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연구통

“의사와 환자의 만남은 스피드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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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병원쇼핑, 왜 하는걸까?


우리나라를 한바탕 휩쓸고 간 메르스 사태의 주범으로 거론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병원 쇼핑 문화였다.

한 가지 질병을 놓고서 병원을 이곳저곳 다니는 이러한 병원 쇼핑 문화는 우리나라나 대만(타이완), 일본 등 주로 아시아권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의료 이용 문화로 알려져 있다. 메르스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1번 환자의 경우, 하루 이틀 간격으로 여러 병·의원을 방문하고 마지막에는 대형 병원을 방문했다. 이런 모습을 염두에 두고, 일각에서는 환자들의 이런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병원 쇼핑 행태는 의료 자원의 낭비는 물론이고, 치료 효과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곳저곳을 방문하는 동안 치료의 적기를 놓칠 수도 있으며, 치료의 지속성이 중요한 만성 질환의 경우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대만의 한 연구에 따르면 의료 쇼핑을 한 암 환자들이 그렇지 않은 암 환자에 비해 다른 요인들을 보정하고도 5년 생존율이 유의하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자료 : Outpatient-shopping behavior and survival rates in newly diagnosed cancer patients)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의료 쇼핑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일까? 우선 전통적으로 주치의로부터 치료를 받고 건강 상담을 받는 것에 익숙한 서구와는 달리, 우리에겐 여전히 주치의란 개념이 생경한 탓이 크다. 그리고 제도적으로는 전 국민건강보험의 적용으로 병원 이용에 대한 경제적 장벽이 낮아지고, 대형 병원 이용에 대한 제도적 제약이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병원 쇼핑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 국민에게 무작정 주치의를 배정하고 병원 쇼핑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만 하면 해결될 일도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의료 이용에서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고,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병원 쇼핑을 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문제의 근본은 해결되지 않은 채 또 다른 문제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원을 여기저기 다니고, 대형 병원을 선호하는 시민들의 행태를 비판하기에 앞서 환자들이 왜 그렇게 병원 쇼핑을 하는 것인지 한번쯤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때마침 홍콩에서 병원 쇼핑을 하는 일부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가 ‘BMC 가정의학’ 이라는 국제학술잡지에 실려 그 내용을 소개한다. (☞관련 자료 : “Seeing a doctor is just like having a date” : a qualitative study on doctor shopping among overactive bladder patients in Hong Kong)

홍콩 침례교 대학교의 시우(Siu) 박사는 과민성 방광을 앓고 있는 환자 30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병원 쇼핑을 하는 이유를 놓고서 개인별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과민성 방광이란 특별한 질병 없이 하루 수차례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급작스러운 요의(오줌이 마려운 느낌)를 느끼고, 소변이 마려우면 참지 못하며 수면 중에도 자주 소변을 보는 질환이다. 그 자체로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관리와 치료가 중요한 만성 질환으로, 제대로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원만한 사회생활을 어렵게 하는 등 환자의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인터뷰 참가자들은 하나 같이 동네 주치의의 필요성에 대해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감기나 위장 질환과 같은 “단순한” 질환에 대해선 어느 의사나 다 잘 치료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의사를 정해놓고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얘기하였다. 반면에 방광 질환과 같은 보다 심각한 질환에 대해서는 동네 일반의들의 실력을 신뢰하지 못하므로 큰 병원의 전문의를 찾아갈 것이라 얘기했다.

그들이 이렇게 얘기한 데에는 그들의 방광 질환 치료와 관련한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경험들의 영향이 컸다.

“계속해서 많은 병원에 다녔지만, 그들 중 아무도 날 제대로 치료해주지 못했어요. 그들은 몇 가지 검사와 소변 검사만 할 뿐이었어요. 소변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 그냥 제가 습관성 배뇨인 것 같다고 얘기하거나, 감염일 수도 있다며 항생제를 처방해주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다른 병원으로의 진료 의뢰 같은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때문에 전 매번 새로운 의사를 찾아야했고 그 때마다 그들은 매번 똑같은 것만을 반복했어요.”

