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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체계의 운명을 그들 손에만 맡겨 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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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이 파업을 고려하면서까지 주장하는 내용은 주로 이런 것이다. 의사 인력 확대 반대, 급여화 반대, 간호법 반대, 의사 면허 취소법(의료법 개정안) 반대 등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다른 목소리에 더 힘을 준다면 어떨까. 병원에 가지 못하는 지역사회의 환자들을 의사들이 찾아가 진료할 테니, 정부가 이를 지원해달라고. 동시에 지역의 환자도, 의료 인력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수도권 대형병원의 난립과 환자 쏠림을 해결하고, 일차의료와 지역의료를 살려내자고 말이다.

 

의사집단으로서는 정당성도 얻고, 의료체계 내에서 지배적인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개원의는 대형병원으로부터 수입을 지키고, 대형병원 전문의는 소진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런 주장들은 이미 의사집단 내부에서도 때때로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관계와 첨예하게 얽히지 않은 경우 이런 주장들은 대체로 스쳐 지나가듯 표현되거나 힘을 가진 실체적 주장이 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때로는 여러 요인들의 우발적 해후에 의해서, 때로는 의사집단의 전략적 판단에 의해서 그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근거한 주장이 정당성과 동의를 획득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의사집단 역시 이익집단으로서 집단의 권위와 경제적 이윤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더 민감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의료와 관련해 환자와 시민들이 경험하는 고통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병원에 가기 어려운 환자들은 여전히 거의 방치돼 있다. 최근에는 응급환자가 구급차를 타고 돌다가 치료받을 응급실을 찾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는 일이 수도권에서도 일어난다는 사실이 주목받으면서 응급의료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커졌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문제가 비수도권 지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과 환자들의 삶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료체계를 논의하기 위하여 모두가 머리를 맞대는 것을 더는 미룰 수 없다. 하지만 썩 쉽지가 않다.

 

 

기본적으로 의사가 안전하고 건강한 여건에서 일할 수 있어야 환자의 건강과 안전도 지켜질 수 있다. 하지만 시민/환자에게 최선의 길이 의사집단의 이해관계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먼저 의사는 시장적인 의료생산체계 하에서 시민/환자를 대상으로 이윤추구를 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의사는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하겠지만, 사실 진료실 안에서만 환자를 만나는 의사들은 개인 진료 수준에서나 정책 수준 모두에서 시민/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최선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셋째, 직종의 역할 및 권한을 둘러싼 갈등, 이른바 ‘밥그릇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서로의 가치와 이해가 다른 것이 문제는 아니다. 동일한 집단 내에서도 동질적이지 않은 이해관계를 갖는데, 아예 다른 집단의 이해가 완전히 같지 않은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 담론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문제는 권력의 불평등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의사집단의 권력은 사실 이미 상당한 것으로 판단한다. 의료의 실천 측면에서 보자면, 자본의 의료시장 진입과 국가의 규제로 자율성의 제한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제도적 보호 아래 의료 행위를 독점하고, 다른 의료인들을 종속시킨다. 사회적으로는 전문가로서 상당한 인정과 발언권을 얻고,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열심히 학업에 매달려 성취를 이룬 의사가 큰 보상을 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전문가 집단으로서 윤리적 가치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다고 평가받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전반적으로 그들의 권위는 아직 건재해 보인다.

 

기업들로서는 적어도 당분간은 의사들과 반목하기 어려울 것이다. 제약회사나 의료기기 회사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의사들이 날을 세우는 비대면 진료 플랫폼이나 보험사들도 의사를 필요로 한다. 통치의 안정을 원하는 정부 역시 의료 실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사집단과 마찰을 최대한 피한다. 정부가 의료 및 관련 기술을 신성장동력으로 삼는 한 더욱 그렇다. 이번 정부에서 더 눈에 띄는 것은, 정부가 어떻게든 의사집단과 대화를 이어가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악마화 하는 화물연대, 건설노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그리고 시민단체들과는 사뭇 다르다.

 

의정협의체는 이러한 권력과 배경에 기반한 의사집단들의 실력 행사의 결과였다. 의료현안협의체로 이름이 바뀐 채 지난 6월 15일 개최된 11차 회의에서는 앞으로 의료계, 환자, 전문가 등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겠다 밝혔다. 그러나 지금의 협의체 구조를 그대로 둔 채 목소리‘만’ 취사선택하는 방식은 곤란하다. 시민사회를 비롯해 더 많은 이해관계자가 테이블에 앉아, 의료현안을 논의해야 한다. 의료 인력 문제만 다룬다 해도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포함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물며 협의체 이름은 ‘의료현안’협의체고,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강화를 위한 다각적 논의를 진행한다 밝히지 않았는가(관련 보도자료 바로가기).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강화는 의사 인력 증원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의사 인력을 증원하고, 이들이 모두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로 유입된다 하더라도 이는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강화를 위한 여러 요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른 보건의료 직종의 규모는 어떻게 하고, 처우 개선은 어떻게 할지, 역할과 관계는 어떻게 규정할지 등도 필요하다. 인력뿐인가. 대형병원 쏠림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또 다른 공중보건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할지 등등 과제가 많다. 어렵지만 하나씩 따로따로 다루기보다는 전체 그림을 그리고 진행해야 한다. 이쯤 되면 ‘의료현안협의체’보다는 ‘의료개혁협의체’가 더 적합하겠다. 그렇다면 더더군다나 그들 손에만 맡겨 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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