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느 자리나 화제는 두 가지뿐이다. 청와대에서 출발한 이른바 ‘정윤회 문건’ 사건 그리고 대한항공에서 비롯된 ‘땅콩 리턴’ 사태. 이래도 나라가 돌아가나 싶을 정도로 모든 일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비정상도 정도 문제지 좋은 말로 하기 어렵다. 모두가 보탠 몇 십 년 노력의 결과가 겨우 이 정도인가 싶다. 집단적 자기 비하에 자학까지 갈까 걱정이다.
언뜻 두 사건은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배경과 내용, 주연과 조연이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사건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본다. 일이 생긴 연유와 해결의 구조가 다르지 않다. 사건은 공통의 구조를 드러내는 징표일 뿐이다.
우리가 갖는 관심은 건강과 복지, 사회정책에 집중되지만, 이 또한 같은 뿌리 위에 있다. 언제라도 또 다른 징표가 될 수 있다는 뜻. 그 말 많은 영리 병원과 원격의료, 복지 후퇴 역시 같은 차원의 사건일지 모른다.
둘의 현상만 봐도 그렇다. 한국 사회의 현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제라도 해결해야 할 어려운 도전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른 무엇보다 관전자의 초연함, 냉소와 무력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 같다.
- 첫째, 민주주의의 후퇴 또는 지체 현상. 정부와 기업에서 따로 일어난 일이지만 많은 점이 닮았다. 여러 공통점 가운데에 개인과 집단 모두 민주적 결정과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두드러진다.
청와대에서 일어난 일은 여전히 낯설다. ‘민주공화국’에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 집단의 모습이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봉건 영주와 그를 모시는 가신을 떠올리게 한다. 도대체 이들의 ‘권력 투쟁’이란 누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도모하는 것인가. 집단 내부와 개인 내면에 민주적 질서를 몸으로 익힌 근거가 없다.
상식으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대한항공의 일도 그에 못지않다. 한국 자본가의 낯익은 실상이긴 하다. 체질과 품성으로 굳어졌나 싶으니, 민주주의가 아니라 근대조차 배우거나 익힌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민주주의의 결핍 또는 부재의 결과, 권력과 권한이 집중되고 그나마 그것은 남용, 오용된다. 지금 드러나고 폭로되는 일의 면면은 그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스스로의 이익조차 챙기지 못하는, 그리하여 공익과 공공성은 멀찍이 제쳐 둔 채다.
- 둘째, 제도화되지 않은 권력이 제도 권력을 대신하는 것. 결국 미숙한 민주주의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비제도적 권력에 더 기우는 사회는 불행하다. 세습과 가신, 혈연과 학연, 그 무엇이든 비제도적 권력의 지배는 정치, 사회적 후진성의 중요한 특징이 아닌가.
우리는 청와대의 인사 시스템이 어떤지 잘 모른다. 에볼라 의료진을 파견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어디서 결정된 것인지 정보가 없다. 또한 대한항공 부사장이 비행기를 돌릴 권한이 있는지, 그리고 매뉴얼은 어떤지,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누구도 제도와 법과 절차가 온전히 작동한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비선과 실력자, 오너가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터무니없는 낭설과 풍문이라고만 할 수 없다. 단편적으로 드러난 몇 가지 폭로만 보더라도 ‘찌라시’가 더 설득력이 있다.
제도가 무력해지면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공론장과 참여는 아예 사라진다. 정책과 자원 배분, 할 일을 결정하는 데에 과학과 논거, 철학, 경험, 전문성, 여론이 다 무슨 소용인가. 권력을 따르고 비선 라인을 찾아 사익을 나누는 데에 온 힘을 집중해야 한다. ‘쪽지’와 연줄을 동원해야 푼돈 예산이라도 딸 수 있다.
- 셋째, 시스템의 무력화. 민주주의가 허약하고 비제도적 권력이 득세하면 어떤 시스템도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인사는 물론이고 모든 의사 결정과 위기 대응을 몇몇 사람이 그것도 제도와 체계를 넘나들면서 독점하고 재단한다.
인사혁신처를 만들었으니 이 정부의 그 말썽 많은 인사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 혹 사고를 친 대한항공 부사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경영에 개입하는 일이 없을까?
그 정도로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질 리 없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 근본이 달라지지 않는 한 선언과 다짐으로는 불가능하다. 시스템을 구축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과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세력이 없으면 하드웨어는 돈만 들이고 흉물로 남는다.
- 넷째, 사익 추구. 사사로운 이익을 찾는 데에는 민주주의와 권력의 제도화는 번거롭고 거추장스럽다.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공론에 붙여 논의하고 투명하게 결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비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 딸과 관련된 체육단체 때문에 관계 부처의 고위공무원을 ‘손봤다’는 소문(또는 뉴스)은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이런 종류의 개인 이익을 위해 국가 권력을 동원했다고 하면 나라와 국민의 품위가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도 비슷한 일이 한둘이 아니라니 답답하다.
기업의 노골적인 사익 추구는 놀랄 일도 못 된다. 대한항공의 ‘오너’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넘겨주기 위해 노력한 것을 보면 눈물겨울 정도다 (한겨레 기사 바로가기). 이런 일에 모든 정성을 쏟는 마당에 민주주의와 제도화가 관심일 리 없다.
- 다섯째, 인격의 봉건적 예속. 정치적 이유든 경제적 이유든, 조직과 직장에서의 관계가 조선시대의 주종 관계에 못지않다. 스스로 가신이라 부르는 비서관이며, 그 상상하기도 힘든 처지를 참아내야 했던 사무장을 보라.
지금의 권위주의 정치 그리고 천민 자본주의가 이런 예속을 강요하는 것이 사태의 본질이다. 같은 형편이 되었다고 가정할 때 어느 누구도 쉽게 다른 행동을 장담할 수 없는 것, 이제 개별적인 동시에 체제적인 강요를 각자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 여섯째, 피해의 사회화. 일부 사람, 그것도 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익에 매진하면 피해는 고스란히 보통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이런 점에서 지금 정치권력과 기업이 어떤지는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당장은 ‘관전평’ 빼고는 할 것이 별로 없는 장삼이사들의 처지는 답답하다. 먼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그들만의 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삶과 생활에 길고 어두운 그늘을 미치는 것이 고민스럽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뿌리 깊은 문제에 어디 단답이 있을까. 그래도 순서로 치면 제일 먼저 민주주의의 뿌리를 강화하는 것을 강조해야 하겠다. 여기에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를 모두 포함한다. 현실 정치와 생활도 나누지 않는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책임의 일부를 진다.
그러기 위해서도 당장은 대통령이 새롭게 방향을 바꾸어야 하겠으나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 역시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을 테니 정치적, 사회적 압력을 조직하고 키우는 도리 밖에 없겠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우리 모두는 성찰과 함께 갖가지로 요구하는 소리를 모으고 키우는 것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시절은 수상하고 우리의 책임은 엄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