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며칠 전은 36주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었다. 무엇을 ‘기념’해야 할까. 우선 힘들게 일궈낸 ‘민주화’를 기억하고, 현재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은 어떠한지, 어떤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해, 민주화 ‘이전’과 그 ‘과정’에서 국가가 자행했던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을 가장 극단적으로 겪은 후 살아남은 이들의 삶도 기억해야 한다.
해방 이후 현대사만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 폭력 또는 국가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다. 제주 4.3 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형제복지원 사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폭력 경험이, 살아남은 이들의 삶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경우, 사건 후 약 30년이 지난 2006년까지도 피해자의 24.9~29.5%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호소했다. (☞관련 자료 : <5.18 민주 유공자 생활 실태 및 후유증 실태 조사 연구 보고서>) 8년이 지난 2014년 연구에서도, 조사 대상자의 30.7%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 받고 있었다. (☞관련 자료 : 1960~80년대 민주화 운동 참여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한평생 건강상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의 가장 약자인 아동 역시 국가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제주 4.3 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형제복지원 사건 과정에서 많은 아이들이 유린당했고, 처참하게 사망했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칭하는 것이 약소할 정도의)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고통 속에 살아왔고, 현재도 살아가고 있다. 이 ‘아이들’의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특히 형제복지원 사건은 국가와 사유화된 법인이 손을 잡고 ‘보호’와 ‘시혜’, ‘복지’라는 미명 하에 저지른 아동 집단 학살 사건이다. 이들은 ‘아동 소대’까지 만들어 납치, 감금, 폭력, 학대, 노예 노동, 살인을 저질렀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관련 기사 :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김재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는 지난 해, ‘형제복지원 인권 침해 불법 행위 사건의 책임, 기억, 그리고 미래’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관련 자료 : 형제복지원 인권 침해 불법 행위 사건의 책임, 기억, 그리고 미래) 저자는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와 ‘피해자 모임’이 생산해 낸 진상 규명의 노력을 또 하나의 학술적인 기록으로 남기고자 이 논문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논문은 1984년 당시 9살이었던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한종선’이 12살이었던 누나와 함께 죽지 않고 ‘살아남아’ 쓴 책 <살아남은 아이>(이리 펴냄)와,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를 비교하며 시작된다. 유태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맥락이 되었듯이, 일제 강점기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만들어진 부랑아/부랑인 정책이 형제복지원 사건의 맥락이 되었다는 것이다. 형제복지원은 “국가 정책이 생산한 사회 복지 (수용) 시설”이었다.
형제복지원의 실체는 1986년 12월 경, 부산지검 김용원 검사가 산행 길에 우연히 수용자들의 감시, 폭행, 강제 노역을 목격하고, 수사를 시작하면서 드러났다. 하지만 당시 대법원은 사회복지사업법, 생활보호법, 내무부 훈령 제410호 등 관계 법령을 근거로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에 대한 대부분의 기소 내용을 무죄 선고했다.
수천 명을 감금, 폭행하고 노역을 시켰으며, 그 결과 500여 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음에도 말이다. 저자는 사회복지법과 생활보호법이 강제 구금, 강제 노역 등을 정당화할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법리적으로 논박하면서, 당시 대법원이 국가 범죄의 책임자를 처벌하는 대신 “국가 범죄의 최종적 완결자”로 기능했음을, 따라서 형제복지원 사건은 명백한 국가 범죄임을 논증한다.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평생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고통으로 힘겨웠다고, 국가가 진상 규명과 피해 보상을 하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인 시위를 벌이고 힘든 싸움을 시작한 지도 벌써 4년이 되어간다. 2014년 3월과 7월, 두 번에 걸쳐 ‘형제복지원 피해 사건 진상 규명 및 피해자 지원에 관한 법률안'(진선미 의원 대표 발의)이 발의되었으나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했다.
법안은 국가가 주도적으로 피해 증거를 모으고, 진상 규명을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상당수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이 사건 당시 어렸고, 시설 폐쇄 이후 뿔뿔이 흩어져 사건의 피해를 증언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폭력적으로, 증거가 부족해서 특별법 제정이 어렵다며 발뺌을 하고 있다.
국가 폭력 사건은 철저한 진상 규명과 함께 처벌, 손해 보상, 그리고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그러한 사후 조치가 이루어지더라도, 국가 폭력으로 인해 평생 불건강하게 살아온 피해자들이 다시 건강한 삶을 꾸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 저자는 국가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 통제를 행할 수 있는 시민 권력을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이에 더해, 아이들에 대한 더욱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사회가 아동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회의 수준을 나타낸다. 국가 폭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9살, 10살의 아이들이 이제 30대 후반에서 40대 중후반이 되어 시위를 한다. 그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아팠고, 스스로 “성장이 멈췄다”고 표현한다.
이유도 모르고 끔찍한 학살의 현장 속에 있었던 9살, 10살의 아이들에게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사회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라 할 수 있을까.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라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국가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사회일까. 우리 사회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서상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