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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가 바탕이 된 보건의료 연구의 중요성: 영국 사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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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리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최근 참여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정책의 입안이나 수행 과정에서 시민참여의 기회가 증가하고 있지만, 연구는 여전히 전문가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과학계 전반에 걸쳐 지식생산은 전문가가 수행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 하에서, 비전문가에 의해 생산된 지식은 그 지식의 합리성과 타당성과는 별개로 충분한 권위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생명과 관련된 보건의료의 영역은 그 전문성이 두드러져왔다. 그러나 시민참여에 친화적이지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 영역에서 시민참여가 필요한 이유는 충분하다. 시민은 보건의료 서비스를 운용하는 재정 분담자로서 책무성을 이행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실현가능한 의견을 낼 가능성이 있으며, 전문가들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받음으로써 절차의 투명성과 민주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보건의료 분야 정책 수립 과정에서의 시민참여 수준은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최근 정은주와 이현아는 한국과 영국의 보건의료 연구과정에서의 시민참여 사례를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했다(논문 바로가기 ☞ 보건의료 연구에서의 시민참여: 영국 보건연구청(HRA)의 시민참여 개념과 운영사례를 중심으로). 저자들은 한국의 시민참여 정책이 제한적이었음을 밝히고, 영국과 비슷한 수준의 보다 적극적인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안들을 제안하였다.

 

연구자들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연구에서의 시민참여가 무엇인지 설명하였다. 2021년 11월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는 오픈사이언스가 권고된 바 있다. 오픈사이언스란 폐쇄적인 연구 문화에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과학지식을 누구나 개방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전문가 외의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과학지식의 생산과 평가를 개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과학지식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배타적으로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을 위하고 널리 퍼져야 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오픈사이언스 권고에서는 연구에서의 시민참여를 “과학지식의 생산과 평가를 전 사회 구성원들에게 개방하여 과학자가 다른 구성원들과 협력하여 연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시민은 전통적인 과학계의 전문가를 제외한 사회 행위자들 전반을 일컫는다. 보건 연구에서의 시민참여는 환자×참여자 주도 연구 및 환자×시민참여 연구 등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기초연구가 필요한 희귀질환 연구나 건강 데이터 공유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이 같은 연구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가 영국이기 때문에, 저자들은 영국의 보건영역 연구에서의 시민참여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국내의 보건의료 연구에서 저자들이 소개하는 시민참여의 첫 번째 사례는 의료기술평가 국민참여단이다. 의료기술평가는 의료기술의 안정성, 유효성, 비용효과성과 그 기술로 인한 사회적·윤리적·법적 영향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의료기술평가에 시민을 참여시키는 국제적 추세에 발맞추어 우리나라도 2018년 7월 의료기술평가 국민참여단을 발족하였다. 국민참여단을 통하여 연구 주제를 제안하거나 연구 관련 환자의 경험 공유, 연구에 대한 평가 등의 의료기술평가 관련 연구의 전 과정에 시민 참여를 유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기 의료기술평가 국민참여단의 구성원은 11명에 그쳤다. 이를 보완하여 2기에서는 97명으로 확대되었으나 아직까지 시범 사업에 머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민참여단을 운영하는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회의 안건에 대해 간단한 내용만을 공개하고 있어,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두 번째 사례는 환자중심의료기술최적화 연구사업이다. 이 연구사업은 수익성이 적어 연구가 잘 되지 않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2019년부터 공익적 임상사업은 환자의 경험을 반영한 환자중심 연구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 여러 전문가 및 일반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연구가 필요한 주제에 대해 공모했는데, 2019년 9건, 2020년 104건의 공모를 받았지만 최종 선정된 주제는 2019년 0건, 2020년 1건(연구자와 시민이 공동으로 제안 한 연구의 경우 5건)에 불과하여 시민 참여도가 낮았다.