이러한 경험 외에도 인터뷰 참여자들이 얘기한 병원 쇼핑의 이유는 다양했다. 병원의 위치나 진료 시간이 자신들에게 편리한지도 그 중 중요한 이유였으며, 의사들이 자신의 고통을 공감해주지 않고 심지어 농담을 하는 등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 병원을 자꾸 옮기게 됐다고 얘기한 사람도 있었다.

한편, 병원 쇼핑은 응답자 개인의 선호와도 관련이 있었다. 응답자 대부분은 자신들에게 “딱 맞는”, 소위 “궁합이 잘 맞는” 의사를 만나는 것이 치료 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이런 “딱 맞는” 의사를 찾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들로 의사의 태도 뿐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꼽았다. 어떤 참가자는 좋은 의사를 찾는 것을 다음과 같이 데이트하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의사를 만나는 것은 마치 데이트하는 것과 같아요. 의사의 성격과 특성이 나와 잘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을 잘 할 필요가 있죠. 만약 의사와 내가 잘 맞는다면 그는 나의 필요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나 역시 그의 치료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의사의 태도나 성격이 나쁘다면 우리는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없을 거예요. 일부 의사들은 가능한 빨리 진료를 끝내려고만 할 뿐, 환자의 얘기를 잘 들으려하지 않고 질문을 많이 하면 심지어 화내는 의사도 있어요.”

“나는 의사를 만나는 것이 스피드 데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몇 분 안에 그 의사가 나와 잘 맞는지 알 수 있어요. 만약 그 의사가 나에게 예전에 했던 질문을 이번에도 반복한다면 그건 그 의사가 날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고 신뢰를 쌓아 서로 간에 장기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겠어요?”

(스피드 데이트는 미국이나 유럽 등에 널리 정착된 데이트 문화의 한 방식이다. 스피드 데이트 참가자들은 일정한 장소에서 자리를 옮겨 가며 주어진 시간 동안 이성들과 대화를 하면서 서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게 된다. 한 번에 다양한 이성을 만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인기가 높다.)

요약하자면, 연구 참여자들은 동네 일반의의 실력에 대한 낮은 신뢰, 편의성, 의사들의 태도, 개인적 선호 등의 이유로 병원 쇼핑에 나서게 됐다고 얘기하고 있다. 홍콩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내용이지만 우리네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시민들이 큰 병원을 선호하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게 된 데에는 기본적으로 동네 의원에 대한 신뢰부족과 더 나은 대우, 더 나은 치료를 받고자 하는 열망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지금의 이러한 현실, 즉 아픈 환자가 직접 정보를 수집하고 발품을 팔아야만 자신에게 딱 맞는 의사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료 이용과 관련하여 시민들이 느끼는 일상적인 갈증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아직은 뭐가 뭔지 잘 알 수 없는 모호한 증상과 문제를 경험하고 있을 때, 이것이 심각한 질병인지 아닌지를 가려내주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수 있는 의사, 환자 개개인의 생활과 환경을 잘 이해하여 개인별 맞춤 처방과 관리를 해줄 수 있는 의사, 바로 이런 의사가 내가 있는 곳 가까이에 있다면 병원 쇼핑 행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선 갈 길이 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갈수록 의료가 상업화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의사라는 전문가 집단에 대한 시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 개원의 전체 90% 이상이 전문의라고 하지만 그 중 실제로 제대로 된 주치의 역할을 교육받은 가정의 전문의 수는 턱없이 적다는 점 등도 의사-환자 간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병원 쇼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넘어야할 산들이다.

소는 잃었지만 외양간이라도 제대로 고치려면,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의료 이용과 관련하여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는 갈증과 문제들에 보다 더 관심을 기울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시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원격의료의 도입과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플 때마다 느끼게 되는 가까운 의사 친구, 의사 친척의 필요성. 그리고 ‘아, 이럴 땐 도대체 어느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지?’ 이런 고민들, 이제 그만 하고 싶다.

 

정연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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