 한다.

 

이번에는 어찌어찌 해결되어도 비슷한 문제가 되풀이될 가능성이 커 더 걱정스럽다. 두 나라 정권이 어떤가에 따라, 그들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보통 사람들의 실질적 이해와는 무관한 관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피해 당사자와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지 않는데도 ‘국익’이라는 추상적 명분으로 문제를 봉합한 이전 정권의 과오가 또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일본의 경우도 아베 정권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다.

 

국가권력에 압력이 될 시민의 실천과 연대를 주장하는 이유는 이제라도 두 나라가 제대로 된 협력 관계를 맺는 데는 다른 길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먼저, 일본이 식민 지배와 자국민의 전쟁 동원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두 나라 사람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나라 사이의 경쟁과 갈등이 초점이 아니라 보편적 인권과 정의의 책임 문제다.

 

현재 제도화한 국가권력의 논리로는,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외교와 국제정치만으로는 불가능한 목표다. 이른바 ‘국익’과 ‘현실론’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의 권리와 인권, 윤리, 삶의 질과 복지 등 ‘가치’는 묵살되거나 희생되기 마련이다. 견제, 압력, 보완, 무엇이라 불러도 좋으니, 국가 사이의 관계조차 민주주의 원리를 토대로 시민사회가 개입해야 관계의 가치 기준이 살아난다.

 

두 나라 시민사회의 연대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담론만 하더라도 이미 상당한 논의를 축적했고, 구체적인 실천도 한둘이 아니다. 며칠 전에도 한국과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도시, 농촌, 마이너리티, 노동을 같이 토론했다고 한다(기사 바로가기).

 

다시 강조한다. ‘사람 중심’의 새로운 한일관계와 시민 연대는 추상적인 국가 이익을 넘어 보편적 가치와 이익,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호혜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냥 잘 지내자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 시민의 공동 이익에 기초해야 한다.

 

일본의 레미콘, 덤프트럭 운송노동자들이 소속된 전일본건설운수연대노조와 20년 가까이 연대를 해 온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불매운동 대신 지난 6일 일본 오사카 경찰본부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하고 투쟁기금 20만엔(약 220만원)을 전달했다. 운수연대노조 간부들이 아베 정권 아래에서 연이어 구속되는 등 전후 최대의 노조 탄압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설노조 관계자는 “일본 내 평화세력과 연대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싸움에 관심을 갖고 이들과 연대할 방법을 더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기사 바로가기).

 

교류와 연대로 치면 건강과 의료 분야도 이미 상당한 경험이 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평화와 복지에 기초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논의를 진전시키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비핵평화를 위한 한일 국제포럼’(자료 바로가기),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와의 교류(자료 바로가기), 의료관련 협동조합 간의 교류 등이 그것이다.

 

이는 단지 몇 가지 단편적 사례일 뿐,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만들고 만들어진 여러 교류와 협력, 연대가 얼마나 많은가. 그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바람직한 미래 관계를 고민해보지 않은 데도 드물 것이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의 자산이자 힘이라 생각한다.

 

길게 보면 단계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국가권력에 제도적 압력이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터이나, 곳곳에서 의견을 내고 연대를 제안하며 분위기를 만드는 일은 당장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찾아보자. 새로운 접근으로 새로 할 수 있는 ‘운동’이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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