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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공중보건체계를 ‘총체적·변혁적’ 관점에서 평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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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이달 말부터 독감과 같은 4급 감염병으로 전환된다. 2020년 1월, 1급 감염병으로 지정된 지 3년 7개월 여 만이다. 다만 노인과 기저질환자, 면역저하자 등에게 코로나19는 여전히 위협적이다. 확산세가 지속될수록 감염 취약집단의 위험부담도 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검사비와 치료비 지원을 일부 고위험군에 한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좀 더 포괄적 차원에서 고위험군 보호 조치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한편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한 지금, 전인미답의 여정에 대한 총체적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이미 시작된 것일 수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혹자는 전수감시 종료로 전체 확진자 수가 집계·공표되지 않는 내달 1일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첫 날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연구소는 일찌감치 ‘포스트’ 코로나 시대(체제)를 말해왔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이는 당면한 공중보건 위기를 사회 변화의 기회로 만들기 위한 수행적 실천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몇 년간 크고 작은 재유행이 반복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더 나은 사회로의 지향을 담아 오늘 다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언명할 필요가 있다.

 

새 시대를 열기 위한 평가는 어떠해야 할까? 지난 팬데믹 경험을 복기하자는 언론 칼럼과 사설이 넘쳐나는 가운데 통상적 의미의 평가는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팬데믹과 그 대응이 경제와 산업, 교육, 의료 등 사회 각 분야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연구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기존 (주류적) 접근들이 ‘사회적인 것(the social)’으로서의 코로나19의 의미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팬데믹을 ‘사회적인 것’으로 본다는 것은 이를 구조적 문제로 이해하겠다는 뜻이다. 코로나19가 사회적 불평등을 더 심화시켰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평가들은 팬데믹을 단지 예기치 못하게 발생한 자연재해의 일종으로 인식하는 데 그침으로써 코로나19를 초래하고 이를 통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구조적, 체제적 문제를 주의 깊게 다루는 데 실패하고 있다.

 

우리 연구소는 팬데믹 초기부터 다른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하며 사회적 불평등이 감염(건강)불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인권 중심의 대응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토론회, 연구보고서, 언론 기고 등을 통한 노력이 나름의 성과를 거둔 측면도 없지 않지만, 결국 팬데믹이 기존 불평등 구조를 더 공고하게 만들며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을 막는 데 역부족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사회적 재난 상황 속에서 한때나마 열린 기회의 창을 이용해 좀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의 이행 과정을 추동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이것이 ‘코로나 불평등’ 현상의 이면에 자리한 구조와 메커니즘을 포착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으며, 먼저 공중보건체계의 감춰진 본질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공중보건체계는 모두가 평등하게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공중보건체계를 운영하는 핵심 주체인 국가의 가장 큰 이해관계는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태생부터 부국강병을 목표로 했던 공중보건은 국가 중심적 관점과 논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통치에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에서 공중보건 위기를 관리하는 가운데 취약한 인구집단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생명정치. 건강과 생명을 돌보는 책임을 국가에서 개별 시민으로 전가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이렇게 공중보건체계를 통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지난 팬데믹 시기에 겪어야 했던 사회적 고통들이 꼭 방역·대응에 따른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가 아닐 수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공중보건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과학기술주의 역시 통치를 이롭게 하는 구조적 요인이다. 공중보건 위기를 과학기술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까지 과학기술의 영역으로 떠넘김으로써 국가의 책무성을 축소시키는 통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과학방역 대 정치방역’ 프레임을 강조하고, 미래 신종감염병 유행 대비를 위한 예측·감시 체계 구축과 백신·치료제 개발에 주력하는 까닭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한편 우리는 공중보건체계가 자본주의에 철저히 조응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 하에서는 자본 축적 동기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공중보건체계를 운영하는 게 국가 통치의 정당성 강화에도 유리하다. 지난 팬데믹 기간에도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경제적 이윤 추구의 기회로 삼으려는 ‘코로나 자본주의’가 횡행하였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코로나19와 자본주의는 서로를 강화시켰다. 자본주의적 자연자원 추출과 도시화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노출과 확산에 기여했고, 코로나19는 구제 금융, 규제완화 등을 통해 자본의 이익에 복무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국내에서도 코로나19는 비대면진료(원격의료) 도입을 비롯해 개인 데이터를 활용하는 디지털 플랫폼 시장의 확장에 기폭제가 되었다. 코로나19는 자본주의에 위협이 되기보다 오히려 활로를 뚫어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또한 우리는 팬데믹 국면에 드러난 생명가치의 위계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라도 체제를 고려해야 한다. 자본은 위기 상황에서 누구의 생명이 더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지 계산하고 식별한다. 코로나 사망자 가운데 절대 다수가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들이었다는 것이 오로지 의학적 이유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적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집단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체제와 무관하다고 보는 게 더 어색하다.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필수’ 노동자들과, 사회적 거리두기가 어려웠던 시설 입소자, 홈리스, 미등록 이주노동자 등도 자신의 생명가치가 열등하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팬데믹은 기존 사회적 불평등을 사망가능성의 불평등으로, 주디스 버틀러 식으로 말하면 애도가능성의 불평등으로 드러내며 불평등 체제에 일조하였다.

 

반면, ‘체제내적’ 평가들은 공중보건체계에 내포된 이러한 정치경제적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 정책, 사업, 프로그램, 기술 개발만으로 불평등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는 건 착각일 뿐이다. 오히려 구조와 체제의 차원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국가와 자본 중심의 공중보건체계를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사람들의 고통과 필요에 응답하는 사람 중심의 공중보건체계는 마땅히 불평등 문제 해결을 핵심 목표와 원리로 삼아야 한다. 이는 공중보건체계에 대한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와 실질적 통제를 통해 가능하다. 쉽지 않은 과제지만 이것이 불평등 체제의 구조적 폭력에 의해 희생된 동료시민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국가와 자본의 그 반생명적 속성을 비판하고 드러내는 총체적, 변혁적 평가를 시작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체제)를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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