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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연구통] 임상현장에서 ‘건강의 사회적 요인들’에 대해 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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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진료과정에서 의사는 환자의 건강상태와 관련하여 어떤 요인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 체온이나 몸무게, 혈압과 같은 생리적 지표들? 흡연, 음주, 운동 등 환자의 생활습관? 아마 여기까지는 당연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어떨까? 가난, 굶주림, 실업, 학대, 차별, 고립, 주거환경 등 환자가 처해있는 사회적인 맥락들, 일명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Social determinants of health)”이라 불리는 보다 근본적인 요인들 말이다.

 

의사가 환자와의 면담과정에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 이는 “3분 진료”가 다반사인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의료인들이 이러한 역할의 필요성을 긍정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의료인의 역할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임상 현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과연 그러한 문제들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 또 얼마만큼을 개입하라는 것인지가 난감하고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세계의사협회와 영국의사협회 등에서는 이미 2011년부터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들에 개입하는 것을 의사 역할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그 실행을 촉구해 왔다. (☞관련 자료 : WMA Statement on social determinant of health,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 – What Doctors Can Do, 건강불평등 완화를 위한 의사의 역할)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는 의료인들의 실질적 행동을 돕기 위해 보다 구체적인 행동 지침들이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다.

 

캐나다의 “클리어(CLEAR)”가 대표적이다. 클리어(CLEAR)는 2010년 캐나다 맥길대학(Mcgill University)의 앤 앤더만(Anne Andermann)교수를 주축으로 한 국제공동연구팀이 개발한 지침서로, 보건의료계 종사자들이 임상현장에서 환자의 건강상태의 기저에 놓인 사회적 원인들에 대해 묻고 행동하는 것을 돕기 위해 개발되었다. 현재 클리어(CLEAR)는 한국어를 포함하여 14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공개되어 있다.

 

클리어(CLEAR)지침은 크게 4단계로 구성된다.

1) 치료하기(TREAT): 현재 드러난 질병을 치료하기

2) 질문하기(ASK): 기저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묻기

3) 연계하기(REFER): 지역사회 지지 자원들을 연계하기

4) 옹호하기(ADVOCATE): 지지적인 정책과 사회 환경을 옹호하기

 

▲ CLEAR 지침서 한국판의 첫 장.

(링크: https://www.mcgill.ca/clear/files/clear/clear_toolkit_2015_-_korean.pdf)

 

지난 11월, 캐나다 가정의 전문지(Canada Family Physician)에는 클리어(CLEAR)의 수용 및 활용가능성을 탐구 분석한 논문이 실렸다. (☞관련 자료 : Health workers who ask about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 are more likely to report helping patients: Mixed-methods study.) 아닐라 나즈(Anila Naz)를 비롯한 5명의 연구진은 클리어(CLEAR)지침을 시험적으로 사용한 캐나다 몬트리올 소재 세인트 마리 병원 가정의학 센터(St Mary’s Hospital Family Medicine Center)에 근무하는 의료인들을 대상으로 2013년 7월부터 2014년 6월까지 연구를 진행했다. 온라인 설문조사, 심층면접, 초점집단 면접 등 다양한 조사방법이 활용되었으며, 가정의학과 의사, 의료계 종사자, 고위 관리자들이 조사에 참여했다.

 

연구의 주요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설문에 응한 의료인들 중 대부분(88%)이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다루는 것이 의료인의 역할”이라는 데 동의하였다. 클리어(CLEAR) 지침서에 대해서는 응답자 대부분이 “명료하게 읽히며, 업무 관련성이 높고, 사회적 요인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클리어(CLEAR)가 “의료인들의 업무방식을 변화시키고” “더 큰 사회적 행동으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줄 것”이라는 데에는 과반수 정도가 동의했다. 한편 임상현장에서 사회적 결정요인을 이야기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는 롤 모델과 훈련의 부족, 시간 제약 등이 도출되어 이를 개선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연구진은 환자의 사회적 건강결정요인에 대해 묻는 법을 알고 있는 의료인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환자를 돕기 위한 행동을 취했다”고 보고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 (전자는 93.8%, 후자는 52.9%). 이는 클리어(CLEAR)의 2단계, 곧 환자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묻는 것”이 환자를 돕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함의하는 것이다.

 

연구의 제목이기도 한 이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들로 언급되는 빈곤, 교육, 노동 등의 문제들은 그 수준이 포괄적이어서 한 개인이 그에 접근하고 영향을 미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결과는 그 어려워 보이는 것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들에 대해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개개인이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상당히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클리어(CLEAR)의 3단계인 ‘자원 연계하기’나 4단계인 ‘더 큰 사회적 변화 옹호’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또한 환자가 의료인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건강을 결정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인지하고 논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환자의 역량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아마 개별 의료인들 중에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라 할 수 있는 환자의 경제적 상태, 사회적 관계, 주거환경 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조언을 제공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개인적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별 의료인의 성향이나 의지에 좌우된다면 상황은 크게 개선될 수 없다. 그와 같은 접근을 보건의료체계 내에 위치시킬 방법, 혹은 적어도 그 필요성을 사회적으로 논의해나가야 한다.

 

환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심이 없는 의료는 결국 “회전문 의료(revolving door medicine)”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는 환자가 치료를 받고 병원 문을 나선다고 해도 근본적 문제에 개선이 없다면 환자는 다시 의료인을 찾게 되며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의미다. 이 악순환의 고리, 그리고 그와 맞물려 심화되는 건강불평등에 맞서기 위한 대안으로서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의료인의 새로운 역할과 그 잠재적 가능성을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시민건강증진연구소 회원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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