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쯤은 어땠을까. ‘다이내믹 코리아’가 헛말이 아닌 것이 그 때가 까마득하게 멀다. 매일 엄청난 사건이 터지는 사회인지라 이 시간이면 강산이 변하는 데도 충분하다 할까.
딱 5년은 아니지만, 그 무렵을 회고해 보자. 2009년 12월 14일 보건복지부 등이 함께 주최한 서민, 고용분야 2010년 합동 업무보고회가 열렸다. 당시 정부가 낸 보도자료에는 취지가 이렇게 쓰여 있다.
“서민,고용 분야 합동 업무보고는 2010년 부처 업무보고 중 가장 먼저 실시되는 것으로, 최근 경기회복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서민경제의 어려움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보여주는 것임” (보도자료 바로 가기).
좀 더 상세한 내용 몇 가지도 같이 보는 것이 좋겠다.
“복지부는 내년부터 병원내 간병서비스를 비급여 대상에 포함하여 공식적인 서비스로 전환하고, ‘11년 이후 건강보험 급여화 검토 등 「간병서비스 제도화 방안」을 마련하기로 함…간병제도화 등을 통해 내년에 보건복지분야 일자리를 15만개 창출할 계획.”
“보건의료산업의 글로벌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제목과 함께 이런 것들도 들어있다.
① 「한국의료의 글로벌화」: 『해외환자유치 선도기업』 육성, 『글로벌 u-health 의료센터』 구축
② 「세계시장 진출 및 투자유치」: 의약품 등 세계시장 진출, 연구중심병원 법제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생소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작은 것 몇 가지만 바꾸면 오늘 내놔도 괜찮을 정도다. 문제가 만성화되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정부가 하는 일이란 늘 그 모양인가.
그러나 오늘 다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지난 정책의 잘못이나 관료주의의 끈질김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시 우리가 이런 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되새기려 한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책을 비판했다. 일자리 숫자가 과장되었다는 실무적(?) 비판부터 보건의료 정책의 기조를 상업화, 영리화로 설정했다는 것까지, 좋은 소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기억해 보면, 국정 책임자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당연히 따라 붙었다. 돈만 따진다, 천박한 실용주의, 그 지겨운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어법까지. 처음부터 그런 점이 없지 않았지만,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정책을 넘어 개인의 특성이나 스타일까지 가세했다. 비판은 끝내 격렬한 비난과 혐오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앞서 인용한 업무보고나 보도자료,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은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정책이나 업무가 비슷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흔히 ‘개인화’ ‘의인화’로 귀결된다. 그 당시 대통령을 가리키는 수많은 상징과 그 언어를 떠올려보라.
현실로 돌아오자. 5년이 좀 더 지난 지금, 사태는 좀 더 심각하다. 인사 문제와 통치 스타일은 그렇다 하더라도,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응과 이번의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최악의 수준에 이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여론조사 결과도 그렇지 않은가).
비판은 매우 감정적이고 정서적이다. 보통 사람들의 반응도 냉소와 혐오, 조롱 아니면 ‘관심 없음’으로 넘친다. 굳이 5년 전과 비교하면, 반응이 더 거칠고 단정적이라는 것이 다르다. 물론, 찬성과 지지도 더 단단하고 열광적인 쪽으로 진화했다.
정말 걱정거리는 그 사이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에 있다. 찬성이든 비판이든 ‘개인화’ ‘의인화’의 경향이 강고하다는 것. 모든 것은 그 사람 탓(덕분)이고, 잘잘못은 그의 결함(장점)이 드러난 결과다. 그리하여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는(그리고 그에 대한 혐오도) 여전히 한 사람 그 개인에 달렸다.
한 사람에 주목하는 방식이 갖는 장점은 분명하다. 열광이든 분노든 방향이 명확하고 그만큼 힘도 강하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잘잘못이 분명하고 따라서 고칠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잘못된 것은 새 사람을 바꾸어 세우면 해결된다.
그런 만큼 위험하고 속기 쉽다. 최고 권력자 한 사람을 잘 뽑는 것으로(또는 바꾸는 것으로) 많은 것이 해결되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위험이 가장 크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대의민주주의 제도 또는 대통령 중심제의 ‘간계’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정권이 마치 이전 정권(MB 정부)과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만 해도 그렇다. 사실 정권은 재창출되었고 많은 사람은 그대로다. 앞서 인용한 자료에서 보는 것처럼 정책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념도 판박이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러니 ‘친이’니 ‘친박’이니 하는 것은 얼마나 또 가소로운가. 그것은 그저 최고 권력 몇 자리의 교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를 문제 삼는다는 것이 우습다. 다른 세상과 사회, 다른 차원의 삶에 대한 꿈은 종편의 요란한 선동 속에 묻힌다.
물론, 현재의 권력체계에서 대통령 개인이 갖는 힘은 결코 작지 않다. 아마도 많은 것을 (어느 정도까지는) 다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딴 것은 몰라도 적어도 세월호 희생자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으리라. 그 말 많은 정책들도 조금씩은 좋게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대통령이 “입사 전부터” 영리병원과 의료관광에 그렇게 강한 애착과 투철한 신념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설사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의 관점과 태도, 결정이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노동과 경제에 이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경제와 사회의 구조와 역사, 집단과 어떤 권력을 대변하는 것이 틀림없다. 심지어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모욕도 대통령을 둘러싼 더 큰 세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겨를 없이 일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현실 넘어 이런 ‘구조’가 있다는 것은 딜레마다. 속 시원하게 욕하는 것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이 오면 좋으련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니. 좀 더 좋은 대통령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은 분명 힘겨운 도전이다.
무엇보다 구조란 흔히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금방은 잘 바뀌지 않는다. 다른 세상과 사회, 다른 차원의 삶에 대한 꿈이 그 구조와 관련된 것이라면, 보통의 개인으로는 생각도 실천도 모두 버겁다. 한 개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 구조에 이르는 것의 어려움.
하지만 언제는 쉬었던가. 매일 겪는 고통의 책임을 묻는 것은 멈출 수 없다. 다만, 현실에 대한 분노는 구조와 연동되어야 할 것임을 기억하자. 그렇지 않으면 그 구조는 상징과 대표성만 바꾸어 다시 우리를 구속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 개인과 구조, 5년 뒤 10년 뒤를 미리 상상하자.
마침 대통령이 콜롬비아에서 가브리엘 마르케스를 인용했다고 한다.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망각은 어렵다.” 딱 맞는 말이다. 지난 정부 그리고 더 이전의 정부들을 살피건대, 지금 우리가 좀 더 해야 할 일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