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0번 출구’의 살인 사건은 놀랍다. 한 젊은 여성이, 한국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희생되었다. 다른 말에 앞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피해자의 명복을 빈다.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만, 그 가족에도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우리는 이 사건을 세 가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결된,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해한다. 여성, 혐오, 폭력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 가지는 독립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긴밀하게 결합해 있다.
먼저 여성.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한 즉각적 해석은 ‘여성’혐오의 결과라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가 여성혐오 범죄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피의자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경찰의 첫 반응도 그랬다), 여성혐오와 정신질환은 서로 다른 차원의 설명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이번 사건의 성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법정이 아닌 사회에서는 개별 사건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경향성’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청년 자살이 무엇 때문인가를 묻는 것과 비슷하다. 이 사건에서도 무의식이나 망상이 아니라 그것이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런 한, 전형적인 여성혐오의 작동이라고 해야 맞다.
전문가의 진단보다 더 중요한 근거는 여성들의 행동이다. 많은 여성이 강남역에 모여 애도했고, 쪽지를 붙였으며, 거리를 행진했다. 소셜미디어에는 상징적인 해시태그, ‘#살아남았다’가 넘쳐났다. 이 비슷한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지금 이 현상은 여성혐오에 대응하는 ‘폭발적’ 반응이라 할 만하다.
그 무슨 다른 기준이 있다 하더라도, 당사자인 여성들이 보인 강력한 동의와 공감이야말로 여성혐오가 ‘실재’한다는 것을 웅변한다. 그냥 혐의의 가능성이나 분위기가 아니다. 여성에게는 일상이라 할 만한 생명에 대한 위협, 성폭력, 데이트 폭력이 여성혐오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여성혐오가 어떻게 사회현상이 되었는가를 따질 생각은 아니다. 다만, 저 악명 높은 성 불평등이 한 가지 원인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 어떤 기준으로도 한국의 성차별은 사회의 존립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다. 이번의 불행한 사고를 계기로 성 불평등의 근본을 다시 그리고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둘째로 혐오. 여성혐오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다른 혐오(사고나 사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혐오가 여성혐오에 이르는 길은 여성혐오를 설명하는 동시에 혐오 그 자체를 설명한다. (여성)혐오의 확대된 ‘구조’에 무감할 수 없다.
돌이켜 생각하면, 여성혐오가 시작된(또는 강화된) 중요한 계기는 1990년대 말의 ‘군 가산점’ 논란이었다.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을 채용할 때 군대를 다녀온 남성에게 가산점을 주던 제도가 역차별이라며 시비 대상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이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된장녀’라는 그 유명한 표현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성차별과 여성혐오가 표출된 공간이 채용과 취업이라는 사회경제적 ‘구조’라는 점이 중요하다. 1990년대 말의 경제위기와 줄어든 일자리, 경쟁 격화라는 조건이 군 가산점을 시비하는 과정에서 여성혐오로 ‘전화’되고 ‘물화’ 되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혐오는 결코 우연한 유행일 수 없다.
사회경제적 조건과 상황이 악화하면서 소수자 특히 약자를 적대하고 혐오하는 현상은 드물지 않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이나 관동 대지진 시기의 조선인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례들이다. 그 참혹한 결과와 평가도 함께 기억하자.
지금 그리고 앞으로 예상되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조건은 어떤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없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쪽에서 봐도 불평등, 양극화, 격차가 심해질 것은 분명하다. 나쁜 조건이 차별과 혐오의 온상이라면,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가 언제든지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나타날 수 있다.
가장 가능성이 큰 대상은 외국인과 이주민이다. 지금까지는 문화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했지만, 일자리와 복지 문제를 두고 언제든 사회적 혐오로 바뀌고 폭발할 수 있다. 그 경향성은 안에서 끓는 것이 틀림없고 이미 발화점에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셋째 폭력. 이번 사건에는 혐오와 함께 폭력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제대로 거론하기도 힘든 참담한 현실이다 (바로가기). 여성혐오와 여성폭력은 물고 물리지만, 성 불평등이 공통의 구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번 사건이 아니라도 여성폭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 일은 여성폭력 그 이상이다. 살인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이고, 폭력은 사회 전반의 ‘폭력성’ 분포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반적인 폭력과 같이 간다면, 결국 그러한 구조와 환경이 여성혐오의 폭력적 결과를 조장한다.
사회현상으로의 폭력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완전한 일상이다. 가정, 학교, 직장, 군대는 폭력을 실천하고 재생산하는 대표 장소가 아닌가. 폭력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본다면 그 극단인 살인조차(!) 일상의 장소에서 배태되고 길러진다.
이처럼 뿌리가 깊고 구조는 완강하니 무엇을 하자고 해야 할지 아득하다. 우선은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나, 그것부터 쉽지 않다. 당분간은 여성혐오가 실재하는지부터 시비가 잦을 것이다.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적극적인 제안보다는 이렇게 해서는 곤란하다는 부정을 먼저 거론하는 것이 아쉽다. 다른 무엇보다, 한 개인의 일탈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신질환이든 여성혐오든 한 개인을 처벌하고 치료하는 것으로는 모자란다. 경향이며 구조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때 집단 전체의 분포를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 보건에서 우리가 배운 이론이자 실천의 가르침이다. 자세한 것은 거의 4년 전 범죄를 줄이자면서 쓴 <서리풀 논평>의 한 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바로가기). 아래 인용하는 것은 그중 일부다.
“죽임, 지역사회 사고, 성폭행, 고혈압, 알콜 중독,…. 어느 것 가릴 필요 없이 사람들이 만드는 분포를 반영하는 일탈 현상이다. 여기는 인구집단 전략과 고위험군 전략을 모두 쓸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고위험군 전략이 훨씬 더 익숙하다. ‘잠재적’ 범죄자를 특별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정밀한 건강검진을 통해 질병의 위험이 높은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도 같다.
인구집단 전략에 기초하면, 분포(그리고 평균치) 자체를 옮겨야 일탈이 줄어든다. 적용할 수 있는 예는 많다. 성의 상품화와 성차별이 줄어야 성과 관련된 범죄율이 낮아질 수 있다. 같은 이유로, 평균 음주량이 줄어야 알콜 중독도 적어질 것이다.“
사회 전체의 여성혐오, 폭력, 정신질환 관리 수준이 좋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성차별을 줄이는 것이 가장 앞선다. 한 개인을 처벌하거나 치료하는 것, 또는 일부 집단을 비난하는 것보다 당연히 더 어렵다. ‘전체’와 ‘구조’를 바꾸는 것이 한두 가지 정책으로 하루아침에 될 수 없으니 당연하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이 사건을 계기로 삼는 것, 그리고 해야 할 일의 패키지를 잘 구성하는 것이다. 그 사이의 역사가 헛된 것이 아니니, 찾아보면 이른바 ‘정책’이나 ‘대안’도 적지 않다. 방향과 틀(프레임)을 잘 잡으면 좀 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정치공동체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기회의 창이 열렸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희생이 불행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동력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