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곤 발굴을 너머 빈곤 종식으로 –
지난 월요일, ‘송파 세 모녀’ 사건 10주기를 맞아 추모제가 열렸다. 추모제를 연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를 향해 복지 사각지대 해소와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촉구했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생활고로 인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사회적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제도적 개선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사건 이후 ‘세 모녀 법’이라 불리는 관련 법들의 제·개정이 이뤄졌고, 그에 따라 지난 2015년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맞춤형 급여체계 개편과 복지 사각지대 발굴시스템 도입 등의 주요 변화가 있었다.
복지부 역시 10주기를 맞아 그간의 복지 사각지대 발굴·지원 대책의 성과를 자찬하는 듯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요지는 시스템 구축·개선을 통해 많은 수의 복지 위기가구를 발굴하여 여러 형태의 복지서비스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위기가구 발굴자료를 입수해 분석한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상자로 확인된 이들 가운데 기초생활보장급여 수급자가 된 이들은 2021년 4.3%, 2022년 4.2%, 2023년(1~10월) 3.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례는 일회적, 단기적 지원 성격의 민간 자원 연계에 그쳤다(☞관련기사: 바로가기).
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발굴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무슨 보존가치가 있는지 유물(빈곤)을 발굴했다가 다시 고이 덮어주는 형국이다. 여전히 급여의 보장성 수준이 충분치 않지만, 그럼에도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울타리 안으로 편입시키는 게 생활고로 인한 절망적 죽음을 예방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떤 복지 지원 사업, 프로그램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발굴보다 더 중요한 건 핵심 사회적 안전망인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포괄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 과제에 줄곧 소극적 입장을 보여왔고, 의료급여의 경우 특히 더 그렇다. 송파 세 모녀와 같이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비극을 맞이한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건강보험료 장기체납자였다는 점이다.
공적 의료보장체계를 대표하는 건강보험제도는 보험료 납부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렇듯 최저보험료조차 납부하기 힘들 정도로 빈곤한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의료급여제도다. 그런데 2022년 기준, 상대적 빈곤율(중위소득 50% 기준)은 약 15%인 반면 의료급여 수급자는 약 3%에 불과하다. 즉, 빈곤층의 1/5에 해당하는 이들만 의료급여 수급권을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빈곤층 가운데 일부만이 의료급여 수급자가 되는 것은 바로 엄격한 소득 기준(기준중위소득 40% 이하)과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이다. 정부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의 폐쇄적 논의 구조를 통해 중위소득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의 기준중위소득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수급자 범위를 통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준중위소득 40% 이하라는 더욱 제한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또한, 시대착오적 규정임에도 여전히 폐지되지 않고 있는 부양의무자 기준이 수급 진입의 큰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소득 기준은 충족되지만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의료급여 자격을 얻지 못하는 이들이 약 73만 명일 것으로 추정된다(☞관련자료: 바로가기).
평등권 침해와 같이 부양의무자 기준에 내포된 위헌성과 부정의한 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사회보장법 연구 분야에서 상당히 논의된 상태다. 실제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에 대한 사회적 여론 또한 높은 편이며, 전임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포함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주거·교육 급여의 부양의무자 기준은 일찌감치 폐지되었고 생계급여도 그 기준이 대폭 완화되었지만, 의료급여 만큼은 “재정부담이 크다”, “도덕적 해이가 우려된다” 등을 이유로 폐지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 사이 노인, 아동,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조금씩 기준 미적용 대상을 넓혀오긴 했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올해부터 추가로 수급자가 중증장애인 가구일 경우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것으로 완화했다고 하지만, 여기에 해당되는 수는 (정부 보도자료에 따르더라도) 고작 5만 명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11월 국민권익위원회는 건강보험료 체납 문제 해결을 위한 ‘중장기’ 방안으로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정부에 권고했다. 설사 정부가 권익위의 권고를 수용하는 입장을 밝히더라도 구체적 계획과 예산 편성이 뒤따르지 않는 한, ‘공수표’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 까닭은 정권을 불문하고 일관되게 이어져 온 정부의 대(對)의료급여 정책기조 때문이다. 이는 한 마디로 재정관리의 효율성 제고다. 다른 말로 하면 의료급여 비용 지출 통제로, 즉 최대한 돈을 덜 쓰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일반 조세 재원으로 운영되는 만큼 의료급여에 대한 재정절감 동기가 클 수밖에 없다. 또 의료 이용의 불확실성 때문에 지출상한을 설정하기 어렵고, 한번 늘어나면 다시 줄이기 힘든 경직성 예산이기도 하다. 이러니 수급자 규모를 1.5배 늘리는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정부가 실행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법에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의료급여 대상자 수가 줄곧 전체인구 3%, 150만명대에 묶여 있는 까닭은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이 돈에 맞춰 사람을 잘라내 왔기 때문이다. 이는 의료급여제도가 시작된 2001년부터 2022년까지, 전체 정부예산 대비 의료급여 예산의 비중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추이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2001년 정부 예산의 7.4% 규모였던 복지부 예산은 2022년 10.8%까지 늘어났다. 반면 의료급여 예산(국비)은 2001년 정부 예산의 1.58%였다가 2022년에는 1.30%로 줄어들었다.
