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공휴일까지 만들어 지냈으니 광복70주년을 평범하게 기념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휴일을 하루 늘리기까지 했으나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경제 활성화라는 명목을 붙여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겉보기에 보통 때보다 더 큰 행사와 더 많은 특집 방송 이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그건 ‘역사’다.
광복이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키는 한, 무엇을 논의하든 친일과 항일의 역사를 피할 수 없다. 70주년이라는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공식 언론은 물론이고 에스엔에스(SNS)에서도 친일과 항일, 그리고 인물과 일화가 다른 주제들을 압도했다.
한국이 민족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친일과 항일은 늘 불려 나오는 역사적 사건이자 의미로 남을 것이다. 어디 한국만이겠는가. 광복절 즈음이면 프랑스의 사례도 항상 함께 호출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부역한 반역자들을 가혹할 정도로 처벌한 역사.
게다가 현실이다. 동북아 세 나라의 국제관계는 물론, 이른바 ‘건국절’이나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보듯이 친일과 항일은 죽은 역사가 아니다. 개인의 태도나 취향에 국한할 수도 없으니, 70년을 지난 후에도 여전히 현실과 사람을 움직이는 그야말로 ‘리얼’이다.
어느 광복절도 마찬가지였지만 광복70주년 역시 그것을 되새기는 계기였을 뿐, 실재하는 힘은 내내 작동한다. 도저히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끈질기게 물어야 한다. ‘리얼’의 힘이 있으면 그만큼 위험도 커지기 때문이다.
1.
우선, 친일과 항일의 논리가 좁은 민족주의에 갇히는 것, 나아가 악용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 가운데서도 한 사회의 모든 갈등과 과제를 민족의 이름으로 무마하려는 나쁜 시도를 조심해야 한다. 특히 ‘애국’을 앞세워 다른 모든 가치를 해소하려는 것.
‘민족’이 우리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가치에 속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민족국가의 국경을 넘으려는 세계시민주의의 이상을 존중하지만, 그 이상을 실천하고자 할 때 금방 드러나는 현실의 한계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디에서 근거를 찾든 제 이웃과 민족, 나라를 사랑하는 것을 타박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아무리 부인해도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까지 민족주의자다!
‘건전하고 건강한’ 민족주의의 경계가 늘 위태롭다는 것이 고민스럽다. 인종주의로 오염되거나 민족 중심의 이기주의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다. 그 많은 침략과 식민, 제국주의의 역사가 민족주의의 위험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과거 지배를 받던 민족이 같은 ‘주의’의 이름으로 공공연히 새로운 침략에 앞장서는 것을 보면, ‘저항 민족주의’가 정말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그 때문에라도 친일과 반일(항일)의 의미는 다시 규정되고 또한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 사람이 이미 지적한 것 일부를 포함한다. 일본에 찬성하고 반대하는 것, 또는 ‘일본과 친한 것’ 자체가 문제가 될 리 없다. 공동체와 그 구성원에게 어떤 해악을 끼쳤는가가 추가되어야 할 기준이다.
우리는 추상적인 친일이 아니라,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공동체와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한 것, 그것을 문제 삼는다. (다른 나라가 아닌) 마침 일본이 침략의 주체여서 항일과 반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제국주의적 침략과 파괴, 억압을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법률적, 정치적 책임을 넘어 인류 보편의 도덕적 책임을 묻는 잣대다. 보편이란 지금 우리도 그것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2.
친일과 항일 논리의 ‘독점’이 불편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자칫 영웅과 악인만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유명인과 권력자, 몇몇 지도자만 주역으로 등장하는 모양이 되기 쉽고 이들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고 해결이라는 인상을 준다. 광복절을 앞두고 조상과 후손의 ‘친일 정치’가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 역사는 당연히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배제되고 무력한 존재로 머문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서민, 민중, 대중, 피지배층, 노농계급, 그 무엇이라 부르든, 이들은 친일도 항일도 아닌 투명인간이 된다. 그러나 역사는 친일과 항일의 틀을 넘어 자유를 확대하고 복지를 증진하려는 사람들의 분투로 가득하다.
사회제도로서의 의료보험(국민건강보험)이 한 가지 실례가 될지 모르겠다. 한국 의료보험의 역사는 흔히 1963년부터 시작한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의료보험법을 만든 것이 이 때라는 것이 이유다. 1977년 의료보험을 시작한 것을 보태서 박정희가 ‘건강보험의 아버지’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우석균의 다음 글을 참고할 것. 바로가기).
어차피 비유긴 하지만, 기원 또는 아버지는 사실(史實)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부 연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사람이 집권한 시기에 법을 만들고 제도를 처음 시작했다고 건강보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다. 의료보험과 그 법률을 만드는 것이 한두 사람의 결단으로 될 일인가. 누가 언제 그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까지 따지면, 개인의 한계는 더욱 뚜렷해진다.
역사 발전의 ‘경로’를 무시할 수 없다면 한국 건강보험의 뿌리도 대중의 인식과 실천을 비롯한 ‘삶의 양식’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민건강보험의 직접적인 기원을 1928년 <원산노동연합회>가 조합원들을 위해 만든 ‘노동병원’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의미가 있다 (한양대 신영전 교수).
<원산노동연합회>는 협동조합운동을 핵심 사업목표로 가지고 있었고 중요 사업 가운데 하나가 병원 운영이었다. “련합회원에게는 약가를 전부 사할인하여 준다 하며, 환자도 매일 륙칠십 명식 모여든다 하니 실로 일년의 연인원 총수가 이만 일천여 명에 달하는 터이며, 입원병실도 사시부절으로 만원”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29년 2월 13일 석간 5면).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1년 “공인급농인(工人及農人)의 면비의료(免費醫療)를 보시(普施)하여 질병소멸급(疾病消滅及) 건강보장(健康保障)을 여행(勵行)함”과 같은 강령을 만들 수 있었을까(독립기념관 자료). 해방 정국에서 좌우 모든 정파가 사회보험 실시를 약속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산의 역사가 없었다면 정부 수립 이후 1963년까지 의료보험을 검토하고 주장하며 실천했던 전사(前史)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1955년 부산에서 만들어진 ‘사단법인 부산노동병원’이 원산의 ‘노동병원’과 같은 이름을 썼다는 것이 그냥 우연일까. 이들 역시 일정액의 회비를 받고 근로자의 질병을 치료하는 보험조합 방식을 활용했다(경향신문 1955년 10월 28일, 바로가기).
국민건강보험의 역사는 작은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원산의 노동병원을 ‘항일’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몸에 맞지 않듯이,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의 근대사는 친일과 반일 그 이상이다. 그것을 근대화, ‘자유의 확장’, 또는 ‘진보’ 그 무엇으로 부르든 상관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역사 발전을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과 투쟁을 빼면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3.
다시 말하지만, 친일과 항일의 역사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도덕적 책임의 잣대다. 그러나 그것은 더 확장되어야 하며 동시대적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류 보편의 가치, 예를 들어 자유와 인권, 복지의 확대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