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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이 주도하는 건강 돌봄, 마냥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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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기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지방정부와 주민들이 건강한 삶을 위해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는다면 어떨까? 영국의 “위건 딜(The Wigan Deal)” 이야기다. 위건은 잉글랜드 북서부에 위치한 인구 30만 명 규모의 자치구로, 과거 석탄 채굴과 면 방직으로 융성했던 전통적 산업도시다. 위건 딜은 지역의 문화적 혁신에 관한 일종의 사회계약으로 볼 수 있다. 지방정부는 세금을 낮게 유지하고, 불필요한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며, 가성비 높은 정책을 추진하고, 지역사회가 서로 돌보도록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 또 주민들은 스스로의 건강과 안녕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활기찬 생활을 추구하며, 지역 상권을 이용하고, 공동체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기반으로 지역의 행위자들이 하나가 되어 상실을 딛고 일어서보려는 시도인 셈이다.

 

영국 정부와 비영리단체들이 위건 딜을 “장소 기반 접근”의 모범사례로 주목해 널리 홍보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오늘 소개하는 연구는 이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논문 바로가기: 장소를 설명하기: 공중보건 영역의 국면 분석을 향하여). 저자들은 위건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오랜 시간 지켜본 연구자로서 정책 문서, 공식 회의 관찰, 언론 보도, 공무원과 인터뷰 등에서 얻은 자료를 활용해 국면 분석(conjunctural analysis)을 시도했다. 국면 분석은 서로 다른 흐름으로 전개된 다양한 갈등과 투쟁들이 특정 시공간으로 모여 어떤 역동을 나타내는지를 다루는 연구방법이다.

 

장소(place)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도 중요하다. 이 연구는 장소를 공간을 가로지르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관계들이 만나는 접합부로 간주한다. 정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외부에 개방되고, 관계에 영향을 받으며, 구성되어 가고 있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장소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위건이라는 ‘장소’에서 벌어진 일을 ‘국면’적으로 다시 서술해 보자. 첫째, 위건 딜은 보수당 정부의 극단적인 긴축 정책이라는 맥락 속에서 출발했다. 예산 삭감에 직면한 지방정부는 공공서비스의 방식을 바꾸는 문화적 변화를 강조했다. 기존의 지역사회 자산을 최대한 활용하고, 건강증진과 예방을 통해 의료 수요를 줄이고, 혁신을 통해 긴축에 대응한다는 논리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지역 간의 재정 격차를 좁히기 위한 핵심 전략으로 제시되었다.

 

둘째, 쇠퇴해 가는 지역의 전통 산업에 대응해 자긍심과 희망의 언어를 재발명해야 했다. “위건을 믿자(Believe in Wigan)”는 위건 딜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미래를 향한 추동력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브렉시트로 상징되는 배타적 보호주의, 민족주의와 공명한 측면도 있었다. 위건은 실제로 브렉시트 투표에서 탈퇴에 투표한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

 

셋째, 건강과 안녕에 대한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특히 양날의 검과 같았다. 한편으로 건강에 대한 의료화된 틀을 넘어 전인적 사람을 중시하는 주민 주도의 건강 돌봄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를 촉발한 구조적인 조건들, 장소의 경계 밖으로 뻗어 있는 힘들은 은폐되고 관계적 불평등의 문제가 지역 내부 문제로 간주되기도 했다. 요컨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권력은 주어지지 않은 채 지역이 역량강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것이다.

 

넷째, 코로나19 대유행을 경험하면서 영국 사회는 긴축의 시기를 반성하며 “더 공정한 재건(build back fairer)”을 요청했다. 하지만 위건 지방정부는 이 요구에 대해 구조 변화 대신 위건 딜의 기존 원칙, 즉 문화적 혁신에 더욱 충실하자는 답변을 내놓았다. 위건 안팎에서 제기된 NHS를 비롯한 보건복지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는 위건 딜의 메시지와 어색하게 병존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종합하면, 연구는 긴축과 혁신, 상실과 희망, 자기 책임화와 권력, 대유행 이후의 변화 요구와 원점 회귀 등 서로 다른 갈등과 모순이 위건이라는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합하는지 보여준다. 저자들은 국면분석을 통해 위건 딜 사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도 장소 기반 접근 자체를 폄훼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특히 위건을 비롯한 장소들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공공 또는 공동 소유, 지역사회 기반 구축, 서비스 직접 생산, 조직된 노동과 포용적인 지역 경제 등의 아이디어가 가진 진보적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다만, 나름의 의미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장소 기반 정책이 지배 이데올로기와 얽혀있을 가능성을 세심히 살펴야 한다는 것이 연구의 핵심 논지다. 지역 주민의 건강을 둘러싸고 서로 경합하는 다중의 흐름을 정확히 식별해야만 진정으로 변혁적인 정치적 대안과 열린 공간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장소 기반의 보건복지 정책은 점차 강조되는 추세다. 2026년 3월 통합돌봄법 시행이 대표적이다. 지방정부와 주민이 건강 돌봄의 주체로 호명되고, 주체적인 건강 관리의 중요성에 관한 논의가 이미 차고 넘친다. 지역이 주도하는 건강 돌봄은 질문할 새도 없이 이미 규범이 된 듯하다. 그 사이, 우리가 논의하고 실천해 온 시공간에서는 어떤 흐름들이 접합하고 있었을까? 모종의 정치경제 질서에 의도치 않게 휘말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지 정보

Lorne, C., & Lambert, M. (2025). Articulating place: Towards a conjunctural analysis of public health. Journal of Critical Public Health, In-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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