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했으니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오늘 우리에게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려 있는 수상한 시대임을 절감한다.
지금 (이상하게도) 진단서가 사건의 중심처럼 되어 있지만, 우리는 진단서가 정확한지 아닌지 물으려 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을 통해 진단서가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의학적’ 판단이 얼마나 불확실한지, 그리고 ‘전문가’의 전문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지, 알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국가폭력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정하는 데에 사망진단서는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 명백한 인과관계를 일부러 회피하는 모든 논란은 다른 의도를 가진 ‘노이즈’임을 강조한다. ‘병사’와 ‘외인사’를 두고 다투는 것이 근본 원인 또는 구조적 원인으로서 국가폭력을 가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진단서에 대한 심판은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충분하니, 다른 진실을 묻는 것이 급하다.
오늘 우리가 물으려 하는 것은 전문가와 전문성의 역할이다. 부수 효과 또는 한가한 질문인지도 모르지만, 작년의 메르스나 올해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볼 때 이 질문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이른바 사법 전문가의 일탈과 비윤리, 몰염치, 그리고 다시 있을 이 죽음의 ‘사법화’와도 맞물려 있다.
먼저 전문직과 전문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이에 대해서는, 마침 이번에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라, 의료 전문직을 원형으로 삼을 만하다. 서양에서 의료 전문가는 신학과 법률 전문가와 더불어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적 전문직이다. 이들 전문가가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사회가 어떻게 반응했는가가 다른 전문직에게도 모델이 되었다.
‘전문가주의’(또는 프로페셔널리즘)라는 말이 이런 전문가의 특징을 가리킨다는 것은 유명하다. 사회학자들이 정리한 것을 참고하면, 전문가 집단이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전통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원문 바로가기).
– 구성원들이 지배하는 고유한 지식체계
– 시장에서의 독점권
– 국가나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근로 조건에 대한 자율성
– 윤리 규범
– 이타심과 경제적 보상 이상의 가치로운 업무 수행
– 장기간의 훈련과 훈련의 내용 및 질에 대한 자율적 결정
의료 전문직 특히 의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런 특성들,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진 전문가주의가 어떤 한계가 있고 어떤 비판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의료전문직을 중심으로 한 전문가주의의 역사적 변화는 김장한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원문 바로가기).
한국에서 ‘전문(가)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현재 어떤 상태에 있든, 이는 파탄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도 C형 간염 사건과 같이 전문성과 윤리를 문제 삼을 사건이 심심치 않게 있었지만, 일부 측면만 드러난 것이었다. 백선하 교수의 진단서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전문가주의의 붕괴를 보인 상징적 사건이다.
전문가가 현실에 개입해 들어오는 한, 해석도 해석이지만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더 중요하다. ‘고유한 지식체계’를 믿을 수 없고, ‘자율성’은 허구이며, ‘윤리 규범’이 작동하지 않는 전문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가치로운 업무 수행’을 하는 것 같지 않고, 아무리 봐도 ‘질에 대한 자율적 결정’임을 믿을 수 없는 전문직, 하나의 ‘주의’(전문가주의)가 있다고 해서 그들을 그냥 두고 봐야 하는가?
다른 것에 앞서, 전문가의 자율성이 작동하는지, 앞으로는 기능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의대생과 일부 의사가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동업자인 의사협회가 의견을 낸 것으로, 그리고 전문가끼리 ‘동료평가’가 이루어진다 해서(기자회견 자리에서 사인을 두고 같은 대학 교수가 서로 다툰 것을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자율성이 작동한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그보다는 좀 더 근본에 도사리는 ‘권력’의 문제를 주목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모든 사회적 활동은 국가, 자본, 시민사회의 권력관계를 바탕에 둔다. 전문가의 활동 또한 국가, 자본, 시민사회에 속하는 다른 ‘시민’과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국가와 자본에 잠식되면 ‘식민지화’되기도 한다. 아니,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권력에 편입된, 식민지화는 일상적 현상인지도 모른다.
국가나 자본과의 관계에서 전문가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는 단지 개인 수준의 윤리 문제(예를 들어 오류나 불성실)를 넘는다. 타락한 국가, 탐욕스러운 자본의 대변인 노릇을 한다면, 전문가 개인의 윤리가 아무 문제가 없어도 결코 윤리적일 수 없다. 연원을 알 수 없는, 그래서 결코 순수할 수 없는 ‘판단’과 ‘소신’을 말한다고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전문가에게는 한 가지가 더 있어 좀 더 복잡하다. 국가와 자본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전문가 또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무시하기 어렵다. 특히 일부 전문가는 독점적 권력을 갖는다. 이 독립적 권력은 어떻게 공적 가치를 유지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가?
이들 전문가는 국가와 자본의 틈새에서 독점적으로 판단하고 실천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다른 권력이 전문가 권력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꽤 넓은 공간을 점유한다(진단서를 쓰는 권한 정도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압도적인 국가와 자본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 빈 곳.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민주주의에서 전문가의 정치적 역할은 일반 시민의 역할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집합적 지혜를 뒷받침하는 데 기여할 때 가치를 갖는다.” 일반적으로는 정치학자 박상훈의 이 말이 맞지만, 일부 권력을 독점한 전문가에 대해서는 더 필요한 것이 있다.
‘차선’으로서의 전문가주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문가 권력이 가진 독점적 공간과 여지를 생각하면 다른 도리가 없다. 한두 가지만 예를 든다. 지금의 구도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의사가 환자에게 인간적 진료를 하라고 통제, 강요, 유인하기 어렵다. 명령과 처벌로 불가능하고, 돈으로도 충분치 않다. 변호사에게 최선을 다해 변론하라고 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에 미치기에는 국가와 자본, 다른 사회권력은 아직 무력하거나 촘촘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둔탁하다! 오직 하나, 전문직의 행동방식과 규범으로 내재화되어야 가능하다.
현실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전문직 내에서, 특히 일부 권력을 독점한 전문가 사이에서 (다시 말하지만 긍정적 의미의) 전문가주의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적 전문가주의가 부활해야 한다거나 그것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통 이후의 새로운 전문가주의를 구성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다시 ‘어떻게’라는 물음. 전문가의 새로운 행동양식과 규범이 내부에서 저절로 생기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전통적 전문가주의의 동업자 보호의식과는 반대로, 내부는 나누어지고 모순과 균열이 생겨야 새것이 클 수 있다. 다른 공적 가치가 틈입할 수 있어야 새로운 전문가주의가 자란다.
외생적으로는(또한 내생적인 것과 연결된다), 공적 가치를 지향하는 시민사회의 여러 주체가 외부에서 ‘통제’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는 사회권력을 다시 편성하는 것, 즉 민주주의의 과제와 다르지 않다. 공적 가치를 중심으로, 참여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압박해야 한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만들어진 ‘시민과학’의 최근 사례가 하나 있다. 미국 플린트시에서 상수도 납중독 사건이 어떻게 공적 이슈가 되었나 하는 것이 그것이다 (관련자료1, 관련자료2). 간접적이나마 새로운 상상을 위해 참고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