 

저자들은 앞서 소개한 국내의 시민참여 사례의 제한점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첫째, 두 사업 모두 연구에서의 시민참여에 대한 개념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있다. 실제 사업 추진 내용을 살펴보면 각 연구단계에서 어느 정도 시민의 참여가 가능한지, 어떠한 형태의 참여가 가능한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둘째, 보건의료분야 연구에서 시민참여를 위한 시범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으나, 연구에서의 시민참여 필요성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가 학계 및 실제 사업에서 충분히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의료기술평가 국민참여단을 발족하여 연구주제 선정 및 연구 평가까지 시민참여를 추진하고 있으나 사업 추진 결과에 대한 정보는 적극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한국 사례의 한계점과 비교하여 저자들은 영국 보건연구청(HRA)에서 운영되고 있는 다양한 시민참여 연구 프로그램들을 소개하고 있다. 보건연구청은 연구에서의 시민참여를 1)연구 대상자로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참여(Participation), 2)연구자와 협력하는 참여(Engagement), 3)연구자와 함께 연구를 수행하는 참여(Involvement)의 세 단계로 나누어 정의하였다. 보건연구청은 시민참여가 연구의 민주성과 윤리성 확보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연구에서의 시민참여가 환자와 시민에게 더 적합하고 유용한 연구를 이끌어내고, 윤리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연구가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설계를 돕는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먼저 우리나라에서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로 운영되는 연구계획 심의 과정을 영국에서는 보건연구청이 담당하는데 연구계획 단계에서부터 시민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보건연구청의 통합연구신청시스템에는 2009년부터 연구자가 기재해야 하는 정보 중 14번 째 문항에 ‘환자×시민참여’ 문항을 포함시키고 있다. 여기서 시민참여의 개념은 시민이 단순히 연구대상자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의 설계와 관리, 수행 등의 연구 절차 전반에 걸쳐 연구자와 의견을 나누는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저자들은 비록 연구 과정에서 시민참여의 여부가 승인을 위한 필수요건은 아니지만, 시스템 상으로 이런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연구자들에게 시민참여를 고려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후 시민의 연구 참여도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시스템에 등록된 연구계획 중 시민이 참여한 연구의 비율은 2010년 19%에서 2014년 36%로 증가했다.

 

두 번째 사례는 COVID-19 연구의 시민참여 매칭서비스이다. COVID-19 관련 연구는 촌각을 다투는 문제이므로 각 국의 규제기관은 신속심사제도 등을 통하여 연구의 임상시험 진입 시간을 단축해 왔고,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보건연구청은 공중보건 비상사태 발생 시 패스트 트랙 심사를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패스트 트랙 심사를 거친 COVID-19 관련 연구들의 시민참여가 상당히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보건연구청은 2020년 COVID-19 시민참여 매칭서비스를 출범하였다. 이는 패스트 트랙 심의를 신청한 COVID-19 연구들을 대상으로 연구에 가장 적절한 시민참여자를 매칭시켜 주는 서비스이다. 연구자가 매칭서비스를 신청하면, 기관이 연구자와의 면담을 통해 연구에 필요한 시민의 정보 등을 확인한 후 시민모집과 연결까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최근에 시행된 서비스이니 만큼 아직 그 유효성을 평가할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참여율이 22%로 하락했던 코로나 초기 연구의 시민참여 비율이 52%로 회복된 것은 해당 서비스가 시민의 연구 참여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사례는 보건연구청이 2020년부터 추진 중인 “공개하다(Make it Public)”프로젝트이다. 이는 연구에 참여했거나 참여가능한 모든 시민의 이익을 위해 보건복지 연구의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보건연구청은 연구자들에게 일반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연구 정보와 그 결과를 공개하는 것을 독려한다. 이를 위해 보건연구청은 연구자가 연구 등록과 결과보고를 제출하는 시스템과 이를 시민에게 공유하는 시민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보건연구청은 연구자가 공개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하지 못한 경우 제재 조치를 취하는 방식으로 연구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영국 사례들을 기반으로 국내 보건의료 연구에서 시민참여를 독려할 때 고려해야 할 점들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시민참여의 개념과 목표를 보다 분명하게 정의해야 한다. 둘째, 연구기관이 보다 적극적으로 시민참여를 구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셋째, 제도적인 장치를 통하여 연구에서 시민참여를 일반화 및 대중화 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넷째, 연구에 참여할 시민을 모집할 때 보다 포괄적이고 개방적으로 모집할 수 있도록 하며, 연구에 대한 투명성을 확보하고 정보를 시민들에게 공개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보건의료분야는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이 분야의 지식은 시민들의 삶과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건의료지식이 ‘우리 모두’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사회가 보건의료지식의 생산을 전문가의 배타적 영역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사회적 인식의 개선 또한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를 실현 가능하게 할 제도적인 뒷받침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서지사항

– 정은주 & 이현아(2022). 보건의료 연구에서의 시민참여. 보건과 사회과학, 59, 5-40.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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