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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개혁에서 환자와 시민은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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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추석 연휴 몸조심하며 보내셨으리라. 몇 달째 이어지는 의정갈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시민과 환자들에게 ‘사과할 생각은 없다’는 야멸찬 정부 때문인지, 한시적으로 응급실 진찰료를 인상한다는 느닷없는 발표 때문이었는지 그렇게 각자도생의 추석이 지났다.

 

정부는 연휴기간 응급실 내원환자가 지난 추석에 비해 32% 감소했다며, 도리어 ‘심지굳게’ 의료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현재 정부에서 ‘응급실 미수용’ 에 따른 사망자 수 등에 대해선 집계하지 않고 있으니, 큰 폭의 의료이용 감소가 오히려 필요한 처치의 누락과 지연의 지표가 아닌지 불안하기만 한데 말이다.

 

잘 준비된 개혁이었나?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2월 이후 ‘의대정원 논란’ 밖에 보이지 않는 이 의료개혁을 둘러싼 피해를 시민들은 대체 얼마나 더 감당해야 하는가. 과연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기다릴 만한 가치있는 개혁인가. 계획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정책 과정과 수단이 조응하는 준비된 개혁이었나.

 

가령 8월 30일 발표한 <의료개혁 1차 실행방안>에 포함된 응급의료취약지 및 응급실 표류 해소 정책을 보자. 여기에는 2025년에야 예산이 집행될 예정이고, 응급의료 이용개선을 위해 이번 추석에 적용되었던 ‘경증 비응급환자의 권역 및 지역응급의료센터 이용시 본인부담 인상’도 명시되어 있다. 또한 정부는 이런 비용구조개선은 환자의 의료이용을 지원하는 계획들, 즉 의료상담 확대, 지역의원 접근성 제고, 전문의뢰제 강화 등과 동반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추석은 어떠하였나? 급한 상황에 대처하느라 응급실 본인부담 인상만 꺼내놓은 것이다. 순차적이고 합리적인 의료개혁의 결과로 시민들이 응급실 이용을 줄이도록 이끈 것이 아니라, 불충분한 응급실과 의료비 인상의 부담으로 의료이용을 줄이게 한 셈이다.

 

또한 건강보험은 적절하게 이용되고 있는가. 2월 이후 비상진료체계운영과 수련병원 급여 선지급 등으로 건보재정은 지금까지 2조 가까이 투입되었고, 앞으로 얼마나 더 지출될지 알 수 없다. 정부의 정책실패로 인해 의사인력이 이탈되어 다른 개혁과제들이 추진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오로지 금전적 보상으로 대응하는 정부의 정책수단으로 건강보험 재원이 소모되고 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건강보험이라는 우리 사회의 커다란 공적 자산과 역량이 민간의료자본을 증식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역·필수의료 강화를 위해 향후 5년간 건강보험 재정 10조를 투자한다는 계획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다른 과다 의료를 유인하는 비필수·비급여 진료에 대한 통제 없이 ‘3천여 개의 건강보험 수가인상’ 이라는 미시 조정을 통해 결국 민간의료의 확장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목적의식적인 공공보건의료의 확충, 의료전달체계 조정 등 다른 체계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수가인상은 공공보건의료의 상대적 위축, 민간의료의 주도성 강화로 이어지면서 공적의료보장제도의 재원이 오히려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약화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의료개혁에는 현재 환자-보험사 양자구조의 의료비 청구 방식을 앞으로 의료기관이 보험사와 협의하도록 하는 3자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정부가 나서서 민간보험을 강화하는 별도의 의료생태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은 보험산업의 활성화와 의료민영화를 위하여 건강보험을 디딤돌 삼는 것을 넘어, 건강보험의 불안정성을 야기하는 중대한 도전이다.

 

개혁의 주체인 시민과 환자는 어디 있는가?

 

정부의 의료개혁은 상당부분 기존의 의료이용 관행과 의료제도를 바꾸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의사증원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환자와 시민에 대한 고려는 충분했다고 볼 수 있을까.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안착시키고 이해관계자들에게 새로운 규범을 요구하는 과정은 정책 당사자이자 개혁 주체인 시민들의 광범한 이해와 동의에 기반해야 한다. 그러나 환자와 시민들에게 의료개혁의 목적과 내용, 절차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윤석열정부의 정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치학자 제임스 C.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라는 책에서 ‘하이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그것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 생산의 증대, 자연에 대한 정복, 그에 상응하는 사회질서에 대한 합리적 설계 등 자연과 사회에 대한 강력한 자기 확신의 이데올로기이다. 하이 모더니즘의 핵심은 통치의 계획을 설계한 자신들의 지적 역량에 대한 과도한 확신 그리고 계획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실제보다 똑똑하지 않거나 무능한 존재로 간주하는데 있다.

 

윤석열정부는 원전·에너지·환경정책에서 기술과 과학에 대한 남다른 자기 확신으로 ‘기후생태의 우선보호’라는 기후재난시대의 규범에 역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와 배치되는 특정한 역사적 관점으로 근현대사를 재편하고, 인권과 평등같은 진보적 성취를 폄훼하고 퇴행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하이 모더니즘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물론 스콧에 따르면 이런 하이 모더니즘은 시민들의 경험적·암묵적 지식 또는 실행지 그리고 그들의 결집을 이길 수 없으며, 통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신념에서 나온 그런 국가적 사회공학은 실패하고 만다.

 

지금 의대증원을 둘러싸고 한치 협상의 여지없이 대립하고 있는 정부와 의사집단의 갈등은 실상 자신들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국가권력과 전문가권력(경제권력)의 다툼이다. 국가는 지금까지 의료의 공공성을 망각하고 보건의료제도를 거대한 영리산업으로 성장하도록 방관했고, 의사집단은 의료전문직에 기대되는 사회적 책임이나 헌신 같은 직업윤리로 자율규제하는 대신 사회적 특권과 경제적 보상을 독식하는 이익집단으로 변모했다.

 

시간이 갈수록 국가와 의료전문가가 ‘개혁’을 내세우며 서로 더 유리한 정치적 입지와 경제적 이익을 쟁취하려고 할 뿐, 시민들의 삶과 고통이나 사회가 지켜야 할 공적 가치, 그리고 그 개혁의 주체인 시민의 권리와 이익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고 있다.

 

우리는 개혁을 단지 뜯어 고친다는 것을 넘어 지금보다 더 나은 제도와 규범을 만들고자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권력집단의 특권을 강화하는 것을 개혁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혁은 궁극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좋아지게 하고, 자신의 삶에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개혁은 그 과정이 투명하고 구체적이고 책임감 있게 계획되지 않으면, 권한과 임무를 나누는 과정에서 정치적 저항에 직면한다.

 

지금 시민들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윤석열정부와 의사집단이 ‘의료개혁’ 이란 이름에 걸맞게 각각 자신의 권한과 책임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낼지 지켜보고 있다. 서로를 비난하며 한계에 이른 보건의료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자신들에게 없음을 계속 입증하는 한, 의정간의 명분없는 갈등을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다. 갈등 조정의 정치, 사람을 살리는 정치, 이런 정치의 기본을 못하는 권력을 시민들은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

 

의료인력, 수가체계, 지역의료, 의료전달체계 등 모든 의료개혁 과제들은 우리 사회가 해결을 미뤄왔던, 그래서 더 단단해진 사회적인 문제이다. 이 역사적 책임을 나누기 위해 정부와 의료전문가, 시민사회의 너른 이해당사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더욱 잘 짜여진 보건의료개혁으로 나아가는 논의를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한다. 우리의 건강할 권리가 더 이상 볼모잡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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