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사회적 차원에서 건강에 관심을 갖는 사람치고 건강 불평등과 건강정의에 무심하기는 어렵다. <서리풀 논평>은 건강 불평등과 부정의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주장했다.
“민주주의가 건강에 이롭다”(2012년 4월 2일, 바로가기)는 제목 그대로 민주주의가 건강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보건의료정책에 더 많은 민주주의를”(2012년 5월 29일, 바로가기)를 비롯해 여러 논평에서 건강정책의 민주화와 참여를 거듭 강조했다.
실망스럽게도, 민주주의 확대를 주장한 이후 한 해도 더 지났지만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후퇴한다는 조짐이 뚜렷하다. 민주주의가 퇴보한다면 건강정의를 위한 발걸음도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다시 관심을 촉구한다.
첫째,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물론, 민주주의를 절차와 실질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데에 동의한다. 실질이 문제면 민주주의 제도가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고, 이는 곧 절차적 민주주의의 문제로 돌아간다.
어느 쪽으로 보든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는 더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 그나마 축적되었던 성과조차 더 없는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국정원의 대통령 선거 개입이 대표적 예다. 안보를 핑계로 삼은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민주주의 제도를 이토록 노골적으로 위협한 예는 찾기 힘들다.
뿐만 아니다. 진주의료원 폐원 사태에서 보듯이, 국회와 제도 정치는 민주적인 문제해결 절차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나서서 공공병원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나서야 정부 한 쪽이 움직인다고 한다.
공공의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외적으로 표시했다는 것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대통령이 나서야 문제 해결의 동력이 생기는 것은 대의 민주제의 실패이자 군주제와 다를 바 없다.
‘실질적’ 민주주의의 위기가 두 번째다. 절차와 제도의 형편이 이러니, 민주주의 제도의 실질이 제대로 구현될 리 없다.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제 정체가 목표로 하는 실질의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차 희망버스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패를 상징한다. 희망버스는 철탑 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 두 명을 응원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현대자동차가 불법 파견을 인정하고(3년 전에 대법원이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한 사항이다) 비정규직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대법원의 판결이라는 제도도 그리고 희망버스라는 ‘운동’도 아주 가볍게 못 본 것으로 여긴다.
다른 듯 하지만 같은 사례는 또 있다. 신세계 그룹이 계열사 부당지원, 노조설립 방해, 불법 사찰 등으로 기소되었지만, 노동청, 공정위원회, 검찰 그 누구도 재벌 기업의 오너를 기소하지 못했다. 제도 실패를 의심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무력하다. 마침 지난 주 경제부총리가 전경련 모임에 나가 “기업 일감 몰아주기 과세요건을 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상반기에 경제민주화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고도 주장했다. 도대체 이들은 무슨 ‘민주’를 말하는 것인가.
셋째, 정책과 국정 운영에서도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더 위축되었다. 국정 운영의 최고책임자와 집권 여당이 이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본다.
정권 초기에 이미 경험했지만, 고위직 인사를 어떻게 하는지 누구도 말하지 않고 모두 ‘위’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사권자의 고유한 권리라는 이상한 말장난으로 일관한다. 지난 정권이 시도했던 ‘인사위원회’ 같은 겉치레조차 찾기 어렵다.
딱 여섯 달 만에 기초연금의 공약을 바꾸면서도 여론을 듣는 형식조차 채 갖추지 않았다. 이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의 위원이 탈퇴했지만 “6개월 전과 경제상황이 달라졌다”는 이해하지 못할 설명이 전부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민주주의가 가능할 턱이 없다. 말로야 백 번을 강조해야 다 소용없다. 문화와 태도, 과정을 포함하여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제도화’되지 않으면 겉모양과 장식에 그칠 뿐이다.
민주주의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은 또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려는 공공연한 시도가 그것이다. 최근 거대 정당들이 앞장서서 공천을 폐지하자고 하는 일이 그 중 대표 사례에 속한다.
토호의 전횡과 보통 사람의 배제를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순서와 해법이 틀렸다. 이들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보는가 생각하면 혹 당연한 순서인지는 모른다. 양당의 이해관계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당(그리고 그 활동)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 찾아보는 것이 먼저다. 기초자치단체 수준의 정치(물론 제도정치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정치)는 민주주의를 배우고 실천하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이중적 의미에서) 튼튼한 ‘기초’가 없고는, 제도로나 실질로나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모든 것 가운데에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민주주의의 가치가 후퇴하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시장의 위세가 커질수록 민주주의의 가치는 가볍다. 이 정부의 기조와 딱 맞다. 게다가 만성화된 경제적 어려움은 (사실은 애당초 불가능한)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몇 년에 한번뿐인 선거로만 상징되고, 그나마 실질적인 참여의 효과를 경험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는 사이 시장은 내 삶의 현실이고 권력이다(!). 그러니 정치와 선거에 무관심한 것은 ‘합리적 무관심’이라고 불러야 옳다.
민주적 경험과 훈련이 부족한 채 박정희 시대로 퇴행하는 것이 위험을 보탠다.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삼아 국가안보의 정의와 이해 수준이 한 세대 전으로 되돌아간 듯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때 아닌 봉건적 권위주의와 군사 문화의 부활도 빼놓을 수 없다.
사회의 ‘병영화’가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민주주의를 더 크게 위협할 것이다. 통일과 외교의 군사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그렇다 치자. 최근 5년간 초·중·고교 학생 11만 여명이 병영체험 캠프를 다녀왔다고 한다(관련 신문기사). 군대 체험을 다룬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얻는 것도 못내 위험해 보인다.
어떻게 민주주의의 위기에 맞서야 할 것인가. 원론적인 답은 간단하다. 예민하게 위기의 징후를 알아차리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맞서는 것이 중요하다. 무력감과 냉소를 이기고 더 넓고 깊은 민주주의를 요구해야 한다.
일상에서 민주주의의 토대를 튼튼하게 만드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을 보태서 강조한다. 민주주의는 제도 정치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선거에만 해당하는 일은 더더구나 아니다. 가정과 학교, 병원, 직장에서, 그리고 내가 사는 마을과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