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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가사 노동자를 향한 심리적 학대에 맞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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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인 이야기를 구조화하여 이해하는 것의 효과 –

 

권정은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기꺼이 공개적으로 풀어놓는 요즘은 가히 “‘우울’ 에세이의 전성시대”라 할 만 하다(☞관련 논문: 바로가기). 에세이뿐만 아니라 소규모 글쓰기 모임인 글방 역시 그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자면 점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과 나누고 기록하는 것을 열망하는 듯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개인의 경험을 어떠한 관점으로 해석하고 공유해야 할까?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자신의 삶 속에서 겪는 다양한 어려움은 그저 한 개인의 것일 뿐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미 잘 알려진 1960-70년대 서구 페미니즘 운동의 구호처럼 개인적인 것은 가장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질문들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제시해주는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이주 가사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경험한 심리적 학대의 장기적인 효과를 보여주고, 이들이 그동안 어떤 방법들로 대처해왔는지 분석한다(☞논문 바로가기: 이주 가사 노동자가 겪은 심리적 학대와 그에 따른 장기적인 영향 관리). 칠레로 이주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여성 가사 노동자들을 인터뷰한 이 연구는 61명의 연구 참여자 중,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3명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연구진은 이야기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재서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현재의 상황을 (재)구축해나간다는 것이다.

 

먼저 연구진은 마리벨, 셜리, 지나, 이 세 명의 연구 참여자들이 과거에 겪은 심리적 학대가 이들의 심리사회적 웰빙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탐구한다. 연구진이 “심리사회적” 웰빙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개인적 경험의 심리적인 차원들은 결국 사회적 요소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심리적 영향을 병리화하거나 의료화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고용주들은 이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고, 감시카메라 앞에서 몇 시간씩 서있으라며 처벌하기도 했다. 외출을 금지하거나 다른 의사소통 수단을 차단하여 고용된 집 밖의 누구와도 연락하지 못하게 했다. 협박을 일삼은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러한 심리적 학대는 이주 노동자들이 과거에 겪은 유사한 몸의 기억들 역시 불러일으켰으며, 심리적 고통은 몸이 아픈 증상으로 신체화되어 나타났다. 지나의 경우에는 우울감 등의 심리적 고통에 더하여 자살 생각을 빈번히 하게 되었다. 연구진은 기존의 연구들과 달리 이 연구가 ‘장기적인 효과’에 주목했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 이는 다시 말해, 마리벨, 셜리, 지나가 겪은 심리적 학대가 10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신체적 고통과 자살 생각 등을 지속적으로 야기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들은 오랫동안 지속된 부정적인 영향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했을까? 연구진은 연구 참여자들이 활용한 여러 방법들을 제시한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떠올리지 않고 잊으려 했다. 더불어 종교적 실천들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루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연구진이 가장 주목한 방법은 바로 대안적인 이야기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지칭하는 대안적인 이야기란, 자신이 경험한 것이 그저 개별적이거나 특수한 것이라기보다는 대다수가 겪은, 집단적이면서 문제적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마리벨, 셜리, 지나는 고용주들로부터 겪은 심리적 학대를 단지 몇 명의 “나쁜 고용주”가 행한 것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이러한 학대가 결국 차별적이고 가치폄하적인 이주 담론과 정책 등의 효과로 발생하게 된 구조적 폭력이었다고 해석하게 되었다. 이러한 폭력은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담론의 영향으로 인해 가사노동자들이 노동법이나 이주 정책의 규제 및 보호 등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일어나는 구조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이라는 새로운 해석은 이들이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재정립시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후에 발생하는 유사한 상황들에 대응하는 방법 역시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재해석을 통해 이들은 ‘과거의 피해자’라는 위치에서 벗어나서 ‘자율적인 행위자’로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도 이 여성들은 참거나 침묵하기보다는 적극적인 행위자로서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존재로 점차 변해갔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구조적인 힘에 맞서는 주체로 탈바꿈한 것이다. 더불어 연구진은 이러한 탈바꿈이 마리벨, 셜리, 지나의 심리사회적 웰빙에 기여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제가 그동안 겪어온 일들이] 다 기억나요. 그래서 슬프기는 하죠. 그래도 이제 저는 성인이니까[달라졌으니까] 맞서 싸워야 해요.”

 

첫 문단에서 제기한 질문들로 다시 돌아가보자. 개인의 경험을 해석하는 관점은 어떠해야 하며 이를 공유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논문의 연구 참여자들의 경우에 비추어보았을 때, 개인이 겪은 고통은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구조적으로 발생한 경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고통을 구조적 폭력으로서 의미화하는 것은, 화자를 단순히 피해자로만 고정시키는 것에서 벗어나 부정의한 구조에 대항하는 행위자로 변화하도록 이끈다. 그 과정에서 심리사회적 웰빙이 향상됨은 물론이다.

 

자신의 사적인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용기 있고 훌륭한 일이다. 이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구조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 의미는 더욱 커지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인 이야기가 드러내는 것은 결국 가장 정치적이면서 구조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 서지 정보

 

Chan, C., & Trahms, C. (2023). Managing the long-term effects of psychological abuse on (im) migrant domestic workers. Culture, medicine, and psychiatry, 1-22.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는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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