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기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지역의료가 위기라는 말과 글이 넘쳐나는 시절이다. 당장에 특단의 조치를 도입하지 않으면 지역의료는 이내 붕괴하고 말 것만 같다. 현실에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위기의 언설 속에 누가 주체로 호명되어 무엇을 하도록 틀 지어지느냐는 것이다. 의료를 이용하지 못하게 될 당사자인 ‘지역’이 정작 중앙의 조치만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면, 위기를 초래한 바로 그 구조가 다시금 재현될 뿐인 것은 아닐지 질문해야 한다.
지역이 직면한 위기 상황에서 누가 대응의 주체일 수 있을까? 오늘 소개할 연구는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의 아이티를 배경으로 국가의 위기 대응과 지역 차원의 대응을 다룬다(☞논문 바로가기: 현지화 관점으로 코로나19 기간의 원조 바라보기). 아이티는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사회경제적으로 해외 원조에 의존하는 정도가 큰 취약국가다. 인도주의적 원조 활동은 대체로 원조받는 ‘지역’을 문제 해결의 주체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코로나19로 외부 인력이 자국으로 돌아가면서 지역 주도의 활동 공간이 마련된 측면이 있었다.
원조의 지역화 또는 현지화(localization) 문제를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전문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지역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의 중요성을 은폐했다. 원조를 위해 파견된 국제 인력은 ‘전문가’로 간주되는 반면, 현지인은 단순한 보조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현지인은 흔히 정보 접근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국제 인력이 기피하는 영역에 배정되곤 했다. 지역 행위자는 무능력하고 부패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고, 주민들 역시 취약하고 무력한 피해자, 수동적인 대상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조의 현지화란 ‘주민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지역 당국의 리더십과 지역 시민사회의 역량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강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문제 해결의 전 과정에 ‘지역’이 주체로서 참여하여 권력 불평등을 완화하고 더 적실한 대안을 실현하게 하자는 것이다. ‘지역’은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지정학적 맥락을 더 잘 이해할 뿐 아니라, 문제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당사자로서 정당성과 책임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지역’은 누구인가? 외부자 중심의 시각에서 지역은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묶음인 동시에 실체가 모호한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다. 단순히 현장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누군가이거나, ‘국가’ 또는 ‘국제’의 상대 개념, 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여겨져 외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 정도로 이해한 것이다. 이처럼 단선적인 이해는 ‘지역’ 개념의 다차원적 특성을 무시하고, 지역과 비(非)지역 간 상호 관계의 복잡한 역동을 간과한다. 무엇보다 지역의 다양한 행위자가 주체로 설 가능성을 배제한다.
현지화 관점으로 아이티의 코로나19 대응을 살펴보면 국가/국제/외부자 중심의 인식과 관행, 그로 인한 문제가 반복되는 동시에 ‘지역’이 주도하는 대응의 가능성이 드러난다.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아이티 정부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와 같이 국경을 폐쇄하고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했다. 10인 이상의 모든 모임을 금지하고 생활터와 공공장소의 인원을 제한했으며 학교, 교회 등 주요 사회시설을 폐쇄하였다.
아이티 정부의 하향식 조치는 ‘국제 표준’에 따르면 적절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아이티 현지의 상황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아이티에서 인구 대부분은 비공식 경제에 종사했고 일상 활동을 통해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이들에게 이동이나 모임을 제한하는 것은 곧 생계를 위한 소득 일체가 끊긴다는 의미였다. 국경 폐쇄 역시 국경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에게 심각한 문제였다. 이들은 학교나 병원에 가거나 생필품을 거래하는 등 일상 활동을 위해 국경을 넘나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공식 경로를 차단하자 일부 주민은 비공식 경로를 이용했고, 결과적으로 납치나 성폭력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학교를 폐쇄하면서 수십만의 아동이 학교 급식을 이용하지 못한 것도 큰 문제였다. 한국과 같은 고소득 국가와 달리 급식 중단은 아이티 아동의 기아 위험 증가로 직결됐다. 또한 학교 폐쇄로 학생들이 9개월 동안 교육을 받지 못하자 교육부는 디지털 플랫폼을 출시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플랫폼 자체의 교육 콘텐츠가 부실했을 뿐 아니라 현지의 인터넷 연결망과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 디지털 환경에 접속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코로나19 방역 조치는 아이티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은 사회 연결망, 소규모 조직과 자원, 창의력을 활용해 고유한 대응 방식을 개발해 나갔다. 예를 들어 작은 마을의 환경운동 조직은 깨끗한 물에 대한 접근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깨닫고, 주민들로부터 물통을 수집해 88개의 손 씻기 스테이션을 설치했다. 수제 손 소독제를 제작하는 방법을 주민들에게 전파하고, 감염병 예방 수칙을 교육했다.
수녀회가 운영하는 학교는 학교 폐쇄에 대응하여 홈스쿨링을 장려하고 학부모의 교육 역량을 강화하는 활동을 했다. 아이티의 많은 학부모가 자녀 교육에 관심이 없고 역량도 부족했지만, 학교와 가정이 지리적으로 밀접하다는 점을 활용해 꾸준히 학부모를 지원할 수 있었다.
한 지역사회조직은 국가가 제공하는 정보가 소셜미디어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닿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은 직접 마을을 방문해 마스크를 제공하고 캠페인을 진행하며 주민들과 소통했다. 다른 의료 관련 단체는 자원봉사자를 훈련해 방문보건요원으로 양성했다. 방문보건요원은 집집마다 찾아가 교육 전단지를 전달하고 증상이 있는 사람을 선별해 병원으로 보냈다.
아이티의 사례는 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반드시 더 정확하고 효과적인 대응의 주체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가가 지역의 특수성을 무시했을 때 현지의 지역사회 기반 단체, 주민 지도자, 상인, 학부모, 학생, 자원봉사자, 물품을 기부한 주민 등 다양한 주체가 나름의 위기 대응 방식을 개발했다. 이들이 지닌 자원은 외부자의 시각에서는 미미했을지 모르나,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연결 지으며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 연구진은 주민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현지화의 과제는 무엇보다 ‘지역’이 다양한 행위자를 포함하는 능동적 주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지역의료의 위기라는 언설 앞에서 ‘지역’이 무력함을 느끼게 하는 수많은 의문이 있다. 이 의문들을 돌파하는 방법은 일일이 답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틀을 바꾸는 질문으로 되묻는 것이다. 지역은 주체가 될 수 없는가? 문제 해결의 주체로서 ‘지역’은 누구인가?
*서지 정보
Fujita, Y. & Sabogal Camargo, A.M.. (2021). Perspective of localization of aid during COVID-19. ISS Working Papers – General Series 673, International Institute of Social Studies of Erasmus University Rotterdam (ISS), The Hague.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는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