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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각오’라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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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현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역대 최고 득표율로 당선된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당선 후 첫 정기총회에서 “의료를 사지로 몰아가는 망국의 의료정책을 죽을 각오로 막아낼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보란 듯이 이어지는 강경투쟁 행보와 발언들은 내부구성원들의 우려를 자아낼 정도로 과감했다. 끊임없이 배우고 교류한다는 ‘영피프티’답게 매번 놀라움을 선사하는 저력이 남달랐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정치인의 사즉생 정신이 한낱 출마선언과 유세현장의 퍼포먼스에 불과하게 비춰질 지경이었다.

 

다 같이 살 길을 도모하는 지루한 협의보다 죽도록 투쟁한다는 ‘매콤한 각오’는 사람들을 확실히 유혹적인 길로 끌어들이고 있다. ‘죽지 못해 산다’거나 ‘죽기 살기로 버텨라’는 말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수명을 깎아 먹고, 건강을 갈아 넣는 삶에 무뎌지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 변화하면 사회가 변화하듯, 삶의 질이나 기대수명을 측정하는 연구도 죽음을 반영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죽는 게 나은 상태(worse than death)’나 ‘죽는 것보단 나은 상태(better than death)’를 식별하고, 더욱 엄밀한 측정도구와 측정방법을 개발하면 건강의 가치도 더욱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소개하는 연구(☞논문 바로가기: 죽음은 건강상태의 가치를 평가하는 필수요소일까?)에서는 설령 사람들이 삶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 빗대어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건강의 가치를 죽음과 관련지어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죽음은 건강의 상태가 아니다. 즉, 우리의 건강상태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살아있는 사람의 고통이나 불건강은 죽음과 동치될 수 없다. 둘째, 사람은 죽음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많은 연구에서 죽음은 표현되는 방식이나 응답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특히 가상의 상황에 대한 답변과 실제 죽음의 문턱에 서는 경험을 할 때의 판단은 큰 차이가 있을 것임을 밝혀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은 성적을 올리거나, 취업을 하거나, 혹은 대학원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수명을 갈아 넣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마 어떤 이들에겐 재수생, 만년 취준생, 박사수료자로서의 삶은 ‘죽는 것보다 못한’ 상태로 인지될 수도 있다. 따라서 임의의 상황에 임의의 건강가치를 가정하는 평가방식만으로는 죽음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기 어렵다. 셋째, 죽음의 가치를 평가하더라도 그것이 건강의 가치나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순 없다. 건강과 대비되는 상태로 죽음을 정의하고 0이나 음수의 값을 매겨보자. 그렇다면 사망한 사람의 (건강 관련 삶의 질 수준을 고려한) ‘질보정수명(quality-adjusted life year, QALY)’은 얼마일까? 복잡한 계산은 필요하지 않다.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 그 어떤 치료를 제공하더라도 그에게 남은 수명은 0이다.

 

이처럼 죽음을 가장 나쁜 수준의 건강으로 측정하려는 시도는 건강에 대한 가치판단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부정확해서 궁극적으로 의미 없이 난해한 수치만을 도출하게 된다. 따라서 연구진은 여전히 ‘죽는 게 나은 상태(worse than death)’나 ‘죽는 것보단 나은 상태(better than death)’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되, 사회적으로 부상하는 생애말기 의료나 존엄사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건강의 가치를 죽음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건강을 인식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의 질과 건강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넘쳐나는 죽음에 대한 비유가 누구를 진짜 ‘죽음’ 속에 방치하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죽음에 빗대어, 삶의 가치를 저울질당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치매에 걸리거나, 가난하거나, 장애를 갖고 살 바에는 죽는 게 낫지 않냐는 조롱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다행히 2024년부터 보건복지부는 긴급돌봄과 가족돌봄청년에게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살 바에는’이라는 말을 명분 삼아 배우자나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하거나, 돌보고 있는 가족이 사망하도록 방조한 사례는 적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취지일 것이다.

 

오늘 소개한 논문에 실린 여러 연구들은 이 ‘비유적 표현’에 어떤 판단이 있는지를 제시한다. 죽음에 가깝지 않은 이들의 비유적 표현은 오히려 건강이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부정확한 판단에 따라 유도된 결과일 수 있다는 의미다. 사람들의 삶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서 있다면, 죽을 각오를 쉽게 입에 올리기보다 죽음의 문턱에 선 이들이 삶을 침범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대책을 만들기 바란다.

 

*서지 문헌

Sampson, C., Parkin, D., & Devlin, N. (2024). Is anchoring at ‘dead’ a theoretical requirement for health state valuation?. Health Economics.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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