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은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청년들의 우울과 불안 등 정신 건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들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이는 정신건강의학과가 진입장벽이 높거나,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심리상담 서비스가 비용 부담스러웠던 점을 고려할 때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정신건강서비스 이용률이 낮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리면서 그 이유로 정신건강의학과의 높은 문턱, 낙인 우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 등이 꼽힌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그런데 낮은 서비스 이용률은 정말 위의 이유들 때문일까? 그렇다면 정신건강서비스를 폭넓게 지원하는 것이 충분한 해결책이 될까? 자기돌봄은 과연 서비스 이용을 방해하기만 하는 것일까?
오늘 소개하는 논문은 제도적 돌봄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자기돌봄의 사회적이며 상상적인 측면에 주목한다(☞논문 바로가기: 자기돌봄의 상상 세계: 학생 정신건강을 위한 추측적 희망의 미래). 캐나다 소재 대학교의 정신건강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이 논문은 연구자가 캠퍼스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제공자 및 이용자를 인터뷰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서비스 제공자들은 청년들이 자기돌봄을 활용하는 것이 제도적, 전문적 서비스 이용을 지연시키거나 막는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기돌봄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청년들을 회피적, 비순응적, 무책임한 개인으로 간주하곤 했다. 그러나 연구자는 청년들이 자기돌봄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 그리고 이들의 자기돌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분석한다. 다시 말해, 자기돌봄이 제도적 돌봄과 대립되거나 ‘진짜 돌봄’에 방해가 된다는 가정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캠퍼스에서 제공되는 ‘전문적인’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자기돌봄을 실천하고 있을까?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이미 서비스를 이용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그 경험이 불만족스러워 더 이상 이용하지 않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 실천하고 있었다. 불만족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청년들의 실제적인 삶의 복잡한 상황을 다루지 못한다는 점, 둘째, 개인의 감정적인 고통을 넘어서는 구조적인 어려움을 개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신건강서비스가 개인적이고 내재적인 요소에만 주목하며, 구조적인 문제는 마음 외부의 것으로 간주하여 간과하는 경우, 청년들은 서비스 이용을 중단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도리안(가명)은 이과계열 박사과정 학생으로, 실험실에서 주 60시간 일하며 연간 13,500달러(한화 약 1800만원)를 받는다. 그러나 이 금액은 그가 사는 도시의 8개월 치 월세에도 미치지 못한다. 학비와 기타 생활비도 충당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는 학생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학업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는 문제’로 축소되어 이해된다고 비판한다.
“대학에서는 우리가 성적 걱정을 너무 많이 한다고 하죠. 학생들이 실패를 두려워하고, 완벽한 성적만을 바란다고요. 그런데 제가 성적을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직업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저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잖아요. 제 파트너와 저는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찾아야 하니까요. 실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것이 제 미래에 아주 실질적인 영향을 미쳐요. 성적은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에요.”
릴리의 사례를 보자. 릴리는 젠더폭력의 영향으로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대학생이다. 그녀는 학교의 일대일 상담을 이용했지만, 세 번의 상담 후 이용을 중단했다. 젠더기반 스트레스 요인이 계속되고, 가부장적 현실이 바뀔 수 없는 상황에서 상담의 역할이 제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가 겪은 [젠더]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담사 선생님께서는 끔찍한 일이라고 공감하시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팁들을 알려주셨어요. 그런데 상담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거리와 버스에서 성희롱(캣콜링)을 당하고, 실험실에서 남자 선배에게 무시당하면서 생각했어요. 상담이 실제로 도와주지는 않는다고. 솔직히 누군가에게 제 이야기를 하는 게 좋긴 했어요. 그런데 제 주변에 항상 트리거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아요.”
이처럼 문제를 개인화하는 서비스에 불만족한 청년들은 상상력을 활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돌봄을 실천하고 있었다. 예술적 취미를 가지거나 비디오게임을 하고,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연구자는 이들의 자기돌봄이 매우 ‘사회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포착한다. 예를 들어, 도리안은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에서 가상의 커뮤니티센터를 만들고, 마을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구조적 문제를 반영해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며, 게임 속에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등의 행동을 한다. 젠더폭력을 겪은 릴리는 성폭력 위기지원 전화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자기돌봄을 한다. 그녀는 전화기 너머의 한 사람을 상상하고, 이 사람이 통화 이후 어떻게 변할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이렇듯 청년들은 자기돌봄의 한 형태로서 자신과 타인의 신체적, 심리적 안녕을 위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이 상상은 절대적 허구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사회적 문제, 기존에 받은 지원의 실패, 불안이 확장되는 상황 등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들은 개인적인 프레임으로만 이해되는 심리적 위기를, 상상의 자기돌봄을 활용함으로써 집단적 안녕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상상은 자기돌봄의 사회적, 집단적 성격을 강조하는 실천이다.
개인적 고통을 심리적으로나 의학적으로 극복하도록 돕는 것에 이점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 고통이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되었는지, 이를 다 같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상상으로나마 실현할 때 커다란 치유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이 논문의 연구 참여자들은 스스로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의 아픔과 불만족스러운 서비스 경험을 자원으로 삼아, 더 나은 사회적 변화를 위해 도모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 서지 정보
Loa Gordon, 2024. “The Imaginarium of Self-Care: Speculative Futures of Hope for Student Mental Health,” Medical Anthropology Quarterly.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는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