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판이라도 이기고 싶다”. 알파고와 대결하는 이세돌 9단이 했다는 말이다. 이제 그의 희망은 이뤄졌지만, 알파고는 이미 이겼다. 그것도 ‘완승’이다. 바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바탕 판타지 ‘쇼’를 펼침으로써 알파고, 인공지능,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공룡기업, 구글을 ‘사회화’ 그리고 ‘경제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시장에서.
인공지능의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우리는 모두 이미 필요한 만큼 안다. 모든 신문과 언론매체가 지면과 시간을 들여 가르쳤으니 말이다. 한때 줄기세포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인공지능이 ‘상품’이 되었다.
조금 냉정해지자. 인공지능의 역사는 낙관과 비관, 희망과 좌절 사이에서 여러 번 부침을 겪었다고 한다. 조금 길게 보자.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인공지능의 역사는 지금 어디에 와있는가. ‘붐’인가 ‘거품’인가, 아니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맹아기’인가. 알파고의 뒤는 누가 이을 것인가.
“1970년대 초반의 마이신 시대부터 이미 40년이 흘렀다. 다양한 데이터로…질문에 대답하는 환경은 정돈되어 왔다. 지금이라면 의료 진단도 상당히 실용적인 수준으로 실현될 것이다. 질문 응답 시스템에 의한 진단이 보급되면 의사의 절대 수가 부족한 지역이나 원격지, 개발도상국에서의 응용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술에 의한 변화는 조금씩 세상을 바꾸어 갈게 될지도 모른다.” (마쓰오 유타카. 박기원 옮김. <인공지능과 딥러닝>. 동아M&B 펴냄)
“IBM의 연구원과 엔지니어들은 왓슨이 제퍼디 퀴즈쇼에서 우승한 이래 조직과 개인이 직면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다룰 수 있도록 능력을 향상시켜 왔고, 그 첫번째 목표는 암이었다….정형, 비정형 데이터로 기록된 진료 노트와 보고서의 의미와 맥락을 분석할 수 있는 발달된 능력을 통해 일상영어로 쓰여진 환자의 주요 정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라포르시안 관련 기사 바로가기).
몇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인공지능은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고, 삶과 사회를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얼마나 빨리 바뀔지, 또 어떤 영향이 얼마나 클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것은 좋은 방향으로 또 어떤 것은 걱정스러운 쪽으로, 무정부적 혼란도 피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한두 가지를 찍어서 할 일을 말하는 것보다, 거기에 이르는 생각을 먼저 정리해야 하겠다. 우선 알파고에서 빠져나와 인공지능으로, 그리고 종국에는 과학기술 전반으로 범위를 넓히자. 그래야 자율주행 자동차가 눈에 들어오고, 뇌 이식에도 눈길을 줄 수 있다.
(인간) ‘주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공지능(또는 그 어떤 기술이라도) 또한 조건이자 환경이다(인공지능이 극단적으로 발전해 인간에 버금가는 또 다른 ‘주체’가 되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구조’로서의 기술은 주체를 변화시키지만, 주체도 구조에 개입한다. 그리하여 주체와 구조가 모두 ‘변형’되어 새로운 주체와 구조가 만들어진다.
사람(사회)과 인공지능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바뀌고 바꾼다. 앞서, 인공지능이 얼마나 빨리 발전할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과학의 자기 동력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는가에 따라 발전 속도가 영향을 받는다. 사람과 구조는 ‘상호작용’의 관계다.
‘변형’이란 (변화된) 구조가 다시 (변화된) 사람에 개입하면서 진행된다.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구조 가운데 주목할 것은 인공지능에 대응하는 ‘사회체계’와 ‘의미체계’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물음과 관계가 있다. 인공지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어떤 도움이 되고 누구에게 그럴 것인가. 어떤 부작용이 있고,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무엇을 위해 누가 얼마나 투자할 것인가.
아프지만 줄기세포 사건이 ‘선생’이다. 그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사회구조로 반응했는가. 안타깝게도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떠돈다는 ‘K-알파고’ 시나리오가 드러내는 그대로, 시쳇말로 ‘웃프다’.
역설적으로, 이런 시나리오는 ‘인공지능적’이다. 알파고가 바둑을 익힌 실력으로 보면, 그동안 벌어졌던 사건의 패턴을 찾고 규칙을 학습하는 것은 일도 아닐 터. 다만, 누가 투자하고 개발할 것인가의 문제는 남는다.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어도, 우리는 다르게 생각한다. 아니, 생각할 수 있다! 역사에 묻고 사회적 의미를 성찰하는 것과 같다. 묻고 다시 생각하며 의미를 찾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반(反)인공지능적’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물을 때다. 우선, 과학기술의 범위를 많이 벗어나지 않는 데부터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앞서 인용한 1970년대 판 인공지능 ‘마이신(MYCIN)’(미국 스탠포드 대학이 개발했다)은 의사가 항생제 처방을 좀 더 정확하게 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었다. 지금 우리가 알파고에 놀라듯이 많은 의사가 마이신에 경악했다. 처방 실력이 스탠포드 의대 병원의 일류 의사보다 나았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 진료에는 한 번도 쓰지 못했다. 기술적 문제도 컸지만, 사회적 문제가 적지 않았던 탓이다. 인공지능이 판단한 대로 처방했는데 사고가 생기면? 누가 잘못한 것이고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바둑돌을 잘못 놓은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좁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는 과학기술에 대한 영향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 미래창조과학부가 발간한 한 보고서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주로 정부의 책임이니, 원칙을 잘 지키고 실천하기 바란다.
“최근 과학기술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복잡하고 광범위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선제적 예측 및 대응 필요….과학기술의 발전은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 등의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오지만, 환경 윤리문제 등 예기치 못한 부작용도 초래….사회구성원이 참여한 기술영향평가를 통해 신기술이 초래할 결과를 예측하여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국민들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필요” (바로가기)
범위를 더 넓히면, 중대한 사회적 과제가 우리를 기다린다. 인공지능이 영혼과 정신까지 대신한다는 공상에 가까운 예측도 있지만, 가까운 미래가 더 큰 걱정이다. 기술 발전에 따라 불평등이 심해질 수 있다는 예상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공감한다. 많은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예측도 마찬가지다.
주체가 구조에 변형을 가할 수 있다면, 결국 과학과 기술에 개입하는 인간 정신과 활동이 초점이다. 그 기술로 외국어 통역기를 만들지 않고 알파고를 만든 것은 어떤 이유로 누가 결정했을까? 언젠가 인공지능이 가치까지 판단할 경지에 오를지 모르지만, 그렇게 방향을 잡는 것 또한 사람이다.
최종적인 결과도 거기에 이르는 과정도,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이 결정한다. 원격의료 기술을 어디서 어떻게 쓸지, 말라리아 치료약인지 미용수술 장비인지, 또는 기본소득을 도입할지 말지, 사람이 정하기 나름이다. 다시 정치의 문제로, 자본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의 이슈로, 그리하여 민주주의라는 (그 끈질긴) 과제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