계속 감소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2004~2006년 기간에는 의료급여 예산 비중이 증가하여 2006년에는 1.84%까지 달하였지만 이에 맞추어 정부는 ‘의료급여 제도혁신’이라는 말로 여러 비용통제 정책들을 도입했다. 당시 비용지출이 큰 폭으로 증가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일부 차상위계층을 의료급여로 포함시키면서 그 수가 185만명까지 늘어났기 때문이었는데 결국 이들은 다시 건강보험(차상위 본인부담경감제도)으로 떠넘겨졌다.
지난 2007년 이후 대상자 포괄성 측면에서 볼 때 의료급여의 제도적 보장성은 정체 또는 퇴보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예산비중의 변화 추이에만 민감한 재정당국의 관점에서는 아마도 ‘성공’적인 제도 운영이었다고 자평하지 않을까 싶다. 정책 관료와 경제 전문가들의 눈에는 의료급여의 높은 문턱으로 인한 현실의 고통이 희미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정당국은 지금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는 모양새다. 지난해 의료급여 예산 불용액이 약 7천억원에 달했다고 한다(☞관련기사: 바로가기).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과소예산편성으로 연말 진료비 미지급금 사태가 연례행사처럼 반복됐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복지부는 즉각 반박자료를 내며 예산편성시 추계한 의료수요보다 실제 의료이용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하겠지만, 일인당 의료이용량이 줄었다기보다 현 정부 들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비급여의 급여화) 정책이 폐지됐음에도 과거 진료비 지출 증가율을 관성적으로 반영해 추계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핵심은 대상자 수 뿐만 아니라 급여 보장성 수준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비용통제에 힘쓴다는 점이다. 지난해 발표된 3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을 보면, 이용억제에 별 효과를 못 본 선택병의원제에 본인부담금을 도입하고, 1종 수급자의 외래이용 본인부담률도 ‘물가상승’을 고려해 ‘현실화’(=인상)하는 한편, 장기입원문제 해소를 위해 입원 연장승인제 도입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이뤄지는 의료급여 수급자의 ‘건강관리책임 강화’라는 목표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형태로 구체화된다. 수급자의 건강을 위해 재정효율성 향상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재정효율성을 위해 건강향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흔히 바람직한 모델로 표상되는 의료급여사례관리나 재가의료급여사업 역시 이 구조적 지향과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주 발표된 역대 최저 합계출산율,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사회적 고통의 정점에는 지금 우리 곁에서 빈곤과 불평등, 차별로 죽어가고 있는 동료 시민들이 있다. 송파 세 모녀 사건과 같이 더 이상 의료안전망의 미비로 인한 비극적 사건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그동안 미뤄왔던 과제인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포함한) 의료급여제도의 보장성 강화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이 두려워 죽음으로 쫓겨나지 않는 사회, 가난하더라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사회, 가난을 만들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자.” (<송파 세 모녀 10주기>, “가난 때문에 죽지 않는 세상! 빈곤과 차별 철폐를 위한 추모 행동” 결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