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세계에이즈의 날에 생각하는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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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화요일, 12월 1일은 ‘세계에이즈의 날’이다. 1988년부터 기념했으니 역사가 30년이 다 되어간다. 어떤 날인가? 국제적으로 보건문제를 총괄하는 세계보건기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날에 들어간다. 유엔의 에이즈 특별기구인 ‘유엔에이즈(UNAIDS)’는 말할 것도 없다.

국제기구뿐 아니라 대부분 나라가 이 날을 챙긴다. 전세계 어느 나라가 에이즈를 별것 아닌 문제로 여길 수 있을까. 치료법이 개선되어 질병 부담이 가벼워졌다고는 하지만 에이즈는 아직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나라 형편이 어떻든, 세계에이즈의 날은 유용한 제도이자 도구다.

 

다른 나라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한국은 ‘갈라파고스’인 셈이다. 정부 안에서 에이즈를 총괄하는 질병관리본부부터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의 ‘세계에이즈의 날’ 항목은 최종 수정일이 올해 8월에 멈춰있고, 기념일을 나타낸 그림은 2012년 것이다 (바로가기). 상위 조직인 보건복지부 소식에도 특별한 것이 없다.

그나마 지방 정부가 체면치레를 할 모양이다. 곳곳의 보건소가 예방과 인식 개선 캠페인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어떤 사업을 얼마나 제대로 하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두 따질 형편은 아니나, 공공보건조직이 하는 일인 만큼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지키는 공동행동으로 짐작한다. 질병관리본부의 정보와 자료(바로가기)를 따를 것이니, 충분히 의미 있는 활동으로 평가한다.

꼭 올해만 아니라, 한국에서 에이즈는 크게 주목받았던 적이 드물다. 어느 모로 보나 관심과 논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것이 못된다. 그동안 에이즈의 대유행을 피했고, 문제를 ‘소수화’, ‘부분화’, ‘특수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치료할 수 있는 질병, 그냥 보통의 만성질환이 되었다고 한다. 예상대로 된다면, 관심은 더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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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에이즈 그리고 세계에이즈의 날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안심할 수 없다. 2015년 7월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2014 HIV/AIDS 신고 현황>을 보면, 2014년 한 해 1,191명이 새로 신고하여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바로가기).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잊어도 될 문제라고 말하기는 이르다.

사회, 정치적 반응이 환자 수 이상으로 중요할 수도 있다. 에이즈는 질병이지만, 또한 사회적 문제이자 정치적 과제라는 점도 분명하다. 예를 들어, 질병에 대한 사회적 반응이라 할 수 있는 편견과 차별이 이토록 심하고 복잡한 경우를 다시 찾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논란이 심화되는 ‘성 정체성’의 정치와 긴밀하게 결합해 있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에이즈 감염인의 인권과 건강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에이즈가 소수(부분)의 문제가 될수록 편견과 차별이 심화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다수의 질병은 사회로 통합될 수 있는 반면(예를 들어 치매), 문제와 관심이 소수자에게 집중되면 이들을 배제하는 특별한 사회문화적 반응이 생길 수 있다. 한센병이 대표적인 예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의학적 지식과 무관하게) 편견과 차별은 끈질기다.

더 많은 지식과 더 효과적인 관리 방법만으로는 편견과 차별을 줄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최근 불거진 치과진료 과정에서의 차별도 그렇다(바로가기). 진료 의자와 의료도구는 물론 칸막이까지 커다란 비닐로 감쌌다는 것은 의학적, 과학적 반응이 아니라 사회적 반응이다. 진료나 수술을 거부하는 그 많은 사례도 사회적이자 정치적인 것이다.

 

“작년 8월에도 감염인이 강원도 원주의 한 종합병원에서 중이염 수술을 받으려 했지만 병원 측이 ‘수술방에 환자 피가 튀는 것을 가릴 막이 설치돼 있지 않다’며 수술을 거부해 3개월 뒤에야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연합뉴스 바로가기)

 

적극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수준에 이르는 길은 더욱 멀고 험하다. 다른 것은 그만 두고라도, 기본 치료를 받을 권리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메르스 사태의 와중에서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 중이던 에이즈 환자 13명이 병원을 나와야 했던 사례는 아직도 생생하다.

 

새로 의료기관을 찾기도 어려운데, 적절한 치료를 받을 권리란 말을 꺼내기도 민망하다.

 

“국립중앙의료원이 메르스 거점병원으로 지정된 뒤, 지방 국립대 병원으로 옮기게 된 환자의 보호자 자격으로 (그 병원에) 따라갔다. 그 병원 간호사가 너무 당황하더라. HIV 감염인을 처음 봤던 것 같다…그분이 벌벌 떨면서 처음엔 링거주사를 못 놓더라. 그 환자에게 내가 너무 미안했다.” (한겨레21 기사 바로가기 )

 

장기치료나 장기요양을 받을 수 있는 여건도 취약하다. 정부는 민간 요양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했다지만, 보통의 민간병원이 이 일을 제대로 하기는 어렵다. 병원들이 “감염인을 돌볼 여건이나 능력이 안 된다”거나 “다른 환자들이 반대한다”면서 거부한다는데, 그냥 핑계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현재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고려하면 당연히 다른 대책이 필요하다.

 

차별이든 치료받을 권리든, 인권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인권은 어떤 삶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며, 자격이 필요한 것은 더구나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천부’의 권리라는 점을 잊지 말자.

병이 생긴 원인과 책임에 따라 치료받을 권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같다. 음주운전을 하다 다쳐도, 해롭다는 담배를 피우다 폐암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받을 권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장되어야 할 인권이자 건강권이다.

 

덧붙이는 말. 질병 때문에 차별과 인권 침해가 일어나고 건강권을 훼손당하는 일은 비단 에이즈에 그치지 않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메르스 사태를 생각해보라. 에이즈 감염인의 인권이 곧 사회구성원 전체의 인권이다. 감염인의 인권이 보장될 수 있으면 다른 모두의 인권이 보장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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