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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재난이 건강 불평등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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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지역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이 열흘 넘게 이어지며 큰 피해를 낳았다. 30일 오전 9시 기준으로 7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중 30명이 사망하였다. 현재 주불은 모두 잡혔지만, 계속 불어오는 강한 바람 탓에 잔불이 재발화될 위험이 아직 남아있는 상황이다. 황망하게 생을 마감한 분들을 깊이 애도하며, 하루 속히 산불이 완전히 진화되어 더 이상 안타까운 희생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번 산불 피해는 역대 최대 규모로, 약 5만 헥타르의 산림이 훼손됐고 전소된 주택도 3천채에 이른다. 갑자기 더워진 건조한 날씨에 강풍이 불면서 산불 확산 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이다. 이밖에 산불 진화 인력과 헬기를 비롯한 장비 부족, 뒤늦은 대피 경보, 소나무 위주의 조림 등이 피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산불 재난 대응 체계를 철저하게 점검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듯, 기후변화로 인해 앞으로 이런 대형 산불의 발생 빈도와 강도가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번 산불 역시 극단적 기후 변동에 따라 가뭄, 홍수, 산불이 번갈아 나타나는 ‘기후 채찍질’ 현상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산불 재난의 위험에 맞서기 위해서는 여러 층위의 접근이 필요하다. 관련 예산 확충과 인력·장비 보강, 대응 매뉴얼 재정비와 감시·대응 시스템의 기술적 정교화, 불에 강한 활엽수 중심의 내화수림대 조성을 통한 자연 방화선 구축 등 현재 많이 거론되는 대안들을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기후위기를 심화시키는 정책 기조의 대전환도 함께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우리는 산불 예방과 대피, 복구, 회복 등 모든 대응 과정에서 건강 불평등이 중요한 문제로 고려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재난이 그렇듯 산불에 있어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더 큰 건강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장애인은 산불 위협에 가장 취약한 집단일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장애계는 성명을 통해 “산불 속에서 기적처럼 발견되어야만 살아남는” 장애인의 현실을 규탄하며, 재난 대피에 취약한 장애인을 위한 즉각적인 대책 마련으로, 대피소 거주자를 위한 구체적 지원계획과 의료 지원 대책, 장애인 재난대응 매뉴얼 수립 등을 촉구하였다(☞관련자료: 바로가기).

 

특히 이번 산불의 사상자 대부분은 중고령자였다. 산불 발생 위험이 높은 지역들이 고령화율이 높은 지역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사각지대에 방치된 고령 1인 가구를 신속하게 대피시킬 수 있는 체계 구축이 시급해 보인다. 아울러 임시 대피소에 머무는 동안에도 적절한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보완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산불 재난이 유발한 건강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다. 화상과 같은 직접 피해 외에도 산불은 연기 흡입을 통해 호흡기 건강을 악화시킨다. 또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나 우울, 불안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최근 몇년간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던 미국에서 이뤄진 연구 결과를 보면, 산불에 노출된 고령 집단에서 천식과 정신건강 문제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자연과학 분야에서 재난 취약성은 노출과 민감도, 적응능력의 함수로 정의된다. 노인과 어린이, 임산부, 기저 질환자 등은 동일한 연기량에 노출되더라도 민감도가 높고 적응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만큼 건강 피해가 크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이들도 이러한 고위험 집단에 포함되는데, 그 까닭은 노출을 줄일 수 있는 수단에 대한 접근성이 낮아 연기에 더 많이 노출되거나, 또는 적절한 치료를 받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관련자료: 바로가기). 국외 연구에 따르면, 산불로 인한 대기 질 악화가 실내 오염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는데, 저소득층 거주 구역에서 더 크게 나빠진 것으로 나타났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연구진은 이를 공기청정기 구입과 같은 방어적 투자 능력의 차이로 설명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공간 분석을 통해 여성과 비영어권자, 유색인종 등 사회적 소외집단이 거주하는 구역이 산불 영향에 더 취약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즉,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지역일수록 산불 대비와 피해 복구에 필요한 자원과 정치적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이번 영남 산불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좁게는, 피해 지역 내 노인과 비노인, 장애인과 비장애인,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의 격차, 넓게는 도시와 비도시,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 간의 격차가 산불 재난에 따른 건강 피해의 격차로 ‘발현’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권력의 격차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곳에서 선주민과 함께 머물고 있던 이주 노동자들의 상황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제때 대피 안내를 잘 받았는지, 이재민을 위한 지원에서 소외되고 있지 않은지, 건강 문제가 발생했다면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을지 살펴봐야 한다.

 

특별재난지역이 선포되면 이재민에게 일정기간 의료급여 수급 자격이 부여된다. 이러한 지원은 한국 국적자와 더불어 ‘합법’적으로 체류 중인 외국인에게 제공된다. 이는 곧 미등록 체류자는 제도적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들도 똑같이 산불로 고통을 겪었음에도 말이다.

 

건강 불평등을 줄이고자 한다면 산불 재난의 취약성이 가진 이러한 교차성의 문제를 섬세